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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3)

앞에서 인류의 기원 및 전파에 대해서 설명하고 한국인은 북방계와 남방계의 두 부류가 섞여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70만 년 전 즉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유적(북한은 인골화석을 재측정한 결과 100만 년 전으로 설명)과 충북 단양 금굴의 유적을 비롯하여 계속적으로 인류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원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한민족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설명] 루시 인골.


일반적으로 원인들은 인류 진화 발전 과정에 따라 고인으로 발전했는데 고인들은 대체로 제4기 중부 홍적세 후기(약 20만~30만 년 전)부터 중기구석기시대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들은 약 5만 년 전인 후기구석기시대에 신인으로 바뀌며 약 1만 년 전에 비로소 현대 인류의 선조들이 태어났다고 인식한다.

마법의 무기로까지 일컬어지는 유전자 분석의 등장으로 인종이라는 구분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이라는 외형적 특징은 분명히 존재하며 한국인은 황인종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몇 십만 또는 몇 만 년 전 적어도 현대 인류가 등장했다는 1만여 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선조들도 우리와 같이 황인종일까, 황인종이라고 해도 수많은 지류가 있는데 과거에도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가도 궁금한 사항이다.

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지적한다. 우선 증거를 찾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몇 만 년, 몇 십만 년 전에 살아있던 인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면 단 몇 년도 안 되어 모두 육탈되고 뼈만 남게 된다. 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매장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00년을 넘지 않는다. 400~500년 전의 미라가 발견되어도 언론 매체가 대서특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물며 1만 년, 10만 년, 100만 년 전의 뼈를 수습하여 연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첨단과학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인골 화석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인골 화석이 어떤 연유로든 지표면에 나온 것을 발견하거나 인골 화석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을 예견하여 인내를 갖고 발굴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석은 일단 지각 변동 등으로 지표면으로 노출되더라도 2~3년 내에 발견되지 않으면 부식되거나 완전히 파손된다. 그러므로 고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화석이 발견될만한 곳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방문하여 관찰한다.

아프리카의 올드바이 계곡에 수많은 고인류학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그 지역이야말로 가장 많은 고인류화석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또 학자들의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인류화석도 발견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사진설명] 올드바이 계곡.


■ 석회암 지대에서 화석 발견

1974년 미국의 고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이 대학원생인 조수 탐 그레이와 에티오피아 아파르 삼각지의 한 지점인 하다르에서 수십 개의 뼈 조각을 찾아냈다. 하다르는 아프리카 동부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에 속하는 곳이다.

고인류학자들은 대개 치아 하나, 뼈 한 조각만 찾아내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두개골의 일부라도 발견하면 복권이 당첨된 것보다도 더 어려운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완전한 골격의 거의 절반 가량이 되었다. 이는 가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선 골반 뼈로 보아 여자의 뼈였는데 키는 90센티 정도였고 나이는 20살 정도였다. 이 유골이 바로 약 300~320만 년 전에 살았던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과도기적 생명체로 현대 인류의 조상으로 추정하는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다. 고인류학자들이 루시의 발견에 그렇게도 환호한 것은 그렇게도 찾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몇 백만 년이나 되는 인류 진화상의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를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뇌가 작고 턱도 뾰족했다. 생김새는 원숭이와 비슷했지만, 치아는 인간과 거의 비슷하고 호수 근방에 살았다. 무릎 관절로 미뤄봐서 루시가 침팬지보다는 사람에 가까우며 뛰기보다는 걷기에 편했던 골반과 두개골구조를 갖췄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균적으로 여자는 몸무게가 약 28~30킬로그램, 키가 100~120센티미터였고, 남자는 몸무게가 40~55킬로그램, 키가 120~135센티미터 정도였다.

루시 다음에는 약 150~250만 년 전에 ‘호모 하빌리스’가 출현하며 18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중국, 자바에서 발견되며 70만~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동굴에서 살았던 것도 호모 에렉투스이다.

다음에는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특징을 가진 두개골이 발견되는데 네안데르탈인이 그들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유럽, 중동 지방에 특히 밀집하면서 구세계에 널리 분포되었는데 인구수도 몇 십 만 또는 몇 백 만에 달했다고 추정한다.

그 후 15만~20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크로마뇽인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계통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계통도가 그려질 수 있는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네안데르탈인(좌)과 크로마뇽인(우).


루시를 비롯하여 몇 백 만 년, 몇 십 만 년 전에 살았던 생명체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학자들이 구석기인들의 뼈를 찾아낸 장소는 모두가 석회암동굴이다.

석회암 지대에 침수된 지하수는 석회암 속의 가용성 물질을 용해시키기도 하고 결정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석회암으로 된 장소에 시체가 묻히게 되면 석회암이 녹으면서 형성된 광물질이 많은 지하수나 물기가 계속 유골에 작용하여 뼈세포 속에서 광물질이 석출되어 그곳에 채워지고 또 삭아 없어지는 빈자리에도 광물질이 들어가게 된다.

또 분자 수준에서 유골과 광물질 사이의 자리바꿈도 진행된다. 이 경우 유골은 돌과 같이 굳어지면서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며 부패작용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외력에 대해서도 저항력이 강해지므로 상황에 따라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고인류 화석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질 좋은 석회암이 나온다는 것은 한국이 세계적인 시멘트 생산국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인골이 발견된 곳은 무려 10여 군데나 된다. 앞에서도 약간 설명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에 대해 설명한다.


