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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평가하는 원균 장군

평가 엇갈리지만 임란종전 3년후에 1등공신 책봉
무리한 출병요구와 전술 부족겹쳐 칠천량서 대패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원군장군에 대비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기반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많은 부분을 미화하고 과장시켰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서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수많은 해전을 이순신 장군 위주로 해석하기 때문에 당시에 이순신 장군과 쌍벽을 이루던 원균 장군 등에 대한 부분을 곡해했다고 지적한다. 원균 장군의 후손들은 이순신 장군을 숭상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원균 장군을 고의적으로 폄훼 하였으므로 역사적인 사실에 의거 정당한 평가를 해달라고 각종 언론 매체와 정부 당국에 탄원을 낸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원균 장군의 묘


사실 제3공화국 때 충무공에 대한 평가는 신성시되어 어느 누구도 충무공에 대한 재론이 금지될 정도였다. 이순신 장군은 ‘영웅’이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라 ‘성웅’으로까지 추앙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순신을 평가하는 기존 정설이다.

첫째, 임진왜란 기간(1592∼1598)에 전쟁의 최고 지휘부인 조선 조정은 철저히 무능했고 당쟁으로 일관했다.

둘째, 충무공은 이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려고 몸을 바쳤다.

셋째, 충무공은 뛰어난 지략과 거북선 건조 등 빈틈없는 준비로 엄청난 군사적 열세를 뒤집고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넷째, 충무공은 동료 장수인 원균 등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백의종군’한다.

다섯째,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충무공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패잔병을 수습하여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여섯째, 충무공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에 대해서 ‘충’으로 일관했으며 가정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등 문과 무를 겸비한 그야말로 성인 중에 성인이다.

이러한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신화는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5 16쿠데타 등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족적을 남겨 이순신은 국난극복과 민족 중흥의 용기를 북돋우는 데 큰 공헌을 했으나 임진왜란을 이순신 장군의 공적 위주로 설명하다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리한 수도 두었다는 지적이다.


■ 수군 전투의 선봉장 원균

원균 장군의 이름은 균이요, 자는 평중이고 본관은 원주이다. 1540년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보다는 5년 연배이다. 원균은 일찍이 군대에 들어가 경흥군 조산보만호(종4위)였는데 반년만에 특진하여 전라도좌수사(정3위)로 임명되자 사간원에서 그의 근무평가가 나쁜 것을 이유로 임명에 문제가 있다고 반대하여 부임도 못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2개월 전인 1592년 2월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사진설명] 원균 장군의 사당.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은 좌 우로 나뉘어져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그 지휘권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쳐들어왔을 때 경상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리자 경상우수사 원균 혼자 적과 싸웠으나 수영이 함락되었다. 이 당시 원균은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 소수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때 원균으로부터 전라좌수영에 왜란의 급보가 전해진 것은 일본군이 침공한 지 2일 후였지만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로 출동한 것은 20일 후인 5월 4일이었다.

어떻든 원균은 영남해역에서 단독으로 일본 수군과 맞서 싸우면서 10여 척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전라좌수영에 원군을 계속 요청하였지만 이순신은 계속 출동을 미루었고 이것이 후에 원균과의 불화를 조성하게 된 불씨가 되었다. 사실 이순신 장군은 출동하기 2일 전인 5월 2일만해도 확실한 결심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부하들이 적극적으로 출동할 것을 주장했다. 일부 장수들이 영남구원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군관 송희립은 그들의 부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큰 도적이 국경을 치고 들어와 그 행세가 커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될 리 없으니 나아가 싸우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운이 꺾일 것이고, 또 불행히 전쟁에서 죽는다 해도 신하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겁니다.”

녹도만호 정운도 이에 가세했다.

“영남도 우리 땅이므로 적을 치는 데 있서서는 전라도, 경상도에 차이가 없습니다. 신하로서 국은을 입고 국록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어떻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이에 이순신은 출정을 결심하고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원균과 합류한 후 5월 7일 옥포에서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합포, 적진포 등에서 다시 16척을 불살라 없애는 등 모두 40척을 대파했다. 이후 이억기의 판옥선 25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전라좌 우도와 경상우도의 수군이 합세하여 이른바 3도 수군의 연합전선이 구축된다.

옥포해전으로부터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약 5개월 간에 걸친 초기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선만 해도 약 330척을 격파하거나 불태워 없애는 엄청난 전과를 올려 결국 해전에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전세에서 조선측으로 하여금 종래의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후 명나라의 이여송이 4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우여곡절을 겪은 후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 교섭을 추진하지만 명나라 군이 내부 사정으로 완전히 철군하자 조선은 일본이 재침해 올 것으로 생각하고 군을 정비한다.


