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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연구부록 「삼국사기」

그가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일본 역사학계에서 '쓰다사학'(津田史學)이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어낸 역사학자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가 있다.

그의 약력을 살펴보면 와세다대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당시 일본 역사학계의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할 만한 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古吉)에게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사사받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교단에 한동안 섰던 그는 39세에 만철(滿鐵)조사부 연구원이 된다. 만철이란 일제가 만주 침략 및 경영을 위해 세운 철도회사인 만주철도의 줄임말로 일제는 산하에 이런 연구기관을 두고 학자들을 동원해 효과적 만주지배를 위한 조사사업을 하게 했다.

이 기관은 만주와 조선은 하나이다, 고로 조선이 일본 식민지이듯이 만주 또한 일본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이란 일제 어용사학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쓰다는 여기서 꽤 중추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만선사연구회를 발판으로 쓰다는 다이쇼 7년(1918)에는 와세다대 교수로 취임한다. 이 무렵 쓰다의 명성을 높인 이른바 역저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19년에 초판이 나오고 1924년에 증보판이 선보인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이다.

이 단행본은 제목 그대로 현존 일본 최고(最古) 문헌들인 「고사기」(712년경 편찬)와 「일본서기」를 연구한 것이다. 다만 이 단행본이 이들 두 고문헌 전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며 쓰다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듯이 초대 천황이라는 신무(神武) 이래 신공황후(神功皇后)까지의 시기를 주로 다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신무 이전에는 이른바 신대(神代)라 해서 천황 출현 이전 신들의 세계를 다룬 부분이 있는데 이런 신대사(神代史)에 대해서는 쓰다는 「신대사 연구」라는 별도의 연구서를 냈다.

따라서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는 「신대사 연구」의 자매편이다.

1924년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나온 이 책 증보판 목차를 보면

▲ 총론
▲ 제1장 신라 정벌 이야기
▲ 제2장 구마소 정벌 이야기
▲ 제3장 동국(東國) 및 에미시에 관한 이야기
▲ 제4장 황자분봉(皇子分封) 이야기
▲ 제5장 숭신.수인천황 2조(二朝) 이야기
▲ 제6장 신무천황 동쪽 정벌 이야기
▲ 결론으로 구성돼 있다.

책 전체 분량은 650쪽인데 몸통이라고 할 총론 이래 결론까지는 500쪽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150쪽 가량 되는 분량은 서너쪽의 색인을 제외한 부록이 차지한다.

부록 치고는 양이 굉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아주 묘한 것은 150쪽이라는 적지 않은 부록 거의 전부가 「삼국사기」비판에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부록 목차만 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해'라는 제목 아래 그것을 비판하고 이어 '제2 백제에 관한 「일본서기」 기록'라는 장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현대 역사학의 초석을 놓았다는 쓰다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논하는 자리에다 끼워팔기 하듯 「삼국사기」를 부록으로 넣었을까? 우연인가, 아니면 고도의 의도성이 내재된 의도적인 행위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후자에 가깝다. 왜 그런가?

「삼국사기」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신라와 백제는 각각 기원전 1세기 무렵에 건국했고 서기 1-2세기 즈음에는 각각 지금의 경상도와 한반도 중부지방 일대를 장악한 완연한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만선사연구회에 참가해 조선과 만주는 하나이며 조선이 일본 식민지이므로 만주 또한 일본식민지가 돼야 하며, 따라서 고대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그에게 「삼국사기」는 장애물이었다.

꽤 많은 국내 역사가가 실증과 비판에 철저한 쓰다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하고 백제까지 야마토정권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일본서기」 기록을 부정했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쓰다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데서 온 착시현상일 뿐이다.

쓰다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하고 신라 왕궁 앞에다가 신라는 영원히 야마토의 속국임을 표시하는 지팡이를 꽂고 귀국했다는 기록 자체를 비판했을지언정 이런 신공황후 설화가 실제의 신라-야마토정권 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 이른바 임나일본부설도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그에게 「삼국사기」는 없애버려야 할 산이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고대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끼치기는 커녕 임나일본부설도 뿌리가 뽑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다는 이런 「삼국사기」를 부정하기 위해 첫째 「삼국사기」 중에서도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는 소설이며 둘째, 따라서 백제와 신라의 건국연대 또한 4세기를 넘어가지 못한다고 건국연대까지 수백년을 끌어내렸다.

쓰다는 「삼국사기」를 몰아낸 기원전 1세기-기원후 4세기에는 「삼국사기」 대신 중국기록들인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을 끌어다 댔다. 이들 중국기록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에는 78개나 되는 고만고만한 국(國)이 난립해 있고 백제와 신라는 이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삼국사기」 비판을 쓰다는 어디에서 따온 것일까? 어처구니 없게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연구가 자양분 역할을 했다. 바로 여기에 '쓰다사학'의 어용성, 혹은 식민성이 도사리고 있다.

비단 쓰다가 아닌 삼척동자라 해도 한 두명도 아닌 10여명이나 되는 천황이 100살 넘게 왕노릇을 했다는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망탄된 사서(史書)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이들 두 사서 초기기록은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인 것이다.

쓰다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라는 책에서 이른바 엄격한 문헌비판과 고증이라는 두 칼을 양손에 쥐고서 이들 두 사서를 집중 공격했다. 그런데 쓰다는 그 자신이 공중분해한 「일본서기」와 「고사기」 자리를 「삼국지」와 「후한서」 같은 중국기록 중의 '왜인전'(倭人傳)으로 채웠다.

그의 눈에는 이들 중국기록이 훨씬 자연스럽고 역사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본서기」 및 「고사기」 연구 방법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국사기」를 전염시켰다는 점이다.

쓰다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전부 가짜라 몰아붙이고 그 자리에다가 중국기록을 내세운 뿌리는 그 자신의 「일본서기」 연구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쓰다는 「일본서기」라는 코드 속에서 「삼국사기」를 읽은 셈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연구」 부록에 하고 많은 주제 중에서도 「삼국사기」 비판이 왜 들어가 있는가라는 의문은 여기에서 비로소 풀린다.

2001-07-22 03: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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