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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제대 대학원생과 신라 '화랑'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 상권 74쪽을 보면 "신라 화랑도의 기원이 "옛 씨족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상한 설명이 나온다.

왜 이상한가 하면 그렇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화랑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책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고 그밖에도 조선 시대에 나온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등이 있다.

뒤의 두 책에는 화랑의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 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추가돼 있기는 하나 대체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베끼고 있다. 따라서 화랑이 어떻게 설치됐는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는 것으로 족하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화랑은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여자를 원화(源花)로 삼아 각기 100명이 넘는 무리를 이끌도록 했으나 이 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얼굴이 고운 남자를 뽑아 화랑이라 하고 무리에게 그를 받들도록 한 데서 비롯됐다.

원화나 화랑 제도 모두 진흥왕 때 있었던 일로 나온다.

이런 화랑도를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서로 도의(道義)를 닦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으로 즐겁게 하고 이름난 산과 큰 강을 돌아다니어 멀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고 있다.

이를 볼 때 화랑이 무리를 지어 전국을 순회한 어떤 집단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국사교과서 설명처럼 "옛 씨족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기록대로라면 화랑은 그 뿌리가 옛 씨족사회 청소년 남성 집단이 아니라 원화라는 여성이 이끌던 집단에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사교과서는 화랑의 기원에 대해 마치 그것이 역사적 진실인양 단정적인 표현을 써 가며 근거도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랑의 기원에 대한 이런 설명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7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1929년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라는 중국 옛 역사책 한 구절과 씨름하는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 대학원 1학년생과 마주하게 된다.

이 대학원생은 이 때 나이가 27세, 이름은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라 했다.

1902년생으로 1971년 7월 충남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해 말 69세를 일기로 저승길로 떠났다.

미시나는 「임나흥망사」를 쓴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1904-1998)와 함께 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庫吉),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잇는 일본 사학계 2세대의 간판 스타.

1929년 27살이던 이 대학원생은 신라 화랑에 대한 연구보고서 한 편을 제출하는데 제목이 '신라의 기속(奇俗) 화랑제도에 관하여-신라 사회사의 연구'였다. 이 논문은 「역사와 지리」라는 학술잡지 제25권 1호부터 제27권 5호에 걸쳐 연재된다.

이 연구보고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미시나 자신이 밝히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으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어떻든 이 연구보고서를 통해 미시나는 신라 화랑의 기원에 대해 그 때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담한 학설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옛 씨족사회의 청소년 집단"이었다.

미시나는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추론했을까? 그것을 알고 나면 폭소가 나온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각각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는 마한.진한.변한의 이른바 한(韓)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전하는 '동이전'(東夷傳)이 있는데 두 기록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 구절이 있다.

"관가(官家)에서 일이 있을 때는 성곽을 쌓게 하며, 젊고 용맹하고 건장한 사람들이 모두 등가죽에 끈을 꿰뚫어 거기에 곧고 큰 막대기를 매달아 날마다 소리를 지르고 잡아 끌면서 아픔을 모르도록 단련한다"

이 기록을 미시나는 부족사회인 한(韓)에서 남자가 자라 성년식을 치르는 고통스런 의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시나는 이런 부족사회의 성인의식이 신라 화랑의 뿌리가 된다는 설명을 붙였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 학계 수준으로는 놀랄만큼 세계 각 지역 원시 부족에 대한 인류학적, 민속학적 연구결과를 종합하면서 화랑과 비교했다.

대만, 중남미, 태평양 군도 등지를 오가는 그의 종횡무진한 인류학적 지식 동원은 분명 경탄할 만하며 그 노력만큼은 높이 사야 한다.

하지만 방법이나 접근이 신선하다 해서 그 연구가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점이 비단 일본 역사학뿐 아니라 한국역사학에도 비극이었다.

왜인가? 미시나가 신라 화랑의 뿌리가 된다고 본 부족사회 한(韓)의 '고통스런 성인의식'은 성인의식이 아니라 성곽을 쌓기 위해 흙이나 돌 같은 건축 자재를 지게에 실어나르는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지게로 물건을 져다 나르는 내용을 27살 풋내기 대학원 1학년생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오독(誤讀)을 바탕으로 성인식과 연결한 것이다.

그의 화랑 연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미시나의 이런 주장이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 꽤 수용됐다.

한국 고대사의 권위자로 통하는 한 교수는 이를 "획기적"이라고까지 했다.

한문 해석조차 제대로 못한 27살짜리 대학원생의 주장에 비판은 못할망정 "획기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구나 이때문에 국사교과서에 그렇게 실리게까지 됐으니 미시나를 원망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를 추켜올린 우리 역사학계를 질타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2001-07-22 00: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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