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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 (1)

우세한 대포·자동발사화기로 초반 열세 뒤집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성시대라고도 불러도 될 만큼 한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충무공을 소재로 한 소설을 감동 깊게 읽었다고 밝혔는가 하면, 현직 부장판사는 충무공에 관한 평전을 내놓았고 급기야 KBS-TV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방영키로 했다.

성웅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이순신은 분명 '국난 극복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갖추지 못한 채 애국주의를 고취할 목적으로 그의 삶과 업적이 이용되기도 하여 오히려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순신과 조선 해군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영웅순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 자체를 바탕으로 이순신과 임진왜란의 실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되어 왔다.

이순신 장군의 재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는 연구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면모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그를 둘러싼 각종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역사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정설로 굳어진 이순신 일대기가 조선 왕조 시대에는 정조에 의해서,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주도된 국가 사업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순신 장군 연구에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인 『이충무공 전서』는 탕평책을 한창 펼치던 정조의 어명에 의해 1795년에 편찬되었다. 또 이순신 장군에 관련된 유물 유적이 정리되는 등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대통령의 제3공화국 시대였다.

물론 기존 정설을 신봉하는 연구가들은 새 조류가 등장하는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선조실록』등 몇몇 문헌의 사료적 가치에 의한 임진왜란에 대한 재평가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문헌 역시 당쟁의 또 다른 산물이기도 하므로 이들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발맞추어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도 새로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조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이 고전했지만 대형 화기, 즉 대포나 자동발사화기에서는 일본보다 월등하게 우세했기 때문에 전세를 뒤집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왜군이 철수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도 왜군은 곧바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추정한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은 초기에는 조선이 불리했지만 왜군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선이 임진왜란의 승리자라는 것이다.




[사진설명] 이순신 장군 청동상(전쟁기념관).


임진왜란의 성격이 이와 같이 재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 수군의 역할이 큰 작용을 했다. 조선수군은 원균 장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기적을 이뤄냈다. 더구나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함선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므로 막상 명량해전에 즈음하여 이순신 장군이 지휘할 수 있는 배는 고작 13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133척에 달하는 왜수군을 대파하여 세계 해전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파싸움이나 일삼던 조선 수군이 어떻게 연전연승하면서 왜수군을 격파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인 우리나라 조선(造船) 역사와 기술,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한 함선과 화포, 거북선의 전설과 거북선을 과연 찾을 수 있는가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 나침반의 발명자는 중국이 아닌 신라

삼 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배의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은 유물로도 알 수 있다. 선조들이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물에 뜰 수 있는 나무토막, 조롱박, 갈대나 가죽주머니 등을 이용하여 강이나 바다 속으로 들어가 어로 작업을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수상 생활에 따른 경험이 축적되자,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낸 통나무배가 이용되었다가 나무널판이나 통나무 등을 조립한 조립선(뗏목 등)들로 발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짐을 싣고 빨리 달릴 수 있으며 안전한 배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저었고 좀 더 발전하여 돛을 이용하는 배가 등장하며 점차 조선 기술이 발전하여 현대와 같은 대형 선박으로 이어진다.

지탑리 유적과 마산리 유적을 비롯한 강가에 있는 유적들에서 그물추가 발견되었고 서포항에서는 그물추, 작살, 낚시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포항 4기층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의 술부분은 등쪽이 좁고 끝 쪽이 넓은데(길이 31센티미터, 두께 1.5센티미터, 끝 쪽의 넓이가 13센티미터), 고래뼈로 노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무보다 고래뼈가 견고하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바다에 살고 있는 커다란 고래뼈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울산군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에 있는 바위그림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벽화에는 물고기, 고래, 호랑이 등 짐승은 물론 사람들이 타고 고래를 잡는 배도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이 선박을 이용했다는 기록은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뱃길로 마한에 갔다는 기사에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과 마한에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구가 있었고 수천 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배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배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에도 이미 육군과 수군이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33∼234년,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하면서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나라의 조조를 견제하고 공손연을 공격하자고 보낸 사신 사굉과 진구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안평구라는 항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607년에 고구려군이 바닷길을 이용하여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아산만 남쪽 당진군 한진리로 추정)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고구려 수군이 해안을 따라 수천 리를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편 백제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 중국과 일본의 왕래는 주로 바다를 통했으므로 조선과 항해기술이 발달했다. 일본과의 왕래로 조선기술도 전달되어 『일본서기』에는 271년 백제사람의 후손이 일본에서 선장으로 일했고 백제의 선박에 의해 기술자와 학자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있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규모가 크고 든든한 배를 ‘백제배’라고 불렀다.

