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가까스로 누르고 연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전인 그해 6월 12일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지시가 있은지 사흘만인 15일에는 경주관광개발계획단이 구성되거니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정소영이 단장을 맡고 단원으로는 경제기획원 예산국장, 내무부 지방국장, 건설부 주택도시국장, 문공부 국립박물관장과 문화재관리국장, 교통부 관광국장, 조선호텔 사장이 선임됐다.

7월 1일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그달 16일 경주개발의 대의(大義)를 직접 펜으로 적은 메모지를 경주관광개발계획단에 내려보내는데 여기에 적힌 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라 고도(古都)는 웅대.찬란.정교.활달.우아.유현(幽玄)의 감(感)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

이튿날 박정희는 '경주개발계획 작성 지침'을 역시 손수 펜으로 써서 하달한다.

여기에는 박정희 스스로가 그린 경주 일대 '관광코스 예(例)'라는 지도 한 장이 붙어 있다. 경주에 대한 박정희의 열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1월 완성된 경주개발계획 3대 방침을 대략 추려 보자.

1. 경주 일원 모든 유적과 유물을 13개 사적지구로 묶어 종합 복원.정화한다.

통일정신 숭앙의 터전인 통일전(統一殿)과 화랑의 집을 건립한다.

2. 이에 병행하여 도시 기반시설과 환경을 정비하며 주변환경 정비사업으로 농업개발과 산림녹화 등을 행한다.

3. 관광위락단지를 개발한다. 특히 외국인을 위한 관광시설이 필요하며 부차적으로 관광수익 증대를 위해 보문호 주변에 숙박시설 및 오락시설을 갖춘다.

경주개발계획처럼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 실체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곳도 드물다. 방침 1을 통해 통일전과 화랑으로 대표되는 멸사봉공 통일정신이 드러나며, 방침 2에는 조국근대화의 기치가 펄럭이고 있다. 방침 3에서는 박정희 경제정책의 핵심인 수출증대와 외화획득이란 구호가 스며난다.

어떻든 이런 경주개발계획은 크게 두 가지 사업으로 구체화된다.

첫째는 사적 일대 정비 복원이며 두번째가 보문단지 개발이다. 이런 사업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경주개발계획과 고고학의 관계이다.

사적 정비복원 계획에 따라 불국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으며 1973년 천마총을 시작으로 황남대총 발굴, 황룡사 터 발굴, 안압지 발굴과 같은 국가 주도 대규모 발굴이 이어진다.

여기에 대대적으로 고고학자와 고건축학자 및 역사학자(특히 고대사 전공자)가 동원된다.

요즘 고고학자라는 사람들은 일제 식민강점 시절 타율적으로 도입된 우리 고고학이 무슨 거창한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지금까지 성장한 듯이 말하곤 하는데 그다지 신뢰할 만한 언급은 아니다.

한국고고학은 박정희 개발독재와 궤를 같이하며 성장해 왔다. 때로는 정권에 이용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정권을 이용하기도 했다.

한국고고학을 성장시킨 원동력은 누가 뭐라 해도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사업중에서도 경주관광개발계획은 오늘의 한국고고학을 있게 한 거대한 주춧돌이었다.

고고학은 그 태생이 어용이다. 히틀러의 나치정권은 유대인 학살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고학을 이용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고고학은 이른바 형질인류학이라 해서 게르만족 순수 혈통주의를 주장했다.

한국고고학이 독일처럼 파시즘에 의한 집단학살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 정권의 총애를 받으며 경주 일대 유적 발굴을 통해 급성장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고고학 발굴현장을 직접 찾은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황룡사터 등 모두 3번이나 고고학 발굴현장을 찾았다.

현장방문 때마다 박정희는 특유의 '금일봉' 정책을 썼다. 73년 천마총 발굴 때는 100만원을 선뜻 내주고 갔다.

이른바 지식인 그룹에서는 거듭된 비판을 받고 있는 박정희이지만 그 치하에서 성장하거나 활동한 우리 나라 고고학자들중에 박정희를 욕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거의 없다.

박정희만큼이나 철권 독재정치를 폈던 전두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두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닌 고고학자 역시 거의 찾을 수 없다.

박 정권하에서 긴급조치 위반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해서 투옥되고 고문당한 그 수많은 이른바 민주투사 가운데 고고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고학자 혹은 인류학자를 싫어하는 독재자도 없다. 고고학과 독재와는 무슨 관계가 있기에?

고고학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학문이다. 땅 속에서 캐내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밖에 없고 그 하나하나가 우리 옛 문화의 새로운 면을 부활시킨다.

독재자는 거의 필연적으로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민족 주체성, 전통문화 부활을 부르짖은 박정희가 좋은 보기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박정희가 고고학을 가장 절묘하게 이용한 사건이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이다.

이곳에서는 금관과 천마도를 비롯해 '화려 찬란하기 그지없는' 각종 유물이 모두 10만점 가량이나 쏟아졌다.

신문과 방송은 이들 고분발굴 소식을 연일 톱으로 올렸다. 어떤 신문은 천마총 출토 천마도를 가리켜 "하늘을 비상하는 신라인의 기상"이라고 했다.

나라 안에서는 유신 철권통치가 치를 떨게 하고 각종 긴급조치가 발동돼 반체제 인사들이 붙잡혀 가고, 대외적으로는 막바지로 치달은 베트남전쟁 참전 우리 병사들이 죽어가는데도 박정희가 조종한 언론은 오로지 "오, 신라 금관이여, 오, 천마도여"를 외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박정희가 여론 호도를 위해 고고학을 이용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다면 고고학이 정권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고학 스스로는 몰랐을까?

아닌 듯 싶다.

한국고고학의 대부라는 김원룡. 그는 1978년 2월호 「뿌리깊은 나무」에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라는 수필을 기고하거니와 여기서 자신의 발굴 활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요사이는 너무 유적을 파헤치는 것 같다. 문화공보부는 선전하기 위해서 자꾸만 새 유적을 파는 것 같고, 대학교 총장들은 자기 학교 선전과 소장품 수집이라는 부산물에 끌려서 발굴비 쓰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 같다. 국토건설에 따르는 필요불가결의 유적 발굴도 미처 다 감당하지 못하는 판인데 그렇게 너도 나도 괭이 들고
나서서야 어찌 하겠는가"

김원룡은 분명히 유적 발굴에 정부의 선정성, 즉 고도의 정치성이 내포돼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고고학자는 김원룡만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