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설계두 열전 첫 대목이다.

'설계두 역시 신라 귀한 가문 자손(衣冠子孫)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 뜻을 말했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원컨대 나는 서쪽 중국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런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면 만족하겠다' 그는 결국 소망대로 무덕(武德) 4년, 즉 진평왕 43년(621) 당나라에 잠입한 다음 마침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출정해 용감하게 싸우다 죽으니 황제가 그를 장군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아래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기록에 나타난 골품은 '골의 품계'이지 결코 '골과 두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 100년 동안 신라사 연구자들은 이 골품이라는 말이 '골과 두품'이라고 실로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저질렀다. 이런 엉터리 해독을 근거로 그들은 신라 신분제가 곧 골품제라는 허상을 구축해 냈다.

그렇다면 설계두전에 나오는 골품이 '골의 품계'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기록 첫 대목은 설계두를 분명 '의관자손'(衣冠子孫)이라 하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삼국사기」 색복조에 기록된 신라 신분계층 중 평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그가 '의관자손'이기는 해도 진골이 아니었음도 분명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골은 신라 관위 17등급 중에서 모든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따라서 설계두가 진골 신분이라면 골품을 따져 그 족속들만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설계두는 적어도 6두품 이하의 어떤 신분이었음이 명백하다.(두품 중에서도 많은 이가 지적했듯이 6두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골품이 학계가 주장하듯 정말로 골 신분과 두품 신분을 합친 것이라면 설계두 자신은 이미 이러한 골품이라는 제도 안에 편입돼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두품 신분인 설계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이런 골품 체제를 뛰어넘고자 한 아주 희한한 인물이 된다.

물론 이러한 억지 해석도 가능하기는 하다. 문제는 그렇다면 설계두는 자신이 포함된 골품을 타파하고자 한 인물이 되므로 그는 우리 역사상 진정한 첫 신분해방론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6두품으로서 기껏 관위가 올라봐야 제6위 아찬을 뛰어넘을 수 없는 설계두에게 불만이었던 것은 성골과 진골이 고위 관위.관직을 독점하는 신라사회의 차별제도였지, 전적인 신분해방을 부르짖은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골품이 결코 두품까지 포함한 신라 여러 신분계층이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는 위에서 인용한 설계두의 말 안에 이미 들어 있다. 다시 한 번 보자. 설계두는 분명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족속'(원문에는 기족< 其族 >이라 돼 있다)이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그 족속은 말할 것도 없이 골품의 족속, 곧 골품에 속하는 족속이다. 한데 설계두는 이런 족속이 좋은 자리를 독점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계두의 말을 통해 우리는 '골품=그 족속=고위관직 독점 계층'이라는 등식을 도출해 낸다.

이것이야말로 골품이 골의 품계, 다시 말해 성골 혹은 진골이라는 품계라는 뜻 아니고 무엇이랴? 따라서 설계두가 말한 골품은 성골과 진골이라는 '골의 품계'였던 것이며 그는 이러한 골 품계에 속하는가 않는가를 따지는 신라사회를 경멸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위 설계두전에 나오는 골품이라는 말이 비로소 온전하게 풀린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 연합뉴스 기자 김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