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개통식 다음 날 도로보수 공사 하진 말아야"

우리의 일상용어 가운데 우리 국민 모두의 일반적인 생활정서에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는 어휘가 둘 있다. 그것은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정계, 재계, 학계, 언론계, 문화계 등 등, 사회의 모든 주요 분야의 생활양식에도 빈틈없이 골고루 적용되는 ‘범 민족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그 어휘는 바로 ‘일망타진’과 ‘속전속결’이다. 우리 국민 모두는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일망타진하지 않고서는 직성을 풀지 못하는 존재들인 듯하다. 우선 가까운 곳부터 훑어보기로 보자.


◆ ‘원조 즉석 다이어트 뻥튀기’

물론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 대부분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이른바 ‘당일치기’라는 정겨운 생활철학에 탐닉해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아무런 사전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시험 전날 ‘벼락치기’ 식으로 대충 시험 공부를 해치우고서는, 시험장에서는 으레 ‘운명’에 모든 걸 맡기는 한국적 숙명론을 익혀왔다는 말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갈고 닦는 이러한 범국민적 습속이 어떤 형태로 사회적으로 발전하게 되겠는가? ‘속전속결’ 정신 아닐까?

하기야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말로는 그럴 듯이 떠들어대면서도, 교육정책이란 게 영화장면처럼 졸속으로 뒤바뀌고 교육부 장관도 계절풍처럼 경질되는 나라이니 오죽 하겠는가. 몇 년 전 열린 적이 있는 ‘해외이주·이민 박람회’ 및 ‘해외유학·어학 박람회’ 장은, 마치 유명 가수 공연을 기다리는 10대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30-40 대의 행렬로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심지어 ‘한총련’이라는 단체까지 결성되었다고 전한다. 물론 운동단체는 아니다. ‘한시적 총각들 연대 모임’일 뿐이다. 다만 부인과 자녀들을 미국 등지에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보낸 후 조그만 집을 얻어 자취 생활을 하면서 버는 돈을 몽땅 해외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혼자 남은 남편들이 구성한 일종의 친목단체라 한다. 이를테면 돈 버는 기계들의 신세타령조 회합인 것이다. 이는 분명코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될 기괴한 이산가족 풍속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한국 교육은 부도났다”고 목청을 돋운다. “한국 교육이라는 난파선이 가라앉는데 어찌 그냥 가만히 있다 죽으라는 말이냐?”고 이들은 항변한다. 심지어 ‘교육 엑소더스’라는 새로운 말까지 만들어졌다 한다.

하기야 오죽 했으면 대통령 선거에까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등장했겠는가. 아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감히 대통령에 출마하는 후보도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끼던 선거 구호였다.

다른 한편 우리만큼 ‘조상’을 잘 찾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뭔가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상 탓’이라고까지 둘러대곤 하지 않는가. 어쨌든 ‘조국 근대화’를 목청껏 외쳐댔지만, 이른바 관혼상제 처리하는데 여태껏 유교적 조상 숭배 정신이 김치 속처럼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다. 하기야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까지 선거에 대비하여 풍수지리를 좇아 조상의 묘를 이장하는 나라가 아닌가만. 특히 제사 지내는 과업은 묘지 터 잡는 일과 더불어 한 가문의 생명 줄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한때 우리는 제사를 거부한다고 해서 기독교를 얼마나 야만적이라 업신여겼던가. 허나 우리와 주로 기독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서양 백인들 중, 어느 편이 ‘조상 숭배’ 정신에 더 투철할까?

우리는 거의 대부분 특정한 날 하루를 잡아서 대대적인 속전속결 형 성묘 작전을 거행한다. 온갖 차량이 공동묘지로, 묘지로 밀어닥치는 통에 도로는 곧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또 묘지는 거주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래서 1년 중 한식날 하루만이라도 성묘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경우가 물론 드물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일만 있으면 언제나 ‘조상 탓’ 따지는 데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에는 대체로 사는 집 근처에 공원묘지가 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지의 묘소 참배가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요컨대 ‘조상’을 습관적으로 모시며 살고 있는 셈이다. 공원묘지는 매일매일이 꽃밭이다.

과연 어느 쪽이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쌍놈’이라 손가락질 받아야 할까?

한번은 아파트 촌 한 모퉁이 양지바른 곳에 진주한 ‘뻥튀기’ 차를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생활철학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이 차에 걸린 현수막에는 ‘원조 즉석 다이어트 뻥튀기’라 쓰여 있었다.

