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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 (3)

판옥선 주축 조선수군 화력 왜선에 비해 월등

■ 이순신 장군의 대첩

학자들은 최무선이 화약무기가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이성계가 최무선의 함대가 진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패잔병들을 운봉 황산에서 궤멸시키지 않았다면 고려인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최무선이 해전에서 왜구의 선박들을 철저하게 격파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왜구를 격퇴하기는커녕 패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무선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울 때도 생존했으나 연로하여 더 이상 군기제조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래도 태조는 전조(前朝)의 공을 참작하여 검교참찬(檢校參贊)을 제수했다. 최무선이 태조 4년(1395) 4월에 세상을 떠나자 왕은 부의(賻儀)를 후사했으며 태종 원년에 의정부우정승영성부원군(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을 추증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가장 우려한 것은 신왕조를 겨냥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사병을 갖고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으므로 이성계는 이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는데 총력을 경주했고 결국 성공한다.(국사교과서에서 이를 ‘왕권강화’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가 초기에 가장 중요시한 것은 국방이었다. 조선은 국가를 세우자마자 육군과 구별된 새로운 병종(兵種)으로 수군 제도를 확립했다. 이것은 고려말 수군이 왜구를 대비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인정받으면서 육군과 다른 독립된 편제와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판옥선 모형.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단단했으며 갑판에 6문의 포를 설치해 왜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국립진주박물관).


조선 왕 중에서 가장 국방에 힘을 쓴 사람 중에 한 명이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 초부터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군 체제도 함께 정비했다. 그의 재위 중에 수군의 군선 보유 척수는 무려 613척이나 되었다. 또한 세종에게 왕위를 이양한 후 상왕이 되자마자 소강 상태였던 왜구들이 다시 준동하자 태종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의 직접 정벌을 단행했다. 유명한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227척의 군선과 17,285명의 정벌군을 동원)에 의해 대마도에 정박해 있던 전선들이 파괴되자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정식 교역을 허가받고 노략질을 영원히 단념한다.

그럼에도 세종은 차후에 있을지도 모를 왜구의 준동에 대비하여 군선을 800여척으로 증가시켰고 수군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당시 조선군 전체의 병력이 11만 명에 달했는데 수군 병력이 무려 5만여 명으로 당시 단일 병종으로는 수군이 가장 많았다. 더불어 화기의 개발과 성능 개선을 추구했는데 이 부분은 전 회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한다.

조선 왕조 초기 왕들은 왕권수호를 위해 국방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군을 대폭 확대하고 화기의 개발과 발전에 주력했으나 세조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상황이 바뀐다. 세조는 즉위하는 과정에서 단종을 폐하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 두 동복형제를 사사하는 등 등극 과정상에서 하자가 있으므로 누군가가 쿠데타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당연히 자신에게 대항할 세력은 군인이라고 판단하고 군사력의 억제를 기본 방향으로 삼았고 세종대에 신설되었던 사포국과 총통위 등을 혁파했다.

물론 세조 당시를 비롯하여 후대의 왕들도 때때로 군사력을 증강하는 조치 등을 취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에는 조선군의 전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막상 발발했을 때 조선과 왜군과의 전투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조는 신의주로 도망갔고 조선군은 지리멸렬하여 단숨에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저력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로부터의 구원군이 있었지만 많은 학자들은 명나라 군의 조선 원조가 군사적인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조선은 한국인이 스스로 지켜야 했고 스스로 지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진설명] 거북선과 판옥선의 비교 단면도. 단면도를 비교해보면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사에 대해서는 각설하고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이 중에서 충무공이 지휘한 수군의 활약은 그야말로 발군으로 학자들은 수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의 종결이 어떻게 됐을지 가늠할 수 없다고 단언해서 말한다. 충무공이 활약한 해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25일 후 1592년 5월 8일에 있었던 옥포해전에서 적 선단을 포착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떄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포작선(어선) 46척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포작선과 협선은 전투함으로 볼 수 없으므로 실제 전투시에는 판옥선이 주력이었다. 그런데 적선을 26척이나 격침시켰는데도 아군은 단 한사람의 부상병도 없었고 이후 18척을 추가로 또 격침시킨다.

