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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 (4)

가장 큰 승전 요인은 파괴력 훨씬 큰 화포 덕

■ 이순신 장군의 승전 비결

조선 수군의 활약을 이해하려면 이순신 장군이 어려운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해전마다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군사평론가들은 이순신 장군의 승전 비결을 다음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충무공이 사용한 거북선의 탁월한 군선으로서의 역할이다. 거북선은 특수한 구조로 제조되어 거북선의 등에 송곳을 꽂아 적이 그 위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거북선내의 장병들은 안전하게 선실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적탄에 의해 살상될 염려가 없었으므로 이것이 조선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거북선은 머리를 비롯하여 10여 문의 대포를 장치하였기 때문에 전후 좌우 사방에서 적선에 접근하여 함선을 파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으로 뛰어 들어가서 적병을 무찌를 수도 있었다.




[사진설명] 거북선 모형(전쟁기념관).


둘째는 화포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사용한 대포는 천자포(天字砲).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황자포(黃字砲)등이고 각종 완구(碗口). 질려포(疾藜砲)외에 승자총통(勝字銃筒)과 신포(信砲)와 대포에서 발사되는 각종 피사물체(被射物體)가 있었다.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차대전(次大箭). 피령전(皮翎箭).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 단석(團石). 철환(鐵丸). 조란탄(鳥卵彈). 화전(火箭). 대발화(大發火)등이 그것이다.

화살 미사일격인 대전은 최고 400미터, 대포알인 철환은 1킬로미터나 날아갔다. 완구는 지름 20센티미터 정도의 돌덩이나 포탄을 장전해 발사했고 신기전은 한번에 100발을 발사하는 로켓으로 신호용으로도 사용했다. 특히 총통류의 사정거리는 세종 이후 중국에서 전래된 기존의 총통을 개량, 격목을 이용해 화약의 폭발력을 극대화시키는 독창적인 방식을 개발해 가까이는 수백 미터 멀리는 4킬로미터 정도까지 날아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 이 방식은 포탄이 떨어지면 돌을 넣어 쏠 수도 있어 무기로서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한편 일본은 사정거리 300미터 정도의 대통이라는 대포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왜적의 장기는 단병접전(短兵接戰)이다. 조총으로 우리 탑승원을 사살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함선에 기어올라 이른바 돌격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의 큰 전함인 대흑주에는 대포가 겨우 3문, 그것도 구경 3센티미터 짜리가 장치된 반면 일본도가 200자루나 되는 점들은 왜군은 접전에 능하므로 단병접전 전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수군에게는 이와 같은 그들의 전법이 먹히지를 않았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근접전을 벌이는 육전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지만 엄청난 살상력과 파쇄력을 가진 대포로 무장한 조선 수군에게 대적할 수는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해전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뱃머리를 돌려서 빗발같이 대포를 쏘았다. 이로 인해 세 함선에 타고있는 적의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어 녹도만호(鹿島萬戶)의 배와 평산포대장(平山浦代將) 정응두의 배가 도착하여 세 척의 배가 포를 집중하였더니 왜선 갑판 위에는 적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셋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당파전술(撞破戰術)을 들 수 있다. 함포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함을 파쇄하거나 탑승원을 사살하지만 당파전술이란 적선에 접근하여 충격을 가함으로서 완전히 격침시키는 것이다. 당파전술이 가능하였던 것은 조선 수군 전함의 견고성에 기인한다는 것도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세 가지 승전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해도 화포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수군의 화포는 워낙 왜군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있으므로 당초부터 해전에 관한 한 왜군은 조선 수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무선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함선 내의 화포 사용 전술을 계승한 조선군이 왜군의 대포가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서 왜군을 향해 발사하는 것을 왜군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사진설명] 임진왜란 해전 전쟁 기록화(전쟁기념관).


임진왜란을 평할 때 많은 학자들이 조선 정부가 당파싸움을 하느라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비록 조선 정부가 무능했다고는 하지만 화포를 개발하고 화약을 자체로 공급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이 조선에 있었고 또한 화약무기를 해전에서 유효적절히 사용하는 노하우(know-how)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위정자들은 세계 정세를 잘 모르고 당파싸움에 빠져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보존하는 최무선과 같은 과학자들의 후예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 거북선의 전설

