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은 이름이 김경신(金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 12세손이라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는 선덕왕(宣德王.재위 780-785년)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58-780년) 말년인 서기 780년 2-4월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진압했다. 반란의 와중에 혜공왕이 시해당하고 상대등 김양상이 즉위해 선덕왕이 되자 김경신은 후임 상대등에 취임한다.

선덕왕은 재위 6년째인 서기 785년 정월 13일 '과인이 죽은 뒤에는 불교 법식에 따라 [시신을] 불태우고 뼈를 동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이렇게 해서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 반란을 진압했고 선덕왕 재위기간 내내 상대등으로 있었던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원성왕이었다.

원성왕은 즉위 다음달인 2월에 아버지를 비롯한 자기 조상을 대왕으로 추존했다. 이 대목 「삼국사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조부 대아찬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할아버지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죽은 아버지 일길찬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각각 추봉했다'

한데 자기 조상계보를 신성하게 꾸미는 원성왕의 손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위 「삼국사기」에 바로 이어지는 구절이다.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삼고 아들 인겸(仁謙)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써 5묘(五廟)를 삼았다'

여기서 시조대왕은 논란이 있기는 하나 김씨로서 처음 왕이 된 미추왕일 가능성이 크며 태종대왕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다. 원성왕은 김춘추에게서 갈라져 나온 후예임에 틀림없다. 한데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사당은 헐어버렸다고 했다.

성덕왕(聖德王)은 신라 제33대 왕(재위 702-737년)이다. 개성대왕은 누구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선덕왕 김양상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의 기록이다.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양상(良相)이다. 내물왕 10세손인데 아버지는 해찬(=파진찬) 효방(孝芳)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으로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 양품(良品)의 딸이다. 아버지를 개성대왕(開成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追尊)했으며 처를 왕비로 삼았다'

개성대왕은 선덕왕 김양상의 아버지인 해찬 김효방이었다.

어떻든 원성왕이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사당을 헐어버리고 자기 조상의 사당으로 대체했다 함은 원성왕이 선덕왕과는 혈연관계가 없거나 아주 멀다는 증거가 된다. 더구나 원성왕은 선덕왕이 죽자 그의 비를 궁에서 내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골치아픈 문제에 봉착한다.

원성왕이 철저히 그 흔적을 말살하고자 한 선덕왕 김양상은 도대체 누구인가? 또 원성왕 김경신과는 어떤 관계인가? 김양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각종 학설이 난무하고 있다. 김양상은 신라 하대 최대의 미스터리 인물인 것이다.

그를 둘러싼 의문은 왜 증폭되고 있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기존 기록에서 이미 계보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원성왕 즉위년 기록을 보면 원성왕을 선덕왕의 동생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분명 같은 「삼국사기」 다른 기록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선덕왕(김양상) 즉위년 기록을 보면 김양상은 내물왕 10세손이라 하고 있는 반면 원성왕 즉위년 기록에는 왕(=김경신)이 내물왕 12세손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이 정확하다면 원성왕은 선덕왕의 손자뻘이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의 다른 곳(원성왕 즉위년 조)에서는 원성왕이 선덕왕의 동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양상의 계보는 종잡을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성왕이 즉위와 동시에 선덕왕의 할아버지 사당을 허물어버린 것으로 보아 원성과 선덕이 형제라는 기록은 신뢰성이 현격히 떨어진다.

어떻든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라면 김양상의 계보는 멀게는 내물왕에게 닿고 가깝게는 아버지가 파진찬을 역임한 효방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자세한 계보는 알 수 없을까?「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조에 나오는 기록이다.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亮相=良相)이다. 아버지는 효방(孝方) 해간(海干=해찬=파진찬)이니 개성대왕(開成大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원훈(元訓) 각간의 아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할아버지가 원훈이라는 사실이 추가돼 있다. 원훈은 「삼국사기」에서 두 번 확인된다. 신라 33대 성덕왕 원년(712) 9월 조를 보면 '아 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다'고 하고 있으며 같은 왕 이듬해 가을 7월 조에는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러나므로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

그가 물러났을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상대등이나 중시 같은 신라의 최고위직 벼슬아치는 대체로 70세에 물러나거나 물러나고자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70세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훈은 누구인가? 기존 기록으로는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필사본은 사정이 다르다. 19대 풍월주 김흠순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와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는데 보단이 낳았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였는데 이단(利丹)이 낳았다'

원수나 원선은 「삼국사기」에서도 언급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이들 원(元)자 돌림 인물들이 누구의 자손인지 언급이 없다. 이들이 김흠순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오직 필사본 뿐이다.

어떻든 선덕왕 김양상은 할아버지가 김원훈이며 필사본을 참조할 때는 김흠순이 증조임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흠순은 누구인가?

필사본에서 삼한의 대영걸로 묘사한 김유신의 친동생으로 19대 풍월주다. 김유신-김흠순 형제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왕족 직계 후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신라 하대 최대의 미스터리로 학계에서 꼽고 있는 김양상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의문점이 한꺼번에 풀리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선덕왕 김양상은 「삼국사기」 기록처럼 내물왕 10세손이 아니라 금관가야 왕족의 직계 후손이었던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왕위를 독점하는 정통 신라 김씨와는 계보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피가 달랐기에 정통 신라 왕족의 후손인 원성왕은 정권을 잡자마자 선덕왕이 세운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사당을 헐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필사본이 진본일 경우 이제 신라사, 특히 하대사(下代史)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다. 김알지-미추왕-내물왕으로 연결되는 경주 김씨가 신라 왕위를 독점했다는 학설(이는 사실 학설이 아니라 상식이다) 또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 연합뉴스 기자 김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