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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지 않았다

갑옷 입지않고 진두지휘 '장렬하게 자살'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하다가 적탄을 맞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최후를 부끄럼 없이 장식하기 위해 장렬하게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져 있다. 당시의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로 여겨진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에도 자신의 진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곤 하였다.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유형은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갖고 있던 결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마음속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적이 물러나는 마지막 전투에서 ‘반드시’ 죽겠다는 비장한 내용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결코 통상적인 전사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진설명] 노량해전 격전지(사진 코리아비주얼스).


1597년 7월 15일 원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왜수군에게 대패했고 이 전투에서 원균도 전사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놀란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했다. 9월 16일, 명량 해협에서 단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상대로 포위를 당하고도 대승을 거두며 조선수군은 다시 남해의 해상권을 회복하게 된다(「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3)」, 국정브리핑, 2004.08.16 참조).

다음해 7월(1598)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麟)이 5천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조선 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의 군을 해상에서 포위, 적의 해상 교통을 봉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황이 바뀐다. 8월 17일에 8월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에 의하여 왜적은 철수의 길에 오르게 된다. 순천에 있던 소서행장은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어달라고 한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자고 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일거에 거절했다. 이에 왜적들도 일전을 각오하고 소서행장은 곤양과 사천 방면의 적에게 구원을 청하여 구원병들이 노량(鷺梁)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왜군의 배는 500여 척, 조선의 수군과 명군의 배는 300여 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충무공이 전사하였지만 왜선 500여 척 중 450 척이 부셔지고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 등을 비롯한 일부가 고작 50여 척으로 도망칠 정도로 조선 측의 대승이었다. 그 때가 선조 31년 11월 19일이였다.


■ 전사를 선택한 마지막 해전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자살이라는데 비교적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이충무공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또다시 잡혀가서 억울하고 욕되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을 읽어보자.

여기에는 선조의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

선조는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더욱 불안해져 의심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미리 죽였다. 특히 정여립 역옥 사건으로 인하여 1,000여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는데 그 정도가 얼마니 심하였는지 자살한 정여립에게 다시 형벌이 가해지던 날 어떤 사람이 안질 때문에 눈물을 흘리자 정여립을 추모한 까닭이라고 곤장을 쳐죽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조대중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와 첩, 아들과 딸, 동생과 조카 등이 모두 죽었다.

더구나 왜란 중에 선조를 비롯한 집권자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지만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은 효과적으로 소위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자치권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이 때의 의병장들로는 조헌, 고경명, 곽재우, 김덕령 등으로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감은 컸다.

의병장들이 관의 지휘를 벗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조정은 왜란이 끝나면 의병장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잠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적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잠재적인 적도 견제해야 했다. 조정은 의병장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첫 칼을 빼들어 김덕령 장군을 역모 혐의가 있다고 31살 나이에 죽인다.

이에 대한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에서 ‘김덕룡 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여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했다.’라고 적었다. 조정의 비정한 칼이 영웅호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권율은 아침저녁으로 한양에 장계를 띄워 충성을 맹세했고 대장군 이일은 아예 왕실과 조정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사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체포할 때도 이충무공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선전관의 신표와 밀지를 주어 신분을 위장하고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먼저 선전관의 자격으로 10여 일을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 장군의 동태를 엿본 다음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는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것은 잘 알려진 다음 4가지 죄목이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를 범했다(欺罔朝廷 無君之罪). 또한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으며(縱賊不討 負國之罪) 심지어는 남의 공로를 빼앗았고 또 남을 모함했다(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까지 있으므로 그를 구할 길이 없다. 이같이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必誅不赦) 이제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今將窮刑得情).'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이순신의 죄목에 대해 자백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까지 한 것을 볼 때 이순신을 견제하려던 의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탁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전투 중에 군사령관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왜병에게만 도움을 줄 뿐이라는 구명 상소문을 올리자 이순신 장군의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




