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조선시대 속리산으로 행차하던 세조가 개울에 발을 담그자 희게 됐다는 구전에서 유래된 충북 청원의 백족사. 절 규모는 작지만 후박나무와 목백일홍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샘물이 맑고 시원해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문화재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사물'을 뜻한다. 다시 말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민족 문화 유산을 의미한다.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들불처럼 번지던 18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파괴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문화적 환경 보존의 중요성이 지적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산업 발전에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로 문화유산 개념이 정립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문화재라는 말이 등장했고 우리가 살아온 삶을 비추는 거울이자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연결 고리로 문화재를 이해하게 됐다.

내세울만한 지정 문화재가 없는 태고종 소속 사찰인 청원군 가덕면 상야리 백족사(白足寺)를 답사키로 한 것은 이러한 문화재적 관점에서 조계종 일색의 사찰 답사에서 벗어나 봄으로써 다양한 사찰 문화를 접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백족사라는 재미스러운 이름도 이 절을 찾아 나서게 한 이유가 됐다.

청주-상주간 도로를 달리다 대청호로 가는 갈래 길이 난 고은 삼거리를 지나 10여분을 더 시원스럽게 새로 뚫린 6차로로 달리다 보면 좌측으로 충북도 공무원교육원 입구가 보인다.

얕은 개울처럼 돼 버린 하천을 넘어 공무원 교육원 입구로 향하다 우측으로 들어서면 만만할 듯 험난할 듯 좀체 감 잡기가 어려운 등산로가 보이는데 백족사로 향하는 길이다.

시멘트 포장이 돼 있어 힘 좋은 4륜구동차라면 절 입구까지 갈 수 있게 돼 있고 길목마다 청원군에서 설치해 놓은 체력단련 시설들이 있어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싶었다.

도리질하듯 가파르게 난 산책로를 500여ｍ 오르면 해발 400여ｍ쯤 될 듯 싶은 산 중턱에 백여평 안팎의 공터가 나오고 늠름한 토종 소나무가 절 입구를 지키고 있고 후박나무, 느티나무, 백일홍 등이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면서 옹기종기 절 앞 터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정면 3간, 측면 2간의 조촐한 대웅전을 지켜주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 졸졸 흘러나오는 맑은 샘물은 보기만 해도 달고 시원해 보여 괜히 바가지에 손이 가게 된다.

이 절은 1930년 복건된 것으로만 알려졌을뿐 정확한 불사의 내력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본래 심진암(尋眞庵)이라는 암자였다가 산 이름을 따 백족사가 됐다는 것인데 백족산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재미있다.

보은 속리산의 정이품송이 세조의 행차 때 "연 걸린다"며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려 정이품이라는 고위직(?)에 올랐던 그 시절, 속리산으로 향하던 세조가 잠시 쉬면서 냇가에 발을 담갔더니 발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는 절 입구의 개울 덕에 산 이름이 `백족산'으로 명명됐다는 것이다.

백족사는 그러니까 세조 행차의 인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일각에서는 지형이 음습하다는 이유로 백족산을 `백족산(百足山)'으로 해석, 지네와 어떤 인연이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어쨌든 자그마한 대웅전에 들어서 보니 여느 절과는 달리 석불좌상이 온통 백색으로 칠해진 것이 이채롭다.

백족사라는 이름에 맞는 불상의 형태가 필요했기 때문일 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석불좌상을 떠받치고 있는 좌대였다.

연꽃이 위로 피어 오르는 문양이 선명한 직경 80㎝ 크기의 상.하 좌대를 잘록하게 들어간 중간 좌대가 연결하는 형태로 마치 아령을 세워놓은 모습인데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 좌대는 대웅전 앞의 높이 2ｍ 규모의 아담한 3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 전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탑은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탑신형의 중대석과 갑석으로 이뤄졌으며 뭉툭한 것이 고려시대 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유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점으로 미뤄 이 절의 내력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백족사'라는 지명도 때문인 듯 작은 절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 절은 오래 전부터 이 지역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현재 청원의 대표적 한학자로 알려진 양촌 송해석씨가 썼다는 `대웅전'과 `백족사' 현판이 힘 있는 글씨체를 자랑하며 걸려 있다.

또 요사체 건물 벽에는 1945년 작고한 청원 낭성출신 한학자 윤영교가 백족사를 찾은 감흥을 노래한 `遊 白足寺(백족사에서 놀다)'라는 한시가 내 걸려 있어 이 절에 대한 이 지역 주민들의 애정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녁의 스산한 바람 소리며 바람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사각거리며 뒹구는 낙엽 소리, 대웅전 처마 끝에서 뎅그렁거리는 풍경소리가 조용한 산중의 정적을 깨며 꽤 공들인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조화롭게 들여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산사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인적 드문 계절에 찾아야 한다는 말이 맞구나 싶었다.

현란하지도, 내세울 것도 없고 규모도 작아 소박하기만 한 데도 지역 주민들의 애정을 흠씬 받고 있는 백족사의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