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MR뉴스 무기체계 컨텐츠 신제품 유료존 MR기네스 KNIVES 특수부대 軍뉴스 프리존
백제말 익산 천도설 ③ 미륵사지

전북 익산의 주산(主山)인 미륵산(해발 430m)을 배경으로 국가사적 150호 미륵사지가 펼쳐져 있다.

백제 30대 무왕(武王 600-641년)이 창건해 천년가까이 내려오다 17세기 경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목조탑의 양식을 이어받은 국내 최고, 최대의 석탑인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도 이 절터에 있다.

또 3개의 사찰을 한 곳에 세운 삼원병립식(三院竝立式) 가람 배치는 우리나라의 다른 절터나 중국, 일본에도 유례가 없는 특이한 형태다.

이 절터는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동탑지 발굴(74-75년)과 문화재연구소의 종합발굴조사(80-95년)로 그 전체적인 규모가 밝혀졌으며 2만여점의 유물이 수습돼 규모의 웅장함과 더불어 화려한 치장을 엿보게 했다.

학계는 이 절이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사찰이며 백제가 망할 때까지 국가 기원사찰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 대규모 사찰이 어떤 연유로 이곳 익산에 자리잡았을까?

삼국유사(三國遺史) 무왕조(武王條)는 미륵사의 창건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무왕이 선화비와 함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거주하는 사자사(師子寺)로 가다 용화산(龍華山=지금의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 나타나기에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를 허락하였다."

백제의 `익산 천도설'은 미륵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마백연구소 연구원을 비롯한 백제사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했으며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 꽃을 피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백제 무왕은 이를 옛 마한의 중심지인 익산지역의 용신앙(龍信仰)과 연결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익산을 택한 것은 당시 8대성(八大姓)으로 알려진 백제의 귀족세력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비(泗 水변에比.지금의 부여)에서는 미륵신앙을 펴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점도 작용했다.

미륵사의 창건은 다른 한편으로는 미륵경전에 나오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위엄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무왕의 통치이념이 배어있다.

전륜성왕은 미륵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미륵을 맞이하러 갔다는 국왕이다.

무왕이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났다는 미륵사 창건설화의 내용과 궤를 같이 한다.

미륵을 모시는 전륜성왕은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아도 모든 적들이 스스로 복속한다.

무왕은 미륵사 건립을 통해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격상시켜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왕으로 군림하려 했던 것이다.

익산시 문화재 전문위원 이신효씨는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백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고 정신적 단결을 꾀하고자 미륵사를 창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출처 : 연합뉴스 >

2003-05-28 14:21:41

덧글쓰기

협력기관 및 업체 : 대한민국 공군 - 대한민국 해군 - 국방일보 - 국정브리핑 - Defense LINK - 군사저널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제2000-1호에 따른 안내, 사업자 등록번호 : 220-86-07275
(주)아이엠알코리아, 대표이사 주재은, 전화 (02) 578-8278 (■ 잡지 취급하지 않습니다. 문의사절합니다.), 통신판매업 허가 : 서초 제 3300호
광고문의 - 개인정보 취급방침 - MR 이용자 약관 - 회원관련문의 - 탈퇴신청
Copyright ⓒ 1998-2017 (주) iMR C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