5월29일 제2차 출동에는 거북선 3척을 포함하여 23척의 전선이 출동하여 사천포에서 판옥선 크기의 왜의 층루선 12척과 성을 쌓고 있던 왜군 400명을 격멸시키고 다시 당포에서 층루선 9척, 중소선 12척을 모두 격침시켰으며 이억기 수사와 합세하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적선 72척을 격침시켰다. 이때 전사자가 12명이었고 부상자가 34명뿐이었다. 3차 견내량(한산도) 해전에서 층루선 35척, 중간배 17척 작은 배 7척 등 총 53척을 격침시켰음에도 조선 측은 사망자 19명, 부상자 118명이었고 침몰한 배는 한 척도 없다. 반면에 일본측의 임진왜란 전사에 의하면 견내량에서 약 1000명, 안골포에서 25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조선 수군의 주력함은 판옥선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은 잘 알려진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7년 전인 명종 10년(1555)에 만들어진 전투함이다. 조선 초기 조선의 군선은 맹선제였다. 전투인원 80명, 60명, 3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왜선에 비해 선체가 컸으나 속력이 느린 단점을 갖고 있었다.




[사진설명] 임진왜란 당시의 왜선.


당시 우리나라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선은 조선의 군선에 비해 선체가 작고 날렵해 우리 군선이 왜구선을 추격할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은 왜구선을 추격하기 위해 소형 경쾌선으로 전환하였지만 전투에 패배했다. 그것은 선체가 작아 적을 제압할 병사와 무기를 적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왜선에 조선 군선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중종 18년 군선 제작회의에서 대형 군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중종 39년에 판중추부사 송흠이 중국선과 왜선을 보면 사면을 모두 판자를 사용해 옥(屋, 집)을 만들어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며 우리도 옥선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송흠의 제안은 수차에 걸쳐 논의됐으며 그 타당성이 인정돼 명종대에 중국, 일본과는 전혀 색다른 군선이 만들어진 것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판옥 구조로 갑판 위에 상장갑판(上粧甲板)을 설치하고 그 좌우편에 여장(女牆)을 설치한 것이다. 이 구조는 전선에 승선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은 상장갑판 위에, 비전투원은 상하 갑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하여 비전투원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판옥선의 상장 위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아 일시에 6문의 포를 발사할 수도 있으며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었다.

반면에 왜수군의 대표적인 군선은 아다케와 세키부네이다.

세키부네는 선체가 홀쪽한 쾌속선으로 임진왜란에 참가한 군선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배의 폭과 높이 면에서 조선 수군의 판옥선보다 모두 작았다. 이 때문에 왜군은 그들의 기본 전법인 등선육박전술을 사용하기 어려웠고 반대로 높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판옥선의 화살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아다케는 규모에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판옥선과 비슷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아다케는 대개 대장선이거나 지휘선이었기 때문에 해전을 할 때에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특히 갑판 위의 2 3층 누각은 조선 수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주된 목표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력의 차이였다.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했는데 이민웅 박사는 이 당시 사용한 조총의 성능은 대략 조준해서 살상이 가능한 유효 사거리는 50미터 내외, 살상 가능한 위험 지역은 200미터, 최대 사거리는 500미터라고 설명했다. 이는 50미터까지는 조준해서 맞출 수 있고 200미터 밖이면 맞아도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당시 조선군이 보유한 대형 화포들의 사거리를 감안한다면 판옥선과 왜선과의 전투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판옥선은 평저선이라 단면이 U자에 가까운 반면 왜선은 V자에 가까운 첨저선이므로 그 너비가 좁았다. 외판도 판옥선은 너비가 좁은 판자를 여러 개 연결해 쓴 데 비해 왜선은 너비가 넓은 판자를 적게 사용했다. 배의 구조나 견고성은 물론 화포의 성능에 있어 조선 수군이 왜선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였다는 것이 결국 수전에서의 근원적인 승리의 요건이라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도 판옥선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군이 수전에 패한 것은 그들이 수전에 능하지 못해서 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군선이 견고하고 장대해 대포를 안치하고 안전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옥선은 높은 누각이 있으므로 적선에 가까이 접근하려면 2층의 갑판이 적에게 노출된다는 취약점이 있었다. 이 점을 보완하여 갑판 위에 덮개를 씌워서 보호한 것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다만 개판 하나를 더 씌웠을 뿐임에도 판옥선으로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접근전에 의한 공격과 교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음이 장점이었다.


