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묵은 쑥 찾지말고 오늘 만들어 3년후 쓰자"

다른 한편 외국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린다”고 꼬집어댔다. 말하자면 뭐가 좀 잘 풀리는 듯싶으면,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아예 일찌감치 서둘러 축배부터 터뜨린다고 손가락질해댄 것이다. 결국 이 예언은 적중하여 한국은 얼마 전 이른바 ‘IMF 동란’이란 것으로 신음한 적이 있다. 그러나 IMF로 끙끙대다가도 경기가 조금이라도 반짝 한다 싶으면 우리는 금세 번쩍 하곤 했다. 그리하여 외국 여행이니 골프 관광이니 하며 또 떼거리로 몰려나가 즉흥적인 낭비와 사치를 일삼는 데 주저하지 않는 국민이 바로 우리 아닌가.

우리의 정치 세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특정 계층이나 사회집단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는 정당이 없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정당들이 모든 계급과 이해 집단을 총망라하여 자기편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벌에서부터 지식인, 노동자, 상인, 달동네 주민들까지가 몽땅 그들의 지지기반 및 옹호 세력으로 둔갑한다. 가히 일망타진형이다. 그런 와중에 최근 예외적으로 민주노동당이 약진하여, 정치권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정당의 존립 기간은 개 한 마리 수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속전속결형’이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선거특수용 정당들이 비 온 후의 죽순처럼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선거가 국민통합이 아니라 국민분열의 도구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일문제에 대한 접근방식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망타진과 속전속결이 난무한다.

우리는 통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토론한 적이 없다. 통일의 개념과 본질에 관한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연히 통일의 방안들만 무작정 활개 치는 딱한 실정만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의 본질과 기본원칙에 대해 서로 충분히 동의하는데도 제시되는 방법들만 달라지는지, 또는 서로 다른 통일의 모형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방안들이 그토록 차이가 나는지 하는 것 등에 관해 거의 한번도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졸속적 ‘통일의 방안’ 제시가 아니라 신중한 ‘방안의 통일’ 노력이 더욱 긴급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략히 말해서 통일이란 민주주의와 자주성의 토대 위에 구축되는 국토와 민족의 평화적 재통합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주화와 평화를 동시에 그리고 가장 확실히 보장해줄 수 있는 통일방안만이 모든 민족구성원이 동의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임은 자명하다. 어쨌든 장구한 시간과 엄중한 토론을 요하는 통일문제에까지 우리의 속전속결 정신은 유감없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셈이다.


■ '후딱후딱' 이데올로기

여우도 물을 건너려 할 때는 먼저 그 꼬리부터 물 속에 담가본다고 한다. 비슷한 목소리로 시경(詩經)은 “시작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도 끝맺음을 잘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읊고 있다. 명심할 일이다.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맺기는 어려운 법이다. 예컨대 과연 그 누가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황홀한 ‘시작’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그 누가 도대체 그의 비참한 ‘종말’을 모방이나 할 수 있겠는가. 결국 DJ(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또 하나의 다른 김 대통령의 운명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사막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샘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그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면, 삼 년 묵은 영험한 쑥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삼 년 묵은 쑥을 허둥거리며 찾아 나서기만 하지, 그걸 오늘 당장 만들어서 삼 년 후에 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늘부터 바로 시작할 일이다.

지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정략적인 면 때문에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거구호 중의 하나는 바로,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김대중 후보의 외침이었다. 하기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태연히 대통령 후보로 나설 배짱 좋은 사람이 이 지구 위 어디엔들 있을 수 있겠는가만, 가장 높은 자리라는 대통령 직책을 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하다면 우리들 밑바닥 인생들에게는 그보다 수 천 수 만 배의 준비가 필요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허나 도무지 그렇지 않다.

특히 8·15 이후 우리 사회를 줄기차게 지배해온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빨리 빨리, 그러나 아무렇게나’ 정신일 것이다. 이러한 ‘졸속의 원리’는 조그만 도로공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나라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그 귀엽고 조그만 사례에 지나지 않을 정도다.

