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을 보면 20대 풍월주 예원(禮元.607-673년)은 풍월주를 역임한 뒤 예부(禮部)를 거쳐 조부(調部)라는 관청에서 일한다.

그는 647년, 선덕왕이 재위 14년만에 죽고 진덕이 즉위하자 김춘추를 우두머리로 한 사신단 일행에 포함돼 당나라에 간다. 사신단에서 예원은 동행한 선화(仙花) 3명과 승려 3명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선화란 화랑도를 말한다. 선화 중에는 22대 풍월주를 역임하고 나-당 전쟁 와중에 중국에서 옥사한 양도(良圖)라는 인물도 끼어 있었다.

한데 이 사신단에는 유화(遊花) 3명이 포함돼 있었다. 유화란 정확한 개념 파악이 어려우나 명칭으로 보아 화랑도에 속한 여자임은 분명하다.

필사본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하므로 이들 유화 3인을 골라 데려갔으며 이들이 종실(宗室), 즉 왕실 여자라 속였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조 기록을 떠올리자.

김춘추의 신라사신단은 바다를 이용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몰아내고 경기만에 이르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때이므로 일행은 아마도 한강 하류 어느 항구(당항성일 가능성이 있다)를 출발해 서해를 건넜을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서해를 통한 사신단의 중국 항해로를 보면 예외없이 서해안을 올라가 요동반도 연안을 따라가는 이른바 연안항로를 이용하고 있는데 김춘추 일행도 틀림없이 이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런 항로를 떠올릴 때 직선 횡단코스에 비해 난파의 위험이 아주 적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실제 최근 공개된 17세기 조선사신단이 남긴 서해 연안항로 기록을 보면 이들 또한 시시각각 몰아치는 폭풍우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게 한 두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과 난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것이 고사(告祀)였다. 바다를 관장하는 신에게 안전항해를 보장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실제 17세기 조선사신단의 연행록을 보면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각종 고사를 시도 때도 없이 올리는 모습이 관찰된다.

비록 후대 자료이긴 하지만 이런 조선시대 서해 항해기록은 647년 김춘추 일행의 중국 사행(使行) 길이 어떠했을지 짐작하는 데 커다란 시사를 준다.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항해 도중 겪은 고초가 충분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김춘추를 수행한 예원공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통해 역시나 고난이 적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앞서 사나운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인간이 개발한 것이 고사라고 했거니와 고사는 늘 희생을 동반한다. 간단히 말해 공짜란 없는 법이다. 안전항해를 보장받기 위해 해신(海神)에게 무언가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해신이든 천신(天神)이든 지신(地神)이든 최고의 선물, 곧 최고의 희생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다. 희생물로 사람을 바치는 습속을 인류학이나 민속학에서는 인신공양(人身供養. human sacrifice)이라 한다.

인신공희(人身供犧)라고도 하는 이 인신공양을 바다와 관련시킬 때 한국인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눈먼 아버지를 눈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 앞바다에서 용왕에게 던져진 심청 이야기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그렇다면 바다 인신공양에 관한 심청전 이외의 이야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아마 이런 질문을 받고 즉석에서 답을 내놓을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인가? 심청전을 빼놓고 나면 바다 인신공양을 말해주는 증거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기록은 물론이고 그와 비슷한 설화, 전설조차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이 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민속학자이자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관리과장인 김종대 박사를 불러 참고인 진술을 들어보자.

'심청전이 꽤 유명하기 때문에 바다 인신공양과 관련되는 우리 나라 이야기가 더러 있을 줄 알고 있으나 비슷한 사례를 아직까지 단 한 건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학계에서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심청전 말고 단 하나의 비슷한 사례조차 찾을 수 없다던 바다 인신공양 풍습이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고 있다.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필사본 기록이 신라 당대에 이런 풍습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다면, 만약 필사본이 정말로 김대문의 작품을 베낀 것이라면, 우리의 심청전 연구 혹은 바다 인신공양 연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필사본이 창작품이 아니라면 심청전은 그 원류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필사본 가짜론자는 이에 대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반박할 것이다.

'그거? 심청전 보고 베낀 거야'

바다 인신공양 이야기가 심청전에서 따온 창작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신라가 당 나라 황실에 여자를 바쳤다는 기록도 바로 앞서 살펴본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조에 나오는 유사 기록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해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심청전에서도 베끼고 「삼국사기」에서도 힌트를 얻었다 하자.

신라가 당나라 조정에 여자를 바칠 때 실제로는 신분이 미천한 여자를 왕실 여자라고 속이곤 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또한 「삼국사기」 성덕왕 조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에서 나온 고안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신공양 이야기가 심청전에서 베낀 게 아님은 「일본서기」를 뒤져보면 알 수 있다.

< 연합뉴스 기자 김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