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당나라의 번국(蕃國), 즉 제후국으로 공식 편입돼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 것은 「삼국사기」 기록을 검토할 때 김춘추-김유신이 정권을 농단하는 선덕왕-진덕왕 재위 무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흔적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신라가 독자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받아들인 사실이 흔히 지적된다.

신라는 법흥왕 재위 23년(534)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제정해 처음 사용한 이래 100년 가량 줄곧 독자 연호를 써오다가 진덕왕 재위 4년(650) 당나라 고종 연호인 영휘(永徽)를 받아들인 이후 멸망할 때까지 중국 연호를 썼다.

신라는 중국식 연호 개정 1년 전인 진덕왕 3년(649) 봄 정월에는 중국 의관(衣冠)을 착용함으로써 '중국화'를 향한 가속페달을 밟게 된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한민족의 혼을 되살리기 위한 원동력을 고대사에서 찾고자 했던 신채호는 이러한 신라의 중국화를 사대주의라며 갖은 혹평을 가했다. 하지만 이는 단재가 그토록이나 경멸한 김춘추나 김유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 시대 국제관계가 그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런 평가가 실은 요즘 학계에서 흔히 조공(朝貢) 혹은 책봉(冊封) 체제라고 부르는 중국과 주변 여러 왕조간 관계를 어느 한쪽(제후국)이 다른 한쪽(중국)에 의해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퍼주기식 종속 외교관계'로 파악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명칭이야 조공이건 책봉이건 상관없이 신라-당 관계는 쌍방외교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힘있는 자가 상대적으로 힘이 부치는 다른 쪽을 자기 편으로 계속 끌어안기 위해서는 채찍만큼이나 많은 당근이 필요하다.

이때문에 때로는 중국도 엄청난 수혈을 감수해야 했다.

신라의 백제, 고구려 정벌에 당이 10만이 넘는 대군을 출병시킨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조선-청(淸)의 경우 조선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다고 알고 있으나 청이 조선에 퍼준 게 더 많다는 연구성과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상호관계'가 어느 때인가 변질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균열이 생기고 반발과 전쟁을 촉발한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한반도 전체를 직할령으로 삼으려는 당나라에 맞서 전쟁에 돌입한 것은 패수 이남 땅은 신라에게 준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채찍과 희생만 강요하는 당에 대한 반기였다. 이는 당에서 보면 '반란'이었다.

제후국으로 편입된 신라에 대해 당은 그에 합당한 반대급부를 주어야 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자 신라는 얼마 전까지 보호국 혹은 우군이 되어주리라 기대했던 당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백제, 고구려 정벌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나-당 전쟁을 매우 단순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쌍방 흐름'에 기초해야 할 조공관계가 붕괴, 변질됐다는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나-당 전쟁이 벌어질 무렵 당을 주축으로 한 당시 동아시아 조공체제는 붕괴 조짐을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당나라가 신라와 거의 동시기에 토번과도 전쟁에 돌입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당 전쟁은 중국 중심 조공질서가 붕괴하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며 나-당 전쟁의 의미는 '외세축출'이라는 단순한 시각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어떻든 당의 제후국이 되는 대신 그에 합당한 반대급부를 얻어내기 위해 신라는 무슨 일을 했는가? 이곳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논하는 자리이므로 한 가지 사건만 주목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재위 22년(723) 봄 3월조에는 성덕왕이 당시 당나라 황제인 현종에게 신라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두 여인 중 한 명은 이름이 포정(抱貞)인데 아버지는 나마 천승(天承)이며, 또 한 명은 정완(貞莞)으로 대사 충훈(忠訓)의 딸이었다.

한데 현종은 후한 상을 내리고 이들을 신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고자매'(姑姉妹)로서 친척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고 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으라 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고자매'가 고종사촌 자매인지, 고모인지, 혹은 다른 친족관계인지는 분명치 않다. 단, 왕과 혈연적으로 아주 가까운 친척임은 분명하다.

김부식은 이 사건을 성덕왕 때 일이라고 기록하면서도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삼국사기」 편찬 무렵까지 정완 묘비가 있었던 모양인데 김부식은 이 비문을 직접 보았던 듯 '정완 비문에는 '효성왕 6년(742) 즉 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어떤 게 옳은 지 알 수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신라가 여자를 중국에 바쳤다는 기록은 오직 이것 뿐이다. 따라서 이 한 가지만으로 신라가 정례적으로(혹은 자주) 중국에 대해 이런 일을 했으리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여기서 왜 유독 이 사건이 「삼국사기」에 남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 답은 「삼국사기」에 이미 나와 있다. 신라는 대대로 미녀를 골라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고 (황제는 이를 덥석덥석 받았던 것인데) 아주 희한하게도 포정, 정완 두 여인만은 본국으로 돌려보냈기에 이런 기록이 남은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자주였는지, 몇 번인지는 모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나-당 전쟁으로 잠시 붕괴됐던 조공관계를 회복한 신라가 당 조정에 미녀를 '조공'하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한데 포정, 정완 두 여인을 돌려보내면서 현종이 한 말이 영 예사롭지 않다.

분명히 현종은 두 여인을 가리켜 왕(성덕왕 혹은 효성왕)의 '고자매'라고 하고 있다. 참말로 이 두 여자는 신라왕의 고종사촌 혹은 고모인가? 결코 아니다. 왕과 혈연적으로 그렇게 가깝다고 보기에는 두 여인의 아버지는 관위(官位)가 너무 낮다. 포정의 아버지 천승(天承)은 11위에 불과한 나마이며 정완의 부친 충훈(忠訓)은 이보다도 한 단계 더 낮은 12위 대사다.

그럼에도 왜 현종은 이들을 신라왕의 '고자매'라고 부르고 있을까? 기록이 잘못됐다면야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다. 신라가 사기를 친 것이다. 힘없는 중.하위급 관료의 딸 중에서 인물 반반한 둘을 뽑아 당나라 조정에 바치면서 왕실 여인이라고 속였음에 틀림없다.

그랬기에 현종은 포정, 정완 두 여자를 신라왕의 '고자매'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할 만한 아주 결정적인 자료가 필사본 「화랑세기」에 있다.

< 연합뉴스 기자 김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