우리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그동안의 연구에 의해 여러 부분에서 과장되거나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3공화국 시절 이순신 장군을 미화시킨 것처럼 거북선에 대한 진실이 감추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거북선에 따라다니는 의문점을 알아본다.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 잠수함이라고 알려진 때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철갑 잠수함인 거북선이 바다 밑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일본 배 밑에서 떠올라 배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쥴 베르느 원작의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 호보다 더 오래된 무적의 철갑선을 한국의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거북선이 철갑 잠수함이라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배의 상부가 철갑으로 되었다는 철갑선으로 변한다. 그러더니 이제는 철갑선도 아니라는 설까지 나온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승리하게 되는데는 거북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사료를 보면 매우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95년도 말에 편찬한 『한국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종래 해전 승첩의 주된 요인의 하나로 인식되어 온 거북선의 위력이란 것은 사실과 달랐다. 우선 그것은 모두 3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초기 해전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장갑선(裝甲船)이란 점에서 사부(射夫)들이 전투하는 데에 불편하였으며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들에 비하여 사상자들도 많았다. 이순신의 장계 가운데 거북선이 최초로 동원된 2차 출전 때부터 4차 출전 때까지 전라좌수군의 사상자는 모두 165명이었는데 그 중에 두 척의 거북선에 탑승한 사상자가 24명이었다. 이것은 판옥선 23척의 사상자 통계 141명과 비교해 볼 때 거북선에 탑승한 군사들의 피해가 훨씬 컸음을 말해 준다.

만일 거북선의 위력이 대단하였다면 정유재란 이전 휴전기에 단 한 척이라도 더 건조되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며, 명량해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사실만으로도 그것의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때 육군 중심의 침략군을 편성하고 수군은 수송의 임무를 주로 하였기 때문에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군선에 대포를 적재하지 않았다. 통신사 황진은 ‘왜인들도 배부림을 일찍이 익혀 왔지만 가볍고 빠른 것만이 좋은 줄 알고, 완전하고 두꺼운 것이 믿음직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대포는 없고 항상 조총을 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조선 측의 주력선은 판옥선인데 판옥선은 군선이라는 측면에서 선체가 커 많은 전투원과 화포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적재할 수 있는 장점과 아울러 선체에 판옥을 설치함으로써 주 갑판에 있는 노 요원과 사수(射手)의 안전을 보장하고 상갑판에서 화포의 구사를 용이하게 하였다.”

상술한 국사편찬위원회의 발표 내용은 기존의 지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거북선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거북선은 돌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 발전시키고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한 군선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이란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포좌를 상갑판에 설치하여 화력의 효율을 높였다는 점이다. 거북선은 이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주갑판 위에 상갑판을 설치하고 노 요원과 사수를 주갑판에, 포 요원을 상갑판에 위치케 하고, 상갑판 위를 덮개로 씌워 전투 요원까지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 그리고 판옥선의 단점인 선체가 무겁고 속력이 느린 점을 보완키 위해 선체를 판옥선보다 작게 만들었다. 해전 상황에서 항해 요원과 전투원의 안전을 보장한 군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선인 거북선이 유일한 것이었다.”




[사진설명] 300∼350여 년 전 거북선 그림. 3층 짜리 군선의 모습과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와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거북선의 구조

거북선의 전체 길이는 약 35미터에 이르며 노의 수는 16개 또는 20개로 매우 큰 배임을 알 수 있다. 승무원의 수는 180여 명에 달했는데 이와 같이 많은 승무원이 필요한 이유는 노를 젓는 인원 때문이었다. 각 노에는 5명의 인원이 1조가 되므로 20개의 노에 10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 여기에다 20명의 예비병을 따로 두었으므로 노를 젓는 사람만도 총 120명이나 된다.

일본의 『역사기』에 보면 거북선의 독특한 시공 기술이 적혀 있다.

“길이가 3∼4자인 두꺼운 널판자에 구멍을 뚫어 서로 이어 붙이는 수법으로 만들었으며 판자의 접촉 면에는 밀착제를 발랐으므로 마치 도자기의 겉면과 같이 물이 샐 틈이 없었다.”

거북선의 속도는 놀랍게도 시속 20킬로미터가 넘는 대단히 빠른 속도였다. 배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수면파(水面波)에 의한 저항이 커지는데 거북선은 길게 뒤로 뻗은 현판으로 수면파에 의한 물의 저항을 크게 감소시켜 속력을 내도록 되어 있다.

거북선에 사용된 노의 특징을 남천우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서 있는 자세에서 노를 젓게 되므로 앉은 자세로 상체만의 동작으로 노를 젓는 서양식 노보다 큰 힘을 낼 수 있다.

(2) 노를 젓는 동작이 단순하므로 경험이 없는 초보자라도 노를 저을 수 있다.