신라에서도 289년에 왜적이 침공한다는 통보를 받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했으며 467년 봄에 관원을 시켜 전함을 수리했고 583년에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했다는 것을 볼 때 조선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먼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박도 중요하지만 항해기술 즉 배가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나침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나침반(羅針盤)의 사용에 있어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년) 정월조에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간 사실이 쓰여 있고 5월에는 급찬 지진산 등을 통해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3대 발명품(나침반, 종이, 화약) 중에 하나가 나침반인데 중국의 나침반은 송나라 때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료를 보더라도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는 신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나침반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침반의 원래 이름이 신라침반(新羅針盤)인데 ‘신’자가 빠진 나침반으로 읽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나침반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가 등장한 이듬해이지만 통일신라 전에 나침반이 사용되었음이 틀림없으며 어느 나라보다 나침반을 사용했다면 당시 항해술도 매우 앞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일본 원정에서도 파선되지 않은 고려 군선



[사진설명] 고려의 군선. 고려 몽골의 연합군이 일본 원정할 때 사용한 고려의 군선으로 추정되는데 함포를 장착하는데 용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배가 세계 조선사(造船史)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선형과 구조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배는 그 선종과 연대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구조 방식 즉 두껍고 평탄한 저판을 밑에 깔고 외판을 붙이고 가룡목을 설치한 방식으로 건조되어 있다. 다른 나라 배들은 용골이라는 배의 등뼈를 기준으로 판자를 붙여 배의 아래가 역삼각형으로 좁혀지지만 우리나라 배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통 모양이다. 이와 같은 선형과 구조를 평저선구조(平底船構造)라고 하는데 김재근 박사는 이런 구조를 가진 배를 통털어 ‘한선(韓船)’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와는 다른 독특한 조선 기술이 태어난 것은 삼 면이 바다로 둘려 싸여 있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해안선이 길고 갯벌이 많은 서남해안에 출입하는데 적합한 구조이다. 썰물 때 배를 갯벌 위에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으며 항구가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삼국시대의 배들의 원형이 발견되지 않아 구조와 규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당시에도 한선(韓船)의 기본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증거들은 발견된다.

신라의 유물로 보이는 배모양의 꽃 단지와 가야 고분에서 발굴된 배 모양의 질그릇(사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나른다는 뜻의 장례의식용 도구로 추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배 모양의 꽃단지로 유추할 경우 후미부분의 모양은 전투할 때 적선에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로 인정되며 선수부분의 용골선이 점차 위로 올라간 것은 배의 구조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해상 전투시 병사들이 적선에 올라가는 종경사를 작게 하여 전투를 용이하게 할 목적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형태의 배는 유럽에서 14∼15세기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동시대에서 한국의 조선기술이 얼마나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설명] 가야시대 주형토기. 사자의 영혼을 저 세상에 운반하는 배로 추정한다(호암미술관).


고려 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히 벌어지자 조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시대의 배들은 전투용 군함과 무역 및 대외 활동을 위한 무역선과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뉘었다. 조운선은 각지에서 공물로 받아들인 조세미와 진상품을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데 사용하던 배로 초마선의 경우 한강 유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배는 적재량을 200섬으로 제한했지만 원래의 초마선의 적재량은 1000섬이나 되는 큰 배이다.

전투용 군함으로 대표적인 것은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이다.

『고려사』에 914년에 ‘태조가 전함 100여 척을 더 건조했는데 그중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이며 그 위에 다락을 세웠고 말을 달릴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방이 16보(1보는 6자)라는 것은 배의 길이가 약 36.6미터나 되며 말이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 넓은 갑판을 가지고 있는 배임을 알 수 있다. 이 규모로 배를 만들면 250여 명의 학생들이 줄을 서면 윤곽선을 채울 수 있다.

과선이란 말 그대로 적선을 찔러 물리칠 수 있는 고려 특유의 군함으로 11세기초부터 약 100년 동안 함경도 지방 여진의 침입을 방비하면서 사용한 중요한 전투선의 하나였다.

이 당시 여진(동여진)의 해적들은 동해안 각지에 자주 침범하여 현종 2년(1011) 8월에는 100여 척이 떼지어 경주에 침입한 적도 있을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고려는 해군기지사령부라 할 수 있는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를 각 지에 두어 대치했는데 이때 동북 방면에 배치된 군선이 바로 과선이다.