이 단순한 구호 한 줄에는 우리 사회의 ‘뻥튀기’ 속성이 냉엄하게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터무니없는 과장 벽과 겉치레 숭상주의가 이처럼 언제나 즉석불고기처럼 순식간에 만들어지곤 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꾸준히 제일 잘 팔리는 책의 하나는 요리 책인데, 뒤질 새라 그와 더불어 함께 잘 나가는 책이 바로 다이어트 책이라 한다. 허나 우리의 다이어트 광신주의는 균형 잡힌 정신적 몸매보다는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보이기를 열망하는 우리들의 형식주의적 스타일 단련법의 산물은 아닐는지. 우리는 ‘체력’이 아니라 ‘체형’만을 문제 삼는 건 아닐까.

조상 잘 찾는 우리는 또 언제나 ‘원조’를 숭상해마지 않는 민족 아닌가. 어찌 되었든 ‘원조’란 것을 겉으로 내세워야만 권위가 서는 모양이다. 예컨대 나란히 붙어 있는 식당들이 ‘진짜 원조 집’, ‘원조 중의 원조’, ‘나도 한때는 원조’ 등등의 간판들을 내걸고 마치 열병식이라도 하듯이 서로 경쟁적으로 도열해 있는 광경이 어찌 낯선 것이기만 하겠는가.

어쨌든 이 단순한 ‘원조 즉석 다이어트 뻥튀기’ 구호가 어쩌면 이리도 우리의 ‘일망타진과 속전속결 정신’을 발산하고 있는지.


◆ 비빔밥과 컵라면

뿐만 아니라 식당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쏜살같이 대령하지 않으면 우리처럼 즉각적으로 거칠게 반응하는 국민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컨대 뷔페식당은 ‘일망타진’과 ‘속전속결’이라는 우리의 범국민적 근성에 가장 성공적으로 부합한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먹고 싶은 것을 즉각적으로 가져다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꺼번에 온갖 종류의 음식을 송두리째 해치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아닌가. 우리 국민의 생활정서에 그대로 영합하는 이런 유형의 식당이 어찌 성공하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 중에도 이러한 관행에 들어맞는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비빔밥을 일망타진형이라 한다면, 근래에 개발된 컵 라면은 ‘속전속결형’의 귀여운 사례라 이를 만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말 중에도 지극히 애매하게 ‘일망타진형’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적잖다. 예컨대 ‘시원섭섭하다’라는 말이 그 사람이 떠나서 후련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몹시 아쉽다는 표현인지 분명치 않다. 시큼달큼, 들락날락, 붉으락푸르락, 오락가락 등의 표현도 비빔밥처럼 말의 본뜻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어디 이뿐인가. 말 한마디를 해도 극한 용어를 주어 섬기지 않으면 사람들의 미미한 관심조차 끌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가 일상적 ‘전투태세 완비’ 쪽으로 극렬해졌다. ‘가격 파괴’, 얼마나 으스스한 말인가. 정부에서 솔선해서 외쳐댄 구호도 있다. 예컨대 ‘범죄와의 전쟁’이 그것이다. ‘온통’, ‘왕창’, ‘몽땅’, ‘깡그리’, ‘싹쓸이’라는 수식어를 얹어가며 “끝내준다, 끝장낸다, 죽여준다, 엄청나다, 기똥차다, 까무러치다, 댓길이다” 등등의 서술어가 예사롭게 쓰이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거리를 걸으며 보도의 블록이 제대로 깔린 곳이 몇 군데나 되는 지도 한번 자세히 살펴볼 일이다. 여기저기 이가 빠져 있음은 물론이고 곳곳이 뻐드렁니처럼 울퉁불퉁 솟아나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땜질하지 않은 아스팔트가 어디 한 군데나 있는가. 독일이나 일본 같은 곳에서는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 아주 두텁게, 그것도 오랜 시간을 공들여 아스팔트 콘크리트를 까는데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나무껍질처럼 후닥닥 겨우 손 한 뼘 될까 말까 할 정도를 쏟아 붓고는 서둘러 일을 끝낸다. 그러나 도로개통식은 노벨 수상식장처럼 화려하게 꾸며진다. 물론 개통식 다음 날부터 새롭게 단장한 아스팔트길은 곧장 누더기를 걸치기 시작하는 통에 곧바로 보수공사로 들어가지만.

고지점령 식 밀어붙이기와 임전태세 완비 식 군사문화가 사회 전반을 갉아먹고 있는 동안, 속은 곪아 가는데 겉만 번지르르 해 가는 ‘속전속결형’ 형식주의가 굳건히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박호성(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2. 22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