(3) 노가 측면 쪽으로 뻗어 나와 있지 않고 뒤쪽을 향하면서 물 속에 잠겨 있으므로 근접전을 주특기로 할 수 있다.

(4) 전투용 선박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배의 선회 능력이 극대화되었다.

(5) 바닥이 평저형이며 앞쪽이 30센티미터 정도밖에 물 속에 잠기지 않으므로 해안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마치 현대의 상륙용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리듯이 어떤 해안이라도 상륙하여 전투 중에 피신하거나 노략질하고 있는 적에 대해서 즉각적인 응징을 가할 수 있다.

(6) 현판 위의 측면이 좌우 수평으로 크게 튀어나와 있으므로 노와 현판을 보호할 수 있음은 물론 적이 배에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거북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하여 모두들 친근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알려진 거북선의 구조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모형조차도 통제영 귀선과 좌수영 귀선을 적당히 조합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거북선의 외형은 정조 때 발간된 『충무공전서』를 대부분 참고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전서』는 충무공에 대한 당시의 자료를 아주 세심하게 모아 발간된 책으로 신뢰성이 높기는 하지만 임진란 당시의 거북선 설계도가 아니라 정조 때의 설계도를 기준했다는 모순점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가설은 매우 많다.

해군사관학교의 장학근 교수는 거북선의 구조가 일반에 알려져 있는 2층 구조가 아니라 침실과 군량 무기고로 사용된 1층 선저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와 격군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3층에 포대를 설치 화포를 발사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노 젓는 층과 포 쏘는 층을 구분해야 돌격선의 본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와 포가 한 층에 있는 2층 구조였다면 거북선이 순간의 기동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해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증빙할 수 있는 그림도 공개됐다. 2004년 8월에 공개된 조선시대 거북선을 묘사한 그림에는 비단천에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체 형태를 지닌 군용선 4척의 모습이 있는데 이곳의 거북선은 3층 구조로, 군단을 이루고 있다. 등이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그려져 있다.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방식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300~350년 전 추정되었다.
또한 거북선의 크기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작았다는 설이 많이 있다. 선체의 길이 25미터, 너비 7미터, 높이 5미터 정도였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수군조련도, 거북선이 다소 작게 그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서지학자 이종학도 1998년 12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길이와 제작연대 등을 기록한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거북선의 크기가 매우 적다고 발표하였다. 이들 자료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별도 문서의 낱장 20여 쪽으로 거북선 제작에 관한 보고, 인사 명령, 병사의 명단 및 병력 편제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자료에 의하면 계사년(1593년) 9월에 거북선을 제작했는데 거북선의 몸체는 길이가 약 18미터, 높이가 약 4.8미터로 현재까지 알려진 거북선의 길이인 약 35미터에 비하여 매우 작다. 앞뒤로 돛대를 두개 달았고 병사들이 선박 양쪽에서 각각 8개의 노를 저었다는 기록도 있다. 거북선의 크기가 이와 같이 다른 것은 여러 크기의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는 거북선에 대한 또 다른 연구과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 거북선은 충무공이 처음으로 만들었을까?

거북선이란 이름의 배는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태종실록』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서로 해전 연습을 하는 것을 구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태종 15년(1451년)에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승리를 얻어내는 훌륭한 방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싸움에 이기는 군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라는 뜻의 상소를 올렸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0년 전의 기록으로 조선 초기에 거북선이라는 배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매우 다르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선체 위 전면에 걸쳐 판옥을 가설하여 갑판을 2중으로 만든 혁신적인 군선인 판옥선을 바탕으로 하여 그 상갑판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궁륭용 개판(蓋板)을 덮어씌운 배이다. 그러나 태종 시대의 군선은 모두 상장이 별로 없는 평선(平船)이었다. ‘거북선의 구조를 더욱 튼튼히 하고 교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탁신의 주장은 거북선이 평선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난중일기(亂中日記)』,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이분이 쓴 『행록(行錄)』 세 가지이다.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바로 전 해인 선조 24년(1591)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수군의 각 진(鎭)에 대한 전쟁 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건조를 착수하였다.

『난중일기』에는 임진년 2월 8일에 ‘이 날 거북선의 범포(帆布) 29필(匹)을 받아들였다’고 되어있고, 동 3월 27일에는 ‘거북선의 방포(放砲)를 시험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 4월 11일에는 ‘비로소 돛을 만들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다 대포를 탑재하여 실전용으로 완성된 것은 왜란 직전인 4월 12일이었다. 그리고 실전에 투입된 것은 5월 29일 사천양 해전이 처음이었다.

