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혈혈단신으로 80만 거란대군의 병영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簫遜寧)과의 역사적 담판으로 고구려 옛 영토인 강동6주를 되찾은 서희(徐熙.942∼998) 장군의 경기도 여주 묘소.


경기도 광주 곤지암을 지나 양평 경계 조금 못 미친 삼거리에서 '서희선생 묘소'라고 적힌 자그마한 푯말을 따라 증축중인 상품초등학교를 지나면 여주군 금사면 후리에 '서희장군 묘역'이란 푯말과 함께 재실(齋室)과 신도비(神道碑)가 나온다.

재실 앞쪽의 농로를 지나 가파른 전나무 오솔길을 5분 정도 올라가면 대림봉을 뒤로 한 양지바르고 탁 트인 곳에 이천서씨(利川徐氏) 대종회가 관리하는 경기도 기념물 36호 '서희장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묘소 앞에는 코가 뭉뚝하고 씩씩한 기상의 석상이 서있는데 묘역은 호화스럽게 단장한 여느 문중묘와 달리 소박하게 꾸며져 오히려 반갑다.

혈혈단신으로 80만 거란대군의 병영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簫遜寧)과의 역사적 담판으로 고구려 옛 영토인 강동6주를 되찾은 서희(徐熙.942∼998)를 우리는 장군이라 부른다.

그런데 고려초 무인중에 가장 높은 상장군이 정3품이고 장군은 정4품이며 서희가 무관 벼슬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면 장군이란 말은 후대에 잘못 쓰인 직함이 확실한 듯 싶다.

신도비도 종2품 이상 관원의 무덤이 있는 근처 큰길가에 세우는 석비(石碑)인 것을 보면 서희장군 묘역이란 푯말이 엉뚱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려사 서희열전을 보면 서희는 광종 11년 18세의 나이에 갑과(甲科.과거에서 성적순으로 첫째 등급)에 뽑혀 벼슬길에 오른다.

광종 9년에 후주(後周)에서 온 쌍기의 제안으로 과거가 처음 실시된 지 2년만이다.

서희는 31세(972년)에 내의시랑(內議侍郞.정4품)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52세(993년)에 내사시랑(內史侍郞.정2품)으로 승진한 뒤 거란의 침략으로 중군사(中軍使)로 임명됐으며, 이 때 소손녕과의 담판이 이뤄졌다.

정1품인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임금의 3번째 고문)까지 올랐고 죽은 지 35년이 지난 덕종 2년(1033년)엔 태사(太師.임금의 최고 고문)에 추증된 서희는 줄곧 문신이었던 것이다.

사극 '제국의 아침'에 등장하는 내의령(수상) 서필(徐弼.?∼965)이 서희의 부친이다.

내의령은 내사령과 이름만 다른 똑같은 기관이라 부자가 같은 벼슬자리를 한 셈이다.

서필은 광종이 몇몇 고관에게 금으로 만든 술그릇을 하사하자 '재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서 은총만 입고 있는 데 분이 넘치는 일입니다. 신이 금으로 만든 그릇을 쓰면 임금은 앞으로 무엇을 쓰시겠습니까'하며 홀로 마다했다.

광종은 이에 '경은 보물을 보물로 삼지 않으니 나는 경의 말을 보물로 삼을 것이다'고 답했다고 전한다.

서필은 광종의 묘에 배향(配享.종묘에 공신의 신주를 모시는 것)되었다.

서희 또한 부친을 닮아 절도 있고 강직한 문관이었다.

성종이 즉위 2년(983년)에 서희와 함께 서경(평양)에 행차했을 때 변장을 하고 함께 영명사에 놀러가자고 하자 서희는 군왕의 처신이 아님을 간했고 성종은 안장과 말을 상으로 내렸다.

성종 12년(993년) 거란이 쳐들어오자 어전회의에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성종은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식량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고 남은 것은 대동강에 버리라고 했다.

서희는 그러나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허점을 찾아내 움직이는데 있는 것이고 식량은 백성의 목숨과 같습니다. 땅을 떼어주는 것은 만세에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며 강력반대 의견을 냈다.

소손녕과의 담판 때도 당당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가 차지했는데 당신네가 조금씩 먹어들어왔고, 우리나라와 땅이 이어져 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오늘의 출병이 있다. 땅을 떼어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고 사신을 보내면 무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서희는 그러나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오. 그러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했고 평양에 도읍했소.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인데 여진이 훔쳐 살고 있소. 그들이 통로를 막아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 알현을 못하고 있소.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길이 통하면 어찌 사신을 보내지 않겠소'라고 했다.

고려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명분을 줘 회유하는 탁월한 외교력을 보인 것이다.

당시 대륙에서 어느 국가가 강국으로 등장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대외교를 자제하고 독자노선을 취한 고려(고려를 약소국이라 할 수 없지만)의 외교능력과 궤를 같이 한다.

이는 현대에서 열강에 인접해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국가가 취할 외교정책 원칙의 선구적인 사례로도 꼽힌다.

여담이지만 문관 집안인 서희의 현손 서공(徐恭)은 종1품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내며 다른 문관과 달리 무인들을 예우, 정중부의 난 때 중방(重房.대장군들이 군사를 논의하던 기관)이 병사 22명을 서공의 집에 보내 호위토록 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단아한 서희선생의 묘역을 돌아보면 호화판으로 조상의 묘를 치장해 오히려 조상을 욕보이는 누를 범하지 않은 서희 집안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