[사진설명]
노량해전을 그린 민족기록화(경남 통영군 한산면 제승당 소장).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이순신 장군은 1597년 7월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패잔선 12척(총13척)으로 명량 해전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을 더 미워하게 되었으리라는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조 실록』 1597년 10월 20일을 보면 선조는 명량해전에 대해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이순신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포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 고 말하면서 포상도 거부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의 승리도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을 통해서 자신의 존립이 위태해진 것을 경험하였으므로 전쟁이 끝나자 왕권에 대해 병적인 집착을 갖고 전쟁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일등공신으로는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사망한 사람에게만 주었다. 곽재우, 이원익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은 1등 공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였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웅 칭호를 준다면 선조로서 안심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적의 유탄을 맞았다’는 사실과 ‘스스로 전장에서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 최후의 노량해전

자신의 통치에 방해될지도 모를 잠재 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앞장 선 선조의 행위를 볼 때 이순신 장군에게도 또 다시 칼이 날아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생각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특히 왜란을 종식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라는 것은 무장으로서의 최고의 명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니는 전설 중에는 놀랍게도 충무공이 전사하지 않고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도 자신에 대한 선조의 마음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취할 방법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앉아서 맞아 죽는 것보다 스스로 일어나 썩은 정권에 항거하는 것이고 셋째는 외형적으로는 죽기는 죽되 실제로는 살아서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둘째의 방법 즉 무능한 정권에 항거한 무장봉기 즉 선조가 우려하던 쿠데타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라고 적은 네티즌도 있다. 이순신의 근거지는 전란의 참화를 비교적 적게 받은 안전한 거점으로 식량과 농토가 보존되었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없었다. 또한 백성들은 이순신을 실질적인 주인으로 여겨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함대를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을 공략했다면 승산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순신이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가 왜군의 침략을 구해준 구세주라는 백성들의 인식은 고려 말 이성계가 중앙정부를 전복할 때와 유사했다. 만약에 이순신이 쿠데타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보유한 학자들과 결합했다면 중앙정부와 싸울 승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오페라 이순신> 중 노량해전 장면.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이순신 장군이 당시의 혁명아로 불리는 허균과 만나 정세를 토론했다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 정권에 대한 허균의 설득력이 이순신을 이끌었다면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끈 것과 같은 결과를 갖고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많다. 이순신의 군대는 수군 위주라서 육전에 한계가 있으며 당시 조정이 썩기는 했지만 왜란이 소강상태에 있었으므로 내란을 방어할 만한 힘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두 번째 가설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고 마지막 선택 즉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후일에 대비했다는 설은 예로부터 꾸준히 내려오고 있다. 즉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전투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에서 실제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은둔하였다는 가설을 설명하기 전에 노량해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노량해전은 워낙 전투 상황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순신은 명나라와 조선군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11월 19일 새벽 2시쯤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觀音浦) 앞 바다에서 이르렀는데 연합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반면에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왜적들은 500여 척을 이끌고, 경상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 사이에 있는 광주양(光州洋)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되었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 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조선 수군이 좌우에서 일시에 포격을 가하자 당황한 적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왔지만 연합함대의 공격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관음포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해 관음포는 지리적인 지형상 도망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므로 왜적선들이 다시 돌아서서 결사적으로 대항하면서 이순신의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자 자못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진린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고 거꾸로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이순신이 진린을 구했다.

연합함대의 맹렬한 공격은 쉬지 않았다. 적들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 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치려하였으나 적선 1척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였다.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나갔다.'