충무공이 제2차 출동 후의 임진년 6월 14일에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는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따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전선 수백 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거북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 천, 지, 현, 황 각 종류의 포를 쏘게 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또 이순신 장군의 맏형 의신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종군한 이분(李芬)이 쓴 『행록』에는 ‘거북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한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었다’라고 적었다. 이상이 거북선 건조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고 단편적이어서 거북선 건조의 시말을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거북선은 왜구의 침해가 심했던 고려 말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다시 건조된 후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즉 충무공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었으나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래된 거북선의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전선을 개발하였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고려말의 평선과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구조 등이 다르므로 이순신의 거북선이 비록 전래된 아이디어를 채택했지만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 거북선은 철갑선이었을까?

거북선이 철갑선이냐 아니냐는 여러 학자들간에 이견이 많고 또 우리들에게 관심이 가는 사항이다. 일반적으로 거북선은 철갑선이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해군사관학교에서 제작한 실물 크기의 거북선에도 철갑 개판이 씌워져 있다.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왜장의 기록에는 거북선을 철갑선이라 말한 내용이 있다. 『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도 6각형으로 된 거북등 모양의 덮개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많은 사료와 전언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 외형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조선공학적인 측면에서 거북선은 판옥선과 거의 동일하며 제작 상에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더구나 충무공 해전의 기록을 보더라도 거북선 몇 척의 역할로서 적을 모두 쳐부순 것은 아니며, 거북선과 판옥선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말하자면 각 해전에서 판옥선 1척이 쳐부순 적선의 수효와 거북선 1척이 쳐부순 적선의 수효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측 기록에도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인갑(鱗甲)’ 또는 ‘구배갑(龜背甲)’ 등의 표현은 있으나 이 단어만으로는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것을 확언할 수는 없다. 더구나 충무공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또 전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판옥선과 같으며 상부는 목판으로 덮었는데, 판상에 십자형 세로(細路)가 있어 사람이 위에서 걸어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았다”라는 이분의 글은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된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덮개로서는 목판이 더 좋으며 철갑은 불필요하다는 견해이다. 거북선은 돌격선이기 때문에 순발력이 있고 속력이 빨랐는데 철판은 목판에 비해 15배 이상 무거우므로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철판은 빗물과 바닷물에 녹슬기 쉽고 수명이 짧고 쇠송곳을 꽂기에도 오히려 목판이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거북선을 철선처럼 위장하였을 가능성은 크다. 왜군들이 시꺼먼 거북등 모양의 덮개를 보고서 철갑이라고 오인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결국 군선으로서는 철갑이 불필요하지만 적에 대한 심리적 효과를 감안할 때 철갑으로 위장하였을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요즈음처럼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목조 전함에 철판을 씌운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거북선 함장 임명장(국립진주박물관).


■ 수중에서 거북선이 발견될까?

임진왜란 때 사용한 거북선은 3척(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된 영귀선, 방답진에서 만들어진 방답귀선, 순천부의 순천귀선 등 3척)인데 현재 단 한 척도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숙종 때까지 거북선이 5척 있었으나 정조 때에 무려 40여 척으로 늘어났으며 순조 때에는 30척으로 줄어들었다.

여하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 발견되면 좋겠지만 후대의 거북선이라도 바다에서 인양되어 우리들에게 거북선의 신비를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75년 전라남도 신안군 해저에서 14세기 원대의 무역선이 발견되어 수많은 청자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도 거북선이 발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하여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학자들은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하면 바다 밑에 거북선은 없다고 추정한다. 왜냐 하면 목선인 거북선은 물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선의 특수성 때문이다. 커다란 목선이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것은 목재의 비중이 물보다도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송판의 비중은 약 0.5이다. 학자들에 따라 거북선의 배수량을 65톤에서 150톤까지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거북선 선체의 배수량이 65톤이라면 부피는 130입방미터이며 바닷물의 비중이 1.03이므로 적어도 69톤 이상의 추가적 하중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물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 즉 거북선을 강제로 침몰시키려면, 적어도 80톤 이상의 무게가 필요하다.

사실 거북선은 전선이므로 많은 화포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큰 천자총통(天字銃筒)의 무게가 0.4톤이고 지자총통(地字銃筒)이 약 0.3톤이다. 그러므로 화포가 10대 있었다고 가정할 때 화포 전체의 무게가 4톤을 넘지 못한다. 거북선 안에 탑재된 포탄의 무게를 감안하더라도 거북선을 바다 속에 가라앉게 만들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고대의 목선들이 해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특수한 조건하에서 조난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목선은 난파되거나 또는 격파되더라도 오늘날의 철선처럼 물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 신안 해저의 무역선이 바다 속에 가라앉은 것은 수십 톤에 달하는 동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목선천공충(좌)과 목재에 구멍을 뚫어 놓은 흔적(사진 박상진).


