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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제도와 박정희

군사 쿠데타라는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역설적이게도 집권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에 걸맞게 박정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던 박정희는 집권 11년만인 1972년 직선제이던 대통령 선거방식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 방식으로의 전환과 체제비판에 대한 긴급조치 발효 등을 골자로 한 유신체제를 선포함으로써 장기집권에 대한 노골적인 저의를 비치게 된다.

물론 유신체제 아래서도 박정희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외쳤다.

온갖 비민주성을 다 갖춘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런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박정희 혹은 유신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아니다. 박정희 민주주의는 늘 반공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즉 박정희 정권을 지탱한 이데올로기는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의 민주주의는 '괴뢰공산' 정권인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체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세운 허울에 불과했다.

반공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데 윤리학과 역사학이 동원됐다. 철학자인 박종홍이 주도한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고 국사교과서가 검인정에서 국정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는 시점이 유신정권 출범과 때를 같이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윤리학과 역사학은 때로 반공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창출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하기도 했다. 이 두 가지 학문을 이어준 대표적인 고리가 화백(和白)이었다.

70년대 들어 한국 윤리학과 역사학에서는 화백에 대한 연구 혹은 언급이 부쩍 증가했으며 특히 국민윤리와 국사 교과서에서 이런 현상이 현저했다.

화백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和) 의논한다(白)는 뜻을 지닌 화백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우리측 문헌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반면 송나라 때 편찬된 당나라 역사서 「신당서」(新唐書)의 한 부분인 '신라전'이라는 곳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여기서 이르기를 "(신라에서는) 일이 있을 때는 모두 모여 논의하는데 이를 화백이라 하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논의가 깨진다"고 하고 있다.

이를 박정희 정권 치하 윤리학에서는 한국 민주주의 정신의 전형을 보여 주는 사례라 치켜 올리기에 급급했고 역사학에서는 신라 상대사회의 씨족장, 혹은 부족장 회의 합의체의 흔적이라고 앞다투어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유감스럽게도 신라 왕권, 나아가 신라 왕국 자체를 허약하게 보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하들이 왕은 제껴두고 저희들 마음대로 국사를 논의해 결정한다면 그 나라 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신라 왕권은 소위 화백에 의해 좌지우지될 만큼 허약했으며, 실제 화백이란 제도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화백이란 조선시대 의정부, 혹은 요즘의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와 어떻게 다른가?

앞서 지적했듯 화백은 국내 기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데다 그 많은 중국 기록중에서도 오직 한 곳, 「신당서」에만 한 구절에 달랑 나온다.

그러면 「신당서」는 화백이란 말을 어디에서 끌어댄 것인가? 이 뿌리를 알고나면 소위 화백이 신하들이 마음대로 국정을 주무르던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가 아니라 신라 국왕이 주재하던 전체 회의, 즉 조선시대 의정부 회의나 요즘의 국무회의와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이래 새로 들어선 왕조가 그 전왕조 역사를 정리하는 전통이 성립됐다. 이렇게 해서 「사기」이래 청나라 역사를 다룬 「청사」까지 기록이 모두 25가지가 되는데 이를 흔히 '25사'(二十五史)라 한다.

「신당서」는 당나라 역사를 당을 대신한 송(宋) 왕조가 정리한 것이다. 당에 앞선 왕조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다가 멸망한 수(隨)가 있다.

수를 대신한 당은 수나라 역사를 편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서」(隨書)였다. 당 태종을 보좌한 명재상으로 이름높은 위징(魏懲) 등이 편찬한 이 책에도 역시 신라에 대한 기록인 '신라전'이 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모든 관리를 모아 놓고 자세히 의논해 결정한다"

이것이 이른바 「신당서」에 등장하는 화백회의의 뿌리이자 실상이다. 이런 「수서」 기록이 「신당서」로 옮겨와서는 '화백'이라는 이상한 껍질을 덮어쓰게 되며 이런 체제 아래서 신라 왕 또한 실권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화백이라는 용어는 제쳐놓고라도 분명 「수서」에서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모든 관리를 모아 의논한다 했다. 명확한 설명은 없으나 이런 회의를 소집하는 주체는 당연히 신라 국왕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중요한 직책에 있는 관리들을 모아 의논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전통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진시황 시절에도, 당태종 시절에도 있었다.

우리 역사에도 고금을 막론하고 큰 일이 있을 때는 다 이랬다.

따라서 이른바 '화백' 제도란 게 의정부 회의나 요즘 국무회의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소위 화백제도는 반공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유신정권 아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모범이자 뿌리로 정권 홍보의 나팔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1-07-22 03: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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