바로 이러한 ‘대충대충’과 ‘후딱후딱’ 이데올로기가 바로 우리의 정치이념이자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었겠는가. 우락부락한 한탕주의가 또 그 옆자리에 근엄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100여 년 전에 일본 사람이 만들어놓은 한강대교와 충무 해저터널은 아직도 끄떡없이 건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현 한나라 당 대변인으로 변신한 전여옥 대변인이 과거에 쓴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독서 시장을 휩쓸게 만들었던 우리의 전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골인' 지상주의만 판쳐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골인 지상주의’만을 높이 기려왔다. 그리하여 골인 이후에 어떤 꼴사나운 일이 벌어지든 그건 운수소관에나 맡길 일로 치부되었다. 가령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려도 그것은 재수 없어 터지는 사고쯤으로 너그럽게 이해되곤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편리한 민간요법을 몸에 익힌 지 오래인 것이다. 요컨대 ‘삼풍백화점’은 재수 없어 무너졌지만 다른 건물은 멀쩡하니 그만해도 다행 아닌가 하는 말이다.

특히 ‘아랫것들’에게는 홍수 같은 불행이 워낙 끈질기게 혀를 날름거리니,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걸 이겨낼 수 있겠는가. 정부도 돌봐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자조가 일상화되어 있을까만.

세상에 믿고 기댈 건 없고, 오로지 자신을 스스로 달래고 위로하는 게 가장 믿음직스러운 삶의 지혜로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불행이 그 정도로 멈춰 서서 우리를 봐준 것만 해도 하늘의 지극한 보살핌 아니겠는가 하는 위로와 체념의 화법이 유일한 길동무인 것이다. 허나 그 와중에 우리는 큰 불행에 대해서는 쉽게 체념을 하지만, 조그만 기쁜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역설을 배우기도 했다. 유장(悠長)하고 깊은 흐름보다는 짧게 솟구치는 단말마 같은 행운이 높이 숭상 받았다. 돈을 벌어도 한목에 왕창 벌어야 하고, 망해도 일시에 폭삭 망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최고지상주의, 한탕주의가 이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실존철학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한나라’의 이름을 빈 ‘차떼기 당’이 출현한 것이다.

약도 ‘만병통치약’이라야 한다. 아울러 사회적 ‘싹쓸이 수법’이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준비체조도 없이 바다에 먼저 뛰어들어 해수욕하기 시합을 벌이기 일쑤다. 사회적 심장마비 증세가 도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기적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컨대 IMF는 역사적 심근 경색증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이러하니 교회나 술집이 조용할 리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술집과 교회가 ‘동시에’ 크게 번창하는 신기루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교회가 늘면 술집이 당연히 줄어야 일리가 있고, 반대로 술집이 늘면 교회가 줄어들어야 정상 아니겠는가. 하지만 술집과 교회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그토록 늘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밤에 어디 서울의 낮은 언덕에라도 한번 올라가 보면 금세 분명해진다. 서울은 마치 적화된 도시처럼 온통 붉은 불빛으로 물들어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유난히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붉은 네온사인으로 휘감긴 십자가와 술집들의 휘황찬란한 선전탑들이다. 교회가 많이 들어섰다고 어떤 사람은 참으로 건강한 사회풍조라고 찬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교회에서의 기도라는 것은 사실상 하느님이 뭔가를 대신 실행해주어야 한다는 주문일 수 있다. 교회와 술집의 증가비율은 그대로 사회적 불안의 심화속도와 맞물려 있다. 대체로 교회는 우리에게 관념적 정신세계로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술집은 물질적 관능세계로의 탈출구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정당한 분노의 정상적인 폭발은 손쉽게 차단당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비참한 현실을 잊으라고 강요당하는 셈이 된다.

어쨌거나 한국의 20세기는 ‘대한독립만세!’와 ‘굳세어라 금순아!’로 단근질 당해왔다. 허기야 밖에서 오는 다른 민족의 착취와 간섭을 물리치고, 또 안에서는 두 손을 움켜쥐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겠노라고 발버둥치며 살아온 세월 아니었던가. 그 와중에 ‘안에서의 자유’는 온갖 방식으로 폭행당하기만 해왔다.

하기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해보지도 못한 나라의 백성인 탓으로 제몫 챙기기 운동을 스스로 전개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자기 한 목숨이라도 부지해나가기 위해서는 속전속결로 일망타진해야 하지 않았을까. ‘야반도주’와 ‘줄행랑’을 일삼지 않으면 안 되었던 우리들 아닌가.

박호성(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2. 2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