■ 세계를 놀라게 한 명량대첩

[사진설명]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의 명량대첩기념비. 숙종 14년(1688)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보물 제 503호).


1597년 음력 9월 16일, 좁은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13척의 함선은 일본 전함 133척(200여 척이라는 설도 있음)에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잠시 뒤, 바다 위에는 13척의 조선 전함만이 남았다. 13척으로 133척을 대파한 믿을 수 없는 승리였다. 이 해전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13척으로 133척의 함대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무적함대인 거북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북선은 명량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왜선이 1000척이었다고 해도 조선 해군이 승리했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충무공의 여러 전적 중에서 명량대첩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전라남도 해남의 어란진은 현재 약 200호가 사는 작은 어촌이지만 1597년 9월 7일 133척의 전함과 보습선, 연락선 등 총 5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집결했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133척의 일본 대 선단은 9월 16일 이른 아침 어란진을 출발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으로 지금의 진도대교가 가로놓인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모두 13척, 133척의 일본 대함대를 싸우기 위해 역부족으로 보이지만 이순신 장군의 독려로 우수영을 떠나 명량해협으로 진군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 날의 일기인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단 2시간 만에 막을 내린다.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 수군의 대승이었다. 『난중일기』에 적힌 이날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 전함의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학자들은 이 당시 총 13척을 가진 조선 수군의 총 피해는 전사자 약 30명, 부상자 약 40명으로 모두 70∼100명 미만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반면에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추정해보면 일본이 입은 피해는 다음과 같다.

격침된 배는 31척, 약 90척은 심하게 파손된 채 도주했다. 격침된 배의 전사자는 최소한 3500명, 당시 격침되지 않은 배에 타고 있던 일본 수군을 총 9000명으로 추정하는데 학자들은 이들 중 절반 가량인 4500명이 조선군의 포탄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서 전사하거나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명량해전 단 한 전투에서 일본 수군 8천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13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신화적인 전투로 일본은 씻을 수 없는 대참패의 오명을 남겼고 이 전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이름을 올렸다.


■ 전선 12척이 남아있다

원래 조선 수군도 명량 해전 전에는 상당수의 전투함을 갖고 있었지만 명량해전에 막상 참가한 조선 수군의 배는 고작 13척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적은 이때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 장수 시즈마 160여 척 격파, 도도 60여 척, 야스하루 16척, 목을 벤 자만도 수천 명에 이르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여러 가지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이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의 양면작전을 펼쳐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지휘관인 원균이 수육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음에도 이를 묵살 당한데다가 도원수 권율로부터 해군참모총장격인 원균 장군이 곤장을 맞는다. 원균 장군은 육군과 수군이 연합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황을 잘 모르는 조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수군 단독으로 출전했는데 전투 결과는 원균 장군의 예상과 같았다.

거제도 앞바다의 좁은 포구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왜수군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자 육지에 상륙하여 전세를 수습하려 했으나 육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원균 장군, 이억기 장군 등을 비롯한 수군 지휘관들이 거의 전사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피해는 당시 조선 수군의 배가 모두 134척이었는데 도주한 배 12척을 빼고 모두 침몰되었다는 점이다.