당시의 전투를 보면 더욱 목선이 침몰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형태를 생각해 보면 철선의 경우 격파나 격침은 결국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목선의 경우 격파는 있지만 격침은 없다. 충무공의 전승보고서마다 ‘대포를 쏘아 맞춰서 철환으로 뚫어 깨트리고 마침내 불태워 없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충무공이 언제나 적의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한 다음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으로 적함을 파괴하여 적함을 무력화한 뒤 불태웠다는 뜻이다.

1597년 7월 16일, 경상남도 고성 땅 추언포에서 왜군에게 패배한 원균 장군도 싸우다가 패한 것이 아니다. 상부의 무리한 명령으로 강행군을 하여 모두들 지쳐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밤중에 기습을 받고 혼란에 빠져 거의 모든 전선을 잃은 것이다. 선전관 김식은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추원포 앞바다에서 원균과 함께 육지로 올라왔는데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 배들이 불타 불길이 하늘을 메웠는데 몇 척의 전선은 다행히도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장착됐던 총통이라는 ‘귀함별황자총통’이 발굴되자 거북선도 조만간 발견될 것이라는 희망이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군이 추원포 앞바다에서 여러 해 동안 거북선 탐사작업을 벌였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곧바로 국보로 지정된 ‘귀함별황자총통’은 시중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으로 판명되어 세인을 놀라게 했다.
한편 박상진 교수는 거북선이 침몰하지 않았다는 주장 자체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목선이 가라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무의 횡단면을 잘라보면 마치 벌집을 연상시킨다. 육각형 모양이 진짜 나무 부분(세포벽)이고 나머지는 빈 공간이다. 나무가 물속에 들어가면 우선 세포벽이 물로 포화되고 이어서 빈 공간 속으로 물이 스며든다. 그런데 나무 세포벽 자체의 비중이 1.5나 되므로 물로 완전히 포화되었다면 전체적으로 바닷물의 비중(1.03)을 넘어서게 되어 가라앉는다. 실제로는 완전 포화되기 훨씬 전에 가라앉는다. 비중이란 무게를 부피로 나눈 값인데, 나무가 물을 빨아들임에 따라 무게와 부피는 모두 증가하지만 부피는 거의 증가하지 않는다. 즉 무게 증가만 계속되므로 비중 역시 계속 증가한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바닷물의 비중을 넘어서게 되어 나무도 가라앉는 것이다. 또한 전투 중에 배에 구멍이 났거나 반쯤 파괴되는 경우, 선박에 실려있는 무기와 병사들의 생활용품 때문에 추가 하중이 발생하므로 더 빨리 가라앉는다.’

그러나 박 교수는 설사 목선이 가라앉았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목선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바다 속에 살고 있는 바다벌레들 때문이다.
목선이 침몰하면 제일 먼저 목선천공충(shipworm)과 바다나무좀(limnoria)이라는 바다벌레들이 덤벼든다. 목선천공충은 머리에 작은 조개껍질을 뒤집어쓰고 표면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 집을 만드는데 이때 바다나무좀이 달려들어 나무질 자체를 양분으로 먹어버린다.

그러므로 침몰한 목선이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보관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침입을 막아줄 개흙(뻘)이나 모래가 빨리 덮어줘야 한다. 바다벌레는 두꺼운 뻘이나 모래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다. 이번에는 나무의 뼈대가 되는 셀룰로오스 성분만 분해시키는 연부후균(soft rot)가 기다렸다는 듯이 덤비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해 속도가 느린 탓에 두꺼운 나무를 먹어치우는 데는 수백 년이 걸리므로 임진왜란 때 침몰한 배라면 뻘이나 모래 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여하튼 거북선의 인양 작업에 참여하였던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에 거북선이 바다 밑에 있다면 판옥선과 왜선들이 제일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왜란 때에 격파된 거북선은 단 3척에 불과하지만 판옥선과 왜선은 그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거북선이 발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많은 판옥선이나 왜선이 먼저 발견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판옥선이나 왜선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거북선 자체의 인양 가능성이 불가능함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거북선이 어떤 이유로든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만이 거북선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북선의 실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 7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1-07 17: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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