■ 수군 작전을 모르는 조정 대신

이 당시 조선의 조신들은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왜군과 결전하면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정은 선조 29년 11월 조선수군이 거제 장문포로 진출하여 이곳을 함대기지로 삼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바다를 건너오는 왜군을 해상에서 섬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수군이 한산에서 참패한 후 해전을 기피하면서 지상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는 남해연안을 요새화 하여 연안에서만 작전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배후에 두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후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공격할 것을 조정에 요구했다.

이때 왜군은 재침의 결정적 장애가 될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역공작의 일환으로 가등청정의 도해 시기를 허위로 알려준다. 이순신은 이 정보를 의심하고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가등청정이 도해한다는 지역으로 함대를 빈빈히 출동시키면서도 결정적인 해상작전만은 유보한다. 군량과 인원 그리고 병선의 부족이라며 적절한 핑계를 대었지만 이순신이 해로 차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선조는 격노하여 원균을 새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을 하옥시켰다.

이순신의 판단은 현지 상황에 정통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이순신이 왜군을 격파하는데 주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충청병사로 있던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한 것이다.

새 통제사가 된 원균도 부임한 이래 조정으로부터 부산 앞바다로 진출할 것을 지시 받았지만 적의 동향을 살펴본 후 왜군이 계략을 써서 아군을 속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휘하 함대와 왜군의 해상 결전을 기피하면서 연해안에서 작전을 전개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계속하여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일본 해상로를 차단하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현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원균은 이순신이 건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안골포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육군이 먼저 공격해야한다며 조선수륙군이 연합하는 병진공격작전을 건의한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이 이 작전에 반대하자 원균의 건의는 묵살된다.

일본이 연안에서 활동을 점증시키고 왜군이 곧 재침하리라는 정보가 이어지자 조정은 또 다시 원균에게 조선수군이 선제공격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따라 원균은 수군 3만 명과 함선 200척을 한산도에 집결시키고 함대를 두 선단으로 재편하여 교대로 해상에 나가면서 왜수군과 결전에 임했다.

이 때 상상할 수 없는 돌변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수군과의 전투를 회피한다는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원균이 권율장군으로부터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이는 요즈음으로 따지면 총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을 공개적으로 태형에 처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원균은 명령에 의해 수군을 출동시키지만 분명히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패할 것이라는 비장의 말을 남기며 전선으로 향한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왜군을 좇아 격파하는 작전에 착수했으나 결국 수륙양면으로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는 1천 척의 왜군에게 대패한다. 원균은 잔군을 수습하여 전력을 정비하려고 춘원포에 상륙했으나 도진의홍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한다. 이 때 유명한 전라좌수사 이억기 등도 모두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할 수 있었다. 조선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이 해전을 칠천량해전이라고 부른다.




[사진설명] 원균 장군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 전투도.


조선수군이 패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무리한 출전 강요가 주요 원인이었으나 원균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군선을 집중시켜 적선이 분산되었을 대 공격하여 승리했던 것과는 달리 원균은 열세한 군선으로 다수의 적선을 분산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열세한 군사력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하는 모양이 되어 그 결과는 패배로 나타난 것이다(이민웅 교수는 정유재란의 첫 전투라 볼 수 있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했다고 적었다).


■ 각색에 따라 달라진 두 장군의 명암

한 개인의 역사는 시간이 갈수록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때론 각색되고 때로는 윤색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사실보다 훨씬 더 부풀려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실보다도 형편없이 축소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원균은 후자에 속한다.

보통 이순신은 ‘천하의 용장’이요 상대역인 원균은 ‘무능한 겁쟁이에다 모함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의 골이 깊게 만든 빌미를 제공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옥포 해전의 장계 때문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과 원균의 수군이 합동으로 참가하여 승리한 것으로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공을 탐하지 않고 장계를 올릴 때 협의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이를 어기고 단독으로 장계를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비롯하여 부하들은 모두 상을 받았지만 원균과 함께 싸운 장병들은 어떠한 포상도 받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순신이 출진한 날이 1492년 5월 4일인데 이순신은 출전하기 직전인 4월 말 원균 측 관할인 남해기지(지금의 남해시)의 관고(官庫)를 불태웠다. 이유는 남해가 무인지경인데다가 전라좌수영 진영과 너무 인접해 있어 왜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경우 전라좌수영의 방어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이 행동은 섣부른 오판인데다가 자신의 관할 지역이 아님에도 불과하고 불태운 실수였다는 것이 후대의 판단이다. 충무공이 당시 왜적이 먼거리에 있었는데도 원균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남해관고를 불태운 이유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난중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이순신과 원균 양측에 두고두고 불신하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사진설명]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친필초본으로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다. 원균 장군과는 달리 이순신 장군의 경우 『난중일기』 등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평가하기가 수월했다고 볼 수 있다(국보 제76호).