고려 군선의 우수성은 1268년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원정할 때 증명된다. 『원사』에 원나라의 왕운이 해전에서의 실패에 대해 “태풍을 만나 파도 때문에 서로 부딪쳐 크고 작은 많은 우리 함선들은 파괴되었으나 오직 고려의 군함만은 견고하여 정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원의 세조가 일본에 원정할 대함(大艦) 300척을 포함한 군용선 900척을 요청하자 고려의 김방경은 배를 중국식으로 만든다면 노동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기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설계도면으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관철시켰다.

김재근 박사는 이 당시 고려의 배들은 한선의 구조법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당시 원은 군량미 3000∼4000섬을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요구했는데 군량미가 3000∼4000섬 정도라면 현재의 단위로 약 250∼320톤이 되므로 이 배의 배수량은 400∼500톤이 된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이들 배를 단 4개월에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고려의 조선 기술이 얼마나 앞선지를 알 수 있다.

고려 배의 크기는 여 몽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나가사키현 다카시다에서 발견된 700년 전의 침몰선 유물로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배는 바다 속에서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1994년에 소나무 닻이 인양되었다. 이 당시 인양된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닻에는 두 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닻돌이라고 불리는 길이 2미터 가량의 이 돌은 닻의 한 가운데 박았는데 두 개 돌의 무게는 무려 338킬로그램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닻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적색 응회암으로 이 돌의 성분은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의 돌과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배는 천관산의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다. 인양된 닻을 복원하니 그 길이가 무려 7미터에 이른다. 학자들은 두 개의 닻돌과 닻의 무게를 합하면 약 1톤 가량으로 이를 근거로 배의 길이를 추정하면 30∼40미터가 된다고 계산했다.

한편 이원식은 고려 대선의 크기를 25∼30미터로 추정했다. 이같은 규모는 고려의 군선이 대단히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현재 서해와 남해의 풍파의 파장을 40∼50미터, 파고를 2미터 정도로 감안할 때 안전한 선박의 길이는 적어도 25∼30미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대선의 크기로 볼 때 전투병 60명, 선원 30∼40명을 포함하여 모두 90∼100명 정도가 승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완도선 발견

1983년 말,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지섬에서 불과 72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서 청자 4점이 조개잡이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감정결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본격적인 인양작업에 들어갔다. 3개월 간 계속된 인양 작업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12세기 전반 고려 중엽의 일반적인 청자로 녹청자 30648점였다. 가마터를 제외하고 이렇게 많은 청자가 한꺼번에 나온 건 처음이다.


[사진설명] 발굴된 완도선 선체(전면)와 복원된 모습(뒷쪽).


발굴에 참여한 학자들도 처음에는 배가 수장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유물들이 한 군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잠수요원들을 통해 조사를 시작한 결과 뻘을 걷어내자 배의 모습이 드러났고 81개의 조각으로 떼어내어 인양했다.

이 배의 발견은 사학계를 흥분시켰다. 그동안 고려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다고 전해지기는 했지만 당시의 선박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 증인을 드디어 찾아냈기 때문이다. 인양된 유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용골이 없고 바닥이 평평하다
② 가룡목으로 좌 우현을 고정시켰다
③ 흠불이로 외판을 접합했다
④ 전통 한선의 해충구제법인 연훈법(煙燻法)으로 목재를 그을렸다. 근세까지도 활용된 이 방법은 배가 썩지 않도록 배의 바깥 면을 정기적으로 불에 그을리는 것으로 완도 배에서는 두께 1밀리미터의 새까만 층이 발견되었다.
⑤ 돛대가 하나인 단주범선이다
⑥ 사용된 재료는 한국산 육송 등이며 나무못이 사용됐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성한 인양선은 길이 9미터, 너비 3.5미터, 깊이 1.7미터의 나무배로 무게는 약 10톤이다. 그러나 학자들로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완도선이 그동안 계속 추정되어 온 우리 한선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선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쇠못 대신 나무못을 사용했다는 점인데 완도선에서 느티나무 못을 사용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쇠못은 염분이 있으면 쉽게 부식되며 철이 부식할 때 나무도 함께 부식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선조들은 나무못을 사용했다고 알려졌었는데 그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장학근 박사는 배가 물에 들어가면 밖에 있는 선재가 불어 나무못은 오히려 강도가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 동양에서 최초로 충파 전술 채택

옛날 수군이 해전을 하는 데는 세 가지 전술이 있었다.

하나는 선수 수면 하에 뾰족한 衝角(ram)을 달고 적선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충파 전술이다. 이 전술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사용된 전법으로 19세기 초엽 트라팔가 해전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됐다.