■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서 죽음의 순간처럼 드라마틱한 부분은 없다. 특히 이순신의 전사 장면은 후일 각종 전기에서 약간씩의 포장을 더하면서 그의 죽음을 신화화하는 근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전 서울대학교의 남천우 박사는 우선 이분(李芬)이 쓴 행장(行狀, 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중에서 유독 이순신 장군의 전사 현장 기록만은 매우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19일 새벽 2시쯤부터 적선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놓치지 말라. 이 싸움에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던 왜적을 한 명이라도 살려보내서는 원통하게 죽은 우리 백성들의 영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원수를 갚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 후 결전에 나선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적이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순신 장군은 더욱 북채를 쥐고 독전하였다. 적은 거의 전멸 상태에 빠지고 최후의 승전고를 울리려 할 때 적이 쏜 탄환 한 발이 이순신 장군의 가슴을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나갔다.

이순신 장군은 맏아들 회와 조카 완(莞)에게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物言我死)’라는 유명한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회와 조카 완이 울음을 참고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장병들이 놀라고 적들이 기세를 얻을지 모른다.’ 라고 말하며 이순신 장군의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장군이 사망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뿐이었고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사진설명] 2004년 노량해전 승첩제.


전쟁이 끝난 후 진린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와 그의 죽음을 알고는 배 위에서 세 차례 꿇어앉아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나 때문에 그대가 돌아가셨구려’하고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다. 그때서야 다른 배의 병사들이 통제사의 죽음을 알고 땅을 치며 목을 놓아 울고 또 울었다.”

이분이 기록한 충무공의 최후 장면이다. 이분(李芬)은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완의 친형이다. 그러나 이 글만 보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지만 이분이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쓴 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 편의 영화장면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설명 때문이다.

우선 이순신 장군이 총에 맞고 나서 처음에는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사망했다는 대목도 이상하지만 전투가 한창일 때 총사령관 근처에 측근 군관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라우수영의 기록을 보면 사령관 함선에는 항상 90여명의 기라졸(旗羅卒)이 배정되어 있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당시 서 있던 곳은 60여명의 병사들이 항상 있었던 2층 갑판상의 중앙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망했다면 당연히 차 순위 군관이 함대를 지휘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이 사망하였는데도 그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군인도 아닌 20세 전후의 맏아들과 조카가 해전이 끝날 때까지 깃발을 흔들면서 함대를 지휘하였다.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가 마치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와 같이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의문점이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이다. 전투상황을 볼 때 사령관 함선에 타고 있던 측근 군관들이 충무공의 유고시 함대를 지휘하였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사망 조작설로 보면 이들은 장군의 아들, 조카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의 은폐 작전에 동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잘 아는 이분도 공모자인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기록을 조작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도 있다. 야간에 해전을 하면 배의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우므로 조선군에게 불리하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은 야간에 해전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망한 시각이 새벽 2시인데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은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어둠을 이용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더 큰 의문은 맏아들과 조카가 함께 배를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중에 20여 번의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는데 그들이 해전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이순신 장군이 유탄에 맞은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이며 해전이 끝날 때까지 여러 시간 동안 그의 죽음을 숨겼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보다 더 이상 좋은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은 『선조실록』(선조31년 11월 27일)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 당시 일본어 역관)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특히 선조 32년 2월 8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노량(露梁)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장학근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이분의 행장과 이에 근거한 후세의 기록은 후세인들이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강조하기 위한 미화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충무공이 살아서 금의환향하며 개선했다면 과연 죽을 때까지 구국의 명장으로 살아 있을지를 의문으로 보는 견해는 선조의 여러 가지 행태로 보아 일리가 있다는 견해이다. 보나마나 이순신 장군의 과거의 죄를 다시 묻는 상소가 빗발쳤을 것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토끼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잡아먹는 격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장렬한 전사를 지론처럼 이야기하자 측근들은 오히려 살아서 은둔하도록 권했다는 것이 은둔설이지만 장 교수는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순국임에 틀림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위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분의 행장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분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승선하고 있었던 이완의 친형임을 앞에서 적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이완과 함께 송희립 등이 직접 목격했다면 이분이 그 당시 정황을 영화장면처럼 적을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이분이 당시의 정황을 영화장면처럼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은둔설의 또 다른 배경이다.




[사진설명] 노량해전도.