그런 판에 임란이 발발한 다음해 8월(1593년)에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면서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자 정통 무인으로써 자부심을 갖고 있던 원균은 거세게 반발한다. 불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원균이 계속 불만을 쏟자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함께 근무케 했다가는 전열만 흐트러진다고 생각한 후 충청병사로 전출을 명한다. 사실 충청병사는 관직으로만 따지면 승진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원균이 나가는 길에 영전을 축하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명목상 영전이지만 실은 좌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균은 충청병사로 있으면서도 마음은 수군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수군에 대한 건의를 올리기도 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이 원균의 측실소생인 원사옹(元士雄)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져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하니 앞으로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쫒아 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충무공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 陷)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원균에 대한 가장 큰 불명예는 이순신의 하옥이 원균의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나 그런 주장은 오히려 원균에 대한 모함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정설은 이들 사건에 대해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잡혀가서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 등의 변호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하옥된 주요 이유는 4가지인데 이 중에는 오히려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한 것과 이순신이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명을 어긴 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선조의 비망기(備忘記)에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를 범했다(欺罔朝廷 無君之罪). 또한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으며(縱賊不討 負國之罪) 심지어는 남의 공로를 빼앗았고 또 남을 모함했다(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까지 있으므로 그를 구할 길이 없다. 이같이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必誅不赦) 이제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今將窮刑得情).”

여기에서 적을 쫓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일본의 정보전에 조정이 당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왜장 가등청정이 간첩 요시라를 이용해 자신이 어느 날 어느 섬에 숙박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유출했다. 그러자 조정은 그러한 정보를 그대로 믿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치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그것이 계략임을 알고 출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명령불복으로 하옥된 것이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이다.

사실상 원균은 이순신과 비교할 때 항상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무능한 장수’라는 부정적 이미지로만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원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평자이자 이순신의 친구인 서애 유성룡조차도 선조 앞에서 매우 다른 평가를 했다. 1596년 유성룡은 어전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부터 육장은 수전에 능하지 못하고 수장은 육전에 능하지 못하나, 원균은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용감히 싸우며 그 모두에 능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유성룡이 종전 후 집필한 『징비록』권2 제12장에서는 원균을 원천적으로 비난한다.

“성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인사들과 연결하고 있으면서 순신을 모함하기에 힘을 다했다. 또한 원균은 순신이 당초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나의 고청에 의해 왔으니 적을 이긴 수공(首功)은 바로 나다.”

원균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의 전투 결과만을 두고 보면 결과적으로 원균은 패전 장수였다. 그러나 그가 모든 싸움에서 겁쟁이처럼 꼬리를 내린 졸장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용맹해서 문제가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원균과 이순신 모두 삼도수군의 수장이 되어 전투에 임했으나 두 사람의 명암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원균은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부산의 적을 공격하다가 패전하고 전사하는 반면에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승전보를 남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역사에 충신으로 기리 칭송된다.


■ 사망한 세 장군만 일등공신에 책봉

난이 끝난 후 3년이란 기간 동안에 심사숙고하여 정한 전공 심사에서 원균은 권율, 이순신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사진설명] 원균선무공신교서(보물 1133호).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603년 6월에 선무공신의 녹훈(錄勳: 훈공을 정하여 기록함)할 때에 이덕형, 이항복 등이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원균이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로 해상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 뒤에 주사(舟師: 수군)를 패망케한 과실이 있으니 이순신, 권율 등과 함께 더불어 같이 할 수 없어 내려서 이등으로 기록하였습니다.’하자 선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진왜란이 처음 일어났을 적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이순신이 스스로 달려간 것은 아니다. 적을 칠 적에 원균은 죽음을 무릅쓰고 매번 선봉이 되어 앞장서서 용기를 돋구어서 그가 이기고 빼앗은 공은 이순신과 같으며, 그가 잡은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은 오히려 이순신에게 빼앗겼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을 때 원균은 두 세 번 장계를 올려 힘써 부산 앞 바다에서 왜적 속으로 쳐들어가 싸우지 못할 실정을 알렸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독촉하고 도원수 권율은 곤장을 때렸다. 이에 원균은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을 떠나 적을 친 끝에 온 군사가 빠져죽자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이는 원균의 용맹함이 삼군의 으뜸일 뿐만 아니라 지략 또한 출중한 것이다.

옛적에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농궐에 나갔다가 적에게 패한바 있었고, 양무적(楊無敵)은 반미에게 협박을 당하여 눈물을 뿌리고 할 수 없이 싸우다가 드디어 적에게 패하여 죽었으니 어찌 이러한 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금의 인물을 성패만으로써 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운과 시기가 어긋나서 공은 무너지고 일은 실패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된다. 오늘 공을 논하면서 2등에 기록하려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리라.”

