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에는 삼서지제(三壻之制)라는 희한한 신라 풍습이 소개돼 있다. 약칭 삼서제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한 여자에게 남자 세 명을 들인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삼서제가 한 여자를 두고 세 남자가 펼치는 일종의 그룹섹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자가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남자 세 명이 번갈아 그 여자에게 무차별적인 정자 공급을 하는 성(性) 봉사 시스템이 바로 삼서제다.

말하자면 이들 남자는 씨받이의 상대어인 '씨내리'인 셈이다.

삼서제가 제도를 뜻하는 제(制)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어느 정도 제도화, 일반화돼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필사본에는 딱 한 군데밖에 나오지 않는다. 삼서제가 시행된 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이었다.

왜 유독 선덕여왕에게 삼서제가 등장하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기존 사서를 통해 신라에서는 왕위계승권을 독점한 특권 신분계층인 성골(聖骨) 남자가 선덕의 아버지 진평왕을 끝으로 씨가 말랐음을 알 수 있다.

진평이 죽자 남은 성골은 선덕과 진덕 두 여자뿐이었다.

필사본에는 이같은 성골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해 성골 남자 소멸을 맞이한 신라 지배층에서 긴박하게 전개된 대응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덕에게 왕위계승권자인 아들을 생산하게 하기 위한 삼서제다.

13대 풍월주 용춘공전을 보면 진평왕은 황후에게서 아주 늦게 본 왕자가 있었다. 첫 황후인 마야부인이 죽자 진평은 승만(僧滿)이라는 다른 여자를 황후로 승격시키는데 여기에서 아들을 보았던 것이다.

이 때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진평왕 재위 말년이었음은 분명하다. 아들을 보기 전에 왕위계승권은 이미 선덕으로 굳어진 형국이었다. 하지만 승만황후가 뒤늦게 아들을 낳자 진평은 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이 아들은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선덕이 즉위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았으니 선덕에게도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성골 남자가 씨가 마른 상황에서 다음 왕위의 계승권이 문제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이에 선덕은 지아비를 골라 불러들이니 첫째 주자가 용춘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여 논의해 결정하기를 삼서지제에 따라 흠반(欽飯)과 을제(乙祭)에게 선덕을 함께 보좌하게 한 것이다. 말이 좋아 보좌이지 씨내리로 간택된 것이다.

이로 보아 삼서지제란 말 그대로 세 남자가 한 여자에게 씨내리를 함으로써 아들을 보기 위한 장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용춘이든 흠반이든 을제든 모두 아들 만들기에 실패했다.

남자들에게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선덕이 불임이 아니었던가 한다. 삼서지제에 따라 만약에 선덕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 그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갔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만약 선덕이 용춘이나 흠반, 을제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은 신분이 성골인가, 아니면 그 아래 진골인가? 성골과 진골의 개념조차 모호한 지금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선덕은 성골이고 용춘 이하 세 남자는 진골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런 반문이 일어난다. 삼서제로 낳게 되는 아들이 만약 진골이라면 삼서제를 굳이 시행할 까닭이 없어진다는 점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성골 왕 시대는 마지막 남은 성골인 선덕과 진덕으로 끝맺음을 하게 되고 진골 남자 중에 적당한 이를 골라 왕으로 추대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삼서제를 통해 성골인 선덕왕이 진골 남자의 씨를 받아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 또한 성골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점은 필사본에 나타난 성골과 진골 및 '골품'의 개념을 정리할 때 다루기로 한다.

여하튼 삼서제는 나중에 짚을 '마복자'(摩腹子) 풍습과 함께 기존 사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된다. 이와 같은 풍속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가짜로 꾸며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제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나 몽상가라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삼서제와 마복자 풍습을 어떻게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런데, 선덕왕을 둘러싼 삼서제는 필사본 말고도 그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앞서 「삼국유사」에 실린 비형랑-도화녀 설화가 필사본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그 설화적 상징장치의 굳은 자물쇠를 풀었음을 보았다.

삼서제 또한 비형랑-도화녀 설화처럼 설화라는 형태로 적어도 서기 935년 신라가 멸망하고 난 뒤 천년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꽁꽁 숨기고 있었다. 이제 화석화된 이 삼서제를 풀어헤쳐 보자.

< 연합뉴스 기자 김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