공식적으로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사망하였으며 영구는 고금도로 옮겨진다. 그 후 12월 10일 경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지며 장례는 다음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사망한지 80일 후의 일이다. 그리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후 16년이 되는 1614년에 묘지를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장한다.

여기에서도 의문점이 제기된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은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며 12월 4일에 이순신 장군에게 우의정을 증직되고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진다. 그런데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임에도 16년 후에 이장하였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것은 그때에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를 다시 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충무공이 사망했다면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물론 이 당시 선조는 사망하고 광해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이다.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은 충무공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한 후 밤을 틈타 빠져 나왔다는 것을 뜻하는데 현재로 치면 해군참모총장격인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위장하면서까지 탈출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설을 제기하는 자체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전의에 불타 있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견해다.


■ 일본의 재침 시 누가 막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 나름대로 힘을 받는 것은 일본과의 전쟁 즉 임진왜란(7년전쟁)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명나라를 치러 간다는 명분으로 조선과 동맹을 맺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제의를 받고 소위 정탐꾼(통신사)을 공식적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 야욕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찬반양론을 벌인 후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같은 결론은 전쟁을 대비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이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했을 때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허겁지겁 신의주까지 도망갔다. 다행히 명나라 원군이 참전했고 지루한 평화 협상 끝에 일본은 결국 철수한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도 조정에서는 일본의 재침이라는 돌발 변수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다가 정유재란을 맞는다. 물론 정유재란에서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과 일부 관군, 의병들의 선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적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일본군이 자진하여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유재란을 일으켰는데 또 다시 조선을 재공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당시의 상황을 검토해보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또 다시 죽이려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일본이 재침해 온다고 가정한다면 이순신 장군이 사라졌을 때 누가 조선을 지킬 수 있겠는가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유재란 때는 다행하게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량 전투에서 전사한다면 다음에 위기가 찾아올 경우 죽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설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충무공의 부하들이 일본이 또 다시 재침한다면 국난을 지킬 사람은 이순신 장군 뿐이라고 설득하면서 은둔을 요청했을 때 이순신 장군이 섣불리 노량 전투에서 고의적인 자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적어도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일본이 언제든지 재침해올 수 있었다고 믿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후일 일본이 재침한다고 가정한다면 노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보다는 살아있으면서 일본이 재침할 때 다시 나서야 한다고 설득하자 노량해전에서 은둔하는 모험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에 대한 결정인 증거는 없다.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로 작정하였다면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일을 추진하고 뚜렷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증거라면 증거이다. 더구나 일본은 우려한 것과는 달리 재침해 오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설 기회가 없이 16년 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 설명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독자들에게 이런 의문도 속 시원히 밝혀질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 이순신 장군 동상 이전 백지화



[사진설명]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서울시는 1968년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동상을 이전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한다고 발표했다. 조각가 고 김세중씨의 작품으로 제3공화국 시절 서울 한복판에 세워져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아 광화문∼세종로 네거리의 광장 조성 계획에 의거 충무공 동상을 광화문 열린마당이나 충무공 탄생지인 필동 부근으로 옮길 것을 검토했다.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거리는 광화문∼광교∼남대문 길이었고 지금의 광화문∼세종로∼태평로∼남대문 길은 용산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비상시에 경복궁에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태평로와 세종로는 서울역이 커지면서 본격적으로 확장됐고, 일제는 일반인들이 경복궁을 볼 수 없게 만들기 위해 도로 가운데 은행나무를 심었다.

충무공 동상을 세종대왕상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제출되었는데 충무공 동상이 현재의 위치를 지키게 된 연유에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의견이 큰 몫을 차지했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 있어 남쪽 일본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들어오므로 이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게 된 이유도 밝혀졌다. 충무공 동상이 세워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거부한 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워라’고 지시해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번 서울시의 동상 이전 백지화 결정에는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대다수의 응답자들이 동상 이전을 반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계속 한국을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 1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1-13 17: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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