선조는 이렇게 말하고 권율, 이순신, 원균을 똑같이 1등 공신으로 삼았다. 1604년 4월에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效忠杖儀 迪毅協力 宣撫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능군(崇錄大夫 議政府左讚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으로 추증하고 이듬해인 1605년 5월 류황을 보내어 가묘(家廟)에서 제사지내게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조반정 후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원균을 깎아 내리고 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쓴 것이고,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쥔 서인들이 고쳐 쓴 것이다. 이 때 원균은 철저하게 다시 죽임(筆誅)을 당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집권측과 원균의 측이 서로 당파를 달리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하고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들이 동조해 성공한 쿠데타인데 이순신은 남인의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반면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구나 이 수정실록의 편찬 주관자는 이순신의 후손인 택당 이식(李植)이었다.

여기에다 원균에 대한 기록이 매우 빈약한데다가 상대적으로 이순신은 『난중일기』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원균을 평가절하하기가 쉬웠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원균이 올린 군공장계는 이순신보다 더 많은 6개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한 쪽은 자료가 철저하게 보관되고 나머지 한 쪽은 철저하게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증거라는 학자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조차도 그의 실수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날 수 있는 시기의 것들이 전부 전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조카에게 보낸 짧은 편지까지 쓰는 이순신의 품성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기를 의도적으로 적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일기는 남에게 보여 주려고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기가 몇 달씩 전해지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의 친필 초고를 찢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다.


■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으로서도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일이 적지 않다. 선조의 말에 의하면 이순신은 원균의 원군 요청을 받았음에도 20여 일이나 질질 끌다가 부하들의 독려에 의해 마지못하여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엄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은 이순신을 탓할 일은 아니다.

당시 전라좌도 수군은 전선이 총 25척 정도였는데 이 중에서 이순신이 관장하고 있던 수군은 작은 포구 4개 뿐이었으며 전선의 수도 겨우 10여 척이었다. 이 당시 경상도의 전선의 수는 좌 우도 합하여 약 150척이었으므로 실제로 이순신이 경상도 수군을 지원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둘러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순신으로서는 자기가 맡고 있는 포구를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 그림.


더구나 당시 군 편제상 각 도의 관찰사가 병사(兵使)와 수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경상도로 지원 나가려면 자신이 관장하는 10여 척의 전선만으로는 어림이 없으므로 적어도 전라좌도 수군을 모두 영솔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

당시의 작전 구역은 엄격히 자기 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경상도에 출병할 수 있도록 조정에 허가를 요청하고 있으며 이순신도 경상도에 출병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것은 개전 14일 후인 4월 28일경이었다. 그래서 출격 준비를 마치고 허가를 받은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원균으로부터 경상도의 전선 70여 척의 전선이 격파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몇 일 후에 출격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5일을 더 기다린다. 그러나 이억기가 끝내 오지 않으므로 결국 전라좌도의 전선만으로 출격하여 원균과 합류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 이순신이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자마자 출격했더라면 경상도의 수군이 그렇게 처참하게 격파되지 않았을지는 모른다. 선조도 이에 대해 끝까지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은 선무공신 책봉 때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작전권을 포함한 군 통제 상황을 엄격히 지키려는 이순신 장군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결론적으로 이순신의 합류로 조선수군은 반전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므로 공과를 따질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사실 전반적으로 군선의 수, 속도, 군수지원체제, 전투원의 정예도 및 전투원의 수 등으로 고려할 때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열세였다. 따라서 함대함 전투를 할 경우 조선 수군에게 절대 불리했다.

그런데도 임란 전 기간을 통하여 수군통제사로 임하였던 이순신의 함대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 요인은 불리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전략 전술을 적절히 운영했다는 점이다. 조선 해안의 지형 지물에 밝은 연해 주민을 이용하여 주변 환경을 전투에 운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수전에서 명중률이 다소 낮은 대형화약무기들을 학익진을 형성하여 탄착점을 중앙에 모으게 함으로써 명중률을 높였다.

이와는 반대로 용감성 면에서는 국왕인 선조로부터 신임을 받을 정도로 앞장선 원균은 함대함 전투를 선호하여 적세가 아군보다 강할 때 공격함으로써 적의 협공을 받아 패했다.

사실 임란에서 전국회복을 갖고 오게 한 동력은 조선수군의 승리였다. 그러므로 승전에 대한 공을 이순신 장군의 공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영웅적인 활동은 조선 군선과 화포 그리고 전술전략의 응용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전투요원들의 책임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을 성웅화하고 영웅화시키기 위해 모든 공적을 무리하게 몰아주고 다른 장수들의 업적을 낮추거나 폄하하려는 데서 진실성을 오히려 훼손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 12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1-12 17: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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