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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 강화와 개혁

지난 6월 13일 서울 한글회관에서는 국내 역사 관련 23개 학회 대표자가 한 자리에 모여 공동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연례적인 역사학 관련 최대 학술행사인 '역사학대회'가 아니고는 이처럼 많은 단체가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드문 현상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적어도 10수개를 헤아리는 역사학 단체 합동모임이 부쩍 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고 있을까?

첫째는 이른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직접적인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둘째는 수십개를 헤아리는 이들 역사 관련 단체들에게는 역사학 위기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날 23개 단체 공동기자회견 또한

▲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재수정을 촉구하고
▲ 이번 사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하는 한편
▲ 우리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촉구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중에서도 마지막 '우리 역사교육 강화'를 보면 현재 우리 역사학계 스스로가 목청높이 외치는 이른바 '역사학의 위기'의 실체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우선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촉구한다'는 제목으로 이날 발표된 23개 단체 공동 건의문을 보자.

이들 단체는 "우리 나라 역사교육은 학교와 사회에서 계속 축소되거나 폐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중.고교에서 역사교육은 이미 독자성을 상실한 채 사회과의 한 영역이나 과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나아가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중.고교 한국사 수업의 시간수가 줄어들고 고교의 한국 근.현대사 교육은 사실상 선택으로 바뀌었다. 세계사 교육은 더욱 참담한 실정이다. 세계사는 중학교의 경우 이미 1980년대 제4차 교육과정부터 사회교과서에 통합되었으며, 제6차 교육과정부터는 고교에서도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국사나 세계사 교육이 일선 중.고교에서 현저히 줄어들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역사교육이 나날이 축소되는 현상을 건의서는 "왜곡된 역사교육의 현실"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사 관련 학계가 생각하는 대응책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이들 단체는 모두 6가지를 구체적으로 내세웠으나 현행 국가가 편찬한 단 한 종류의 국사교과서를 검인정으로 전환하자는 내용을 빼놓고는 나머지 5개가 일선 중고교에서의 역사교육 강화라는 한 줄기로 물길이 흐르고 있다.

예컨대 역사과목을 따로 독립하고 나아가 이를 필수과목화하며 교육시간도 늘려 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건의서는 "한국과 세계의 역사적 경험을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기계와 기술의 발전 위에 올바른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오로지 역사교육만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뜻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내 역사 관련 단체를 총망라하다시피 한 이들의 우리 나라 역사교육에 대한 실상 진단과 이에 대한 대처방안 및 그 근거는 얼마만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까?

여기서 다른 학계가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국어학자를 만나면 국어를 몰라서는 안된다 하고 영어학자는 영어를 알아야 한다고 하고 수학자는 수학만은 알아야 한다 하며 물리학자는 물리학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어를 몰라도, 수학과 영어, 물리, 화학을 몰라도 되면 몰라도 된다. 이들 학문을 몰라도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거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몰라도 된다. 인간에게는 알고 싶은 자유가 있듯이 몰라도 될 자유도 있다.

국사 또한 마찬가지다. 국사를 알고 싶지 않으면 몰라도 된다. 국사를 몰라도 될 자유가 모든 인간에게는 있고, 또 있어야 한다.

세계 정보통신 소프트업계를 주름잡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 빌 게이츠가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된 것은 미국사나 세계사에 정통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많은 돈을 번 것이 우리 역사에 정통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역사를 그다지 몰라도 그 분야 최고가 되었다.

역사학 교수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미국 하원의장이었으며 누구보다 역사에 정통했을 뉴트 깅그리치가 역사학자였기 때문에 역사를 잘 모르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정치를 더 잘했다는 평가는 아직까지 없다.

역사를 더 안다 해서 그 나라, 그 개인이 더 부강해지는 것도 아니요, 생명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며, 또 모른다 해서 패가망신하는 것도 아닐진대 다른 학문은 다 제껴 놓고 유독 역사학만이 교육현장에서 특혜를 받을 이유도, 근거도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지원하라고 강요할 수 없듯이, 어떤 회사, 어떤 부서에 지원하라고 강요할 수 없듯이(권고는 가능하다) 역사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여러 선택들(alternatives)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

대신 역사학은 이런 선택 체제에서 다른 경쟁자들에게서 이기기 위해 환골탈태 해야 한다. 역사가 재미있고, 설혹 돈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살아가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지원자는 몰리기 마련이며 몰라도 된다고 해도 알고자 하기 마련이다.

역사학계는 역사교육 강화를 외치기 전에 이른바 역사 수요층이 왜 「서양사 개론」 대신 「로마인 이야기」를 찾게 되는지, 「조선붕당제도연구」 대신에 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찾게 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에 지금 시급히 필요한 영양분은 국사를 필수화하고 수강 시간도 늘이는 역사교육 강화가 아니라 역사교육 내용 자체의 개혁인 것이다.

2001-07-22 03: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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