그런데 김양기 박사는 ‘고려 군선의 선체는 고대(高大)하고 선면(船面)은 철조각령(鐵造角令)으로서 적선을 충파(衝破)하게 되었다’라는 글을 근거로 이 군선이 과선이고 선수에 철각(鐵角)을 붙어 적선을 충파하였다고 보았다.

배머리에 달린 철각(鐵角)은 상대측 함선에 배를 맞대고 적선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배에 접근하여 배머리의 철각(鐵角)으로 적선의 흘수선 아래를 받아 침수되도록 치명상을 입힌 후 적과 싸우는 독특한 전법을 적용할 때 효과적이므로 철각이 배의 윗부분에 있으면 적의 배를 부수기 어렵기 때문에 배의 아래쪽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자들은 커다란 통나무를 대고 그 앞에 철로 쇠를 덧씌워 뿔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전술은 동양에서는 고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거북선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배를 박치기로 부수는 것인데 다소 무지막지한 수법 같지만 당시 여건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공격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이어 임진왜란 당시의 한선이 왜 그렇게 강했는지를 살펴보자.




[사진설명]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살라미스 전투 장면. 살라미스 지리에 익숙했던 그리스 함대는 후퇴를 가장해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살라미스 해엽으로 유인했다. 그리스군은 3단 노 전함의 충각으로 페르시아 전함들을 전속력으로 들이받는 전술로 승리를 거뒀다.


박치기용으로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한선은 강도를 높이기 위해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소나무로 만들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배의 겉판을 만드는 침엽수 중에서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또 한선은 척추에 해당하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므로 강도를 보강하기 위해 두꺼운 판자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모두 소나무로 만든 것은 아니다.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보다 강한 나무로 보강했다. 박상진 교수는 주로 참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등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전투배의 선미는 진목(眞木) 즉 참나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참나무는 1제곱센티미터에 500킬로그램의 압축 강도를 견딜 만큼 단단하고 질기다. 또 다른 참나무 종류인 가시나무(상록수 참나무 무리 중 따뜻한 남해안 및 섬 지방에서 자람)는 더 단단한 나무이다.

반면에 일본의 산에는 소나무가 드물고 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자란다. 이들은 곧고 빨리 자라는 잇점은 있으나 무르고 약하다. 이런 나무로 아무리 배를 크게 만든다해도 한선의 소나무 배와 박치기했을 때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구나 왜선은 전투선 자체도 한선보다 작았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칠천량 전투(1597)를 묘사한 일본인들의 기록에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 배는 우리 배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그래서 조선 배에 바짝 달라붙어도, 자루의 길이가 두 칸이나 되는 창으로 미치지 못하니 배에 뛰어드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한선은 왜선에 비해 배의 규모도 큰데다가 튼튼하였으므로 군함과의 싸움은 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꼭 정면 박치기가 아니고 측면 박치기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선을 만들 때 배의 너비 방향을 고정하고 가룡목이라는 가로 버팀목을 썼는데, 이 역시 참나무와 가시나무였다. 근본적으로 한선은 재료부터 왜선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왜선이 배가 맥을 못 춘 것이다.

둘째는 적선에 접근하여 기어올라 백병전으로 적선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보어딩(boarding) 전술이다. 이는 육전과 백병전에 능한 나라가 좋아하는 전술로 로마가 이 방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제압했으며 유명한 해적들이 약탈할 때 사용하는 것도 주로 이 전법이다.

고려 말의 왜구와 임진왜란 때 왜수군이 채택한 기본전술이지만 이 전술의 문제점은 일단 적함 안으로 침투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왜군이나 여진의 해적들은 백병전에 능숙하므로 재빠르게 적선에 다가가 배에 기어올라가는 육박전에 치중했지만 한국은 아예 적들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는 배를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고려의 과선과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과 거북선 등으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왜군의 배에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고 왜군 스스로가 실토했을 정도이다.

마지막으로는 적진에 접근하되 밀착하지 않고 화포나 화전 등 장거리 무기를 발사하여 적선을 분멸(焚滅)시키는 전법이다. 이 전술이야말로 한국 수군의 장기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무장하고 있는 화약무기는 왜보다 월등하게 성능이 우수했다. 간단하게 말해 화포의 사정거리도 길고 명중률도 높았으므로 조선 수군의 입맛에 맞게 먼 거리에서 집중적으로 화포 등을 발사하여 적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 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1-05 17: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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