수군의 존재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조선 수군의 참패는 임진왜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해상권은 조선이 갖고 있었는데 이 전투 후로 해상권마저 일본군이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수군이 해상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왜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후방보급이 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왜군은 조선 수군 때문에 한반도의 서해 진출이 봉쇄되었지만 칠천량 전투의 승리로 이런 걸림돌이 해소되었다는 것이 왜군으로서는 큰 성과였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었다. 원균의 패배로 허둥대던 조선이 찾은 방책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복권시키는 것이다. 당시 선조가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중략)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선조의 사과문을 담은 이 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하지만 이순신 장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조양창을 찾았지만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군의 기반이라고는 불과 네 마리의 말에 실은 무기와 120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추석 저녁 뜻밖의 어명을 받는다. 군사를 모두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배도 없고 무기와 군인도 없으므로 권율이 이끄는 육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이었다. 반면에 이순신은 왜적을 바다에서 막아야만 조선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수군 철폐를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이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 12척의 함선으로 왜수군을 격파하겠다는 이순신의 비장한 장계로 조선 수군의 명맥은 유지된다.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화진포에 도착하여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배 한 척, 모두 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조직하고 최후의 결의를 밝힌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를 위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 율돌목의 지형 지세를 이용한 충무공의 기지



[사진설명] 진도대교 울돌목. 충무공은 단 13척의 판옥선 이끌고 울돌목에 설치한 수중 철쇄로 왜선들을 봉쇄한 후 화약무기 등을 발사하여 대파했다고 알려졌다(정영옥 사진).


조선 수군이 갖고 있는 판옥선이 왜수군의 선박보다 앞선다고 해도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 한 척도 손상 없이 일본에 완승을 거둘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울돌목의 엄청난 조류를 조선 수군이 갖고 있던 비장의 무기로 제시한다. 이순신 장군이 울독목의 조류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울돌목이다. 이곳은 암초에 빠른 물살이 부딪혀 소리가 날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요즘도 웬만한 배가 아니고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립해양조사원〉은 울돌목의 유속이 빠른 것은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는데 이때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울돌목 물살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있다는 것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는 것이다.

그런데 〈KBS역사스페셜팀〉은 울돌목의 급조류가 왜수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왜수군도 울돌목의 강하고 빠른 물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지역은 왜수군의 탄생지인데 이곳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 왜군도 시코쿠에서 잔뼈가 굳었기 때문에 물살을 이용해 능숙하게 항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수군에게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오히려 왜수군이 울돌목으로 과감하게 진입한 것은 급류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왜수군은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전술 중에 하나가 학익진(鶴翼陣)이다. 적진을 향해 진격하다가 갑자기 180도로 회전,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면서 적선을 유인한다. 전선이 최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직전 다시 180도로 회전해서 따라오던 적선을 에워싸는 것이 바로 학익진법이다.

그러나 울돌목에서는 학인진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빠른 물살에 잘못하다가는 배가 휩쓸려 떠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순신 장군의 기상천외한 비술이 태어난다. 가장 폭이 좁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에 쇠줄을 연결해서 당기도록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이 보인다.

목포 해양방어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미터 안팍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미터 안팎의 쇠사슬이면 충분하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여 4톤 정도로 추정했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당시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재현했다.

‘수중 철쇄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왜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왜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왜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철쇄와 울돌목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왜수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전멸하고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대승을 거둔다. 한 순간 빼앗겼던 조선의 해상권을 되찾아온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민웅 교수는 2004년 7월, ‘실제 명량해전이 치러진 전장은 진도와 해남 군 사이에 위치한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난중일기(亂中日記)』 9월16일자에 나오는 ‘왜함대의 접근보고를 받고 전투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는 기록을 볼 때 명량에선 조류가 멈추는 정조기(停潮期)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장면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 철쇄를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앞서의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철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해전에서 철쇄는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 관련 전사 전문가들이 보다 정확한 결론을 내릴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상술하지 않지만 명량대첩의 해전이 울돌목에서 일어났든 전라좌수영 앞에서 일어났든 133척의 왜선이 이순신 장군의 13척에 의해 여지없이 격파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킨 일본의 영웅 도고(東高) 제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순신 장군을 따라갈 수는 없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 6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1-06 16: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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