■ 계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 화석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은 2002년 4월에 함북 화대군 석성리의 5개의 화산용암 속에서 발견된 여자와 미성년, 어린이 등 3인의 머리ㆍ골반ㆍ대퇴ㆍ팔뼈이다. 이를 ‘화대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열형광법으로 절대 연도를 측정한 결과 화석의 주인공은 거의 30만 년 전에 살던 인류라고 발표됐다. 이 화석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최초의 고인이 출현한 발생지의 하나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화석으로는 스페인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의 아토푸에르카가 인정되었으며 중국의 경우 가장 오래된 고인은 13만~18만 년 전의 것이다. 특히 화대사람은 화산 용암 속에서 인류화석이 발견된 첫 번째 예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인류화석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1972~1973년,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의 아래층에서 ‘덕천사람’이 발견되었고 1977년 9월에는 평양 력포구역 대현동 동굴에서 ‘력포사람’이 발견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70만 년 전 즉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는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동굴유적과 충북 단양 금굴의 유적으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인골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검은모루동굴은 인골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이다. 검은모루유적은 상원읍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흑우리(黑隅里)의 낮은 산인 우문봉 남쪽 비탈에 있는데 1966년 석회석을 채광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29종의 동물화석과 구석기인의 타제석기(打製石器)가 발견됐는데 정밀조사는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동물화석 중에는 곰ㆍ멧돼지ㆍ승냥이 같은 수풀지대 짐승과 원숭이ㆍ물소ㆍ큰쌍코뿔이 등 열대지방 동물 뼈도 있었다. 이는 당시 기후가 아열대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더욱이 29종 중 17종은 이미 멸종된 것이다.




[사진설명]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해방 후 북한을 포함하여 한국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평가된다.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음을 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남한에서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ㆍ충남 공주시 석장리 등 30여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지만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먼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자 그들은 식민사관을 조장하기 위해 한국에는 구석기가 없다고까지 왜곡했다. 그런데 검은모루유적이 이를 통쾌하게 극복케 만든 장본인인데다가 한국의 역사를 무려 70만~100만 년 전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70만 년 전이라면 유명한 북경원인(北京猿人)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호모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다. 검은모루유적이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여하튼 검은모루동굴에서 인골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므로 한국인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한참 후대로 내려가야 한다.

바로 력포사람이다. 력포사람은 한 개체분의 머리뼈(앞머리뼈, 윗머리뼈, 옆머리뼈)가 발견되었는데 7~8살 정도의 어린아이이다. 이마가 낮고 넓적하여 뒤로 제껴진 것은 원인이나 고인 단계의 인류 특징이다. 뇌수의 앞머리 부분이 잘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마가 몹시 낮은데 북한은 력포사람을 상당이 앞선 시기의 고인이라고 추정한다.

력포사람보다 약간 일찍 발견된 덕천사람은 오른쪽과 왼쪽 어금니, 오른쪽 어깨뼈가 발견되었다. 이빨은 크지 않고 치관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현대인에게는 자주 볼 수 없는 유형을 갖고 있는데 이는 고인들의 이빨에서 볼 수 있는 원시적인 특징이다. 반면에 어깨뼈는 고인임에도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덕천사람은 고인의 특성과 현대 한국인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추정한다.

다음은 평남 덕천시 승리산 동굴에서 발굴된 ‘승리산사람’이다. 승리산사람은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는데 같은 덕천에서 발견된 ‘덕천사람’보다 윗층에서 발견되어 년대가 많이 떨어지는데 약 4만〜5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

유골은 35살 정도의 중년 남자로 아래턱뼈가 원인이나 고인에 가까운 높이를 갖고 있다. 이것은 후기구석기시대의 신인 단계이지만 아직도 원시적인 특징이 채 가시지 않은 현상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승리산 사람은 아래턱뼈가 높은데도 이음부의 높이가 턱구멍 부위의 높이보다 낮다. 이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씹는 기능의 약화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매우 진보적인 형태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북한은 아래턱뼈를 기본 자료로 신인의 얼굴을 복원했는데 학자들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승리산 사람은 슬기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으로 주장된다. 이같은 주장은 승리산사람 얼굴 특징에 나타난 높은 머리와 넓은 하관부가 오늘날 한국인 특징의 일부로 남아있다는 데서 나왔다.




[사진설명] 덕천시 승리산 유적지.


■ 장례의식에 따라 매장된 흥수아이

남한의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도 승리산과 거의 동시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를 ‘흥수아이’라 부른다.

1983년 발견자인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흥수아이는 약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신인이라고 추정한다.

흥수아이에 대한 체질인류학분석결과 5살 때 이 동굴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아이의 머리 크기는 1200~1300㏄,키는 110~120센티미터 정도이다. 특히 뒤통수가 튀어나와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짱구형이며 아래턱도 둔탁하게 보인다. 머리뼈를 잰 결과는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흥수아이가 특별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흥수아이가 장례 풍습에 의해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1983년 발굴 당시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후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주검을 아무렇게나 마구 버리지 않고 고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뜻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흥수아이의 주검 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꽃가루 분석에서 국화꽃가루가 가장 많았는데 학자들은 흥수아이가 죽었을 당시 국화꽃이 주검 주변을 치장한 장의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상당히 높은 지대인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화꽃은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꺾어왔다는 추정이다.


[사진설명] 흥수아이 청동상.


또한 동굴 입구 한쪽 모서리에서 많은 양의 진달래꽃가루가 채집되었다. 진달래는 본래 호산성식물인데 두루봉 일대는 알칼리성 토양으로 되어 있다. 학자들은 두루봉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이당시 이미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심미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장례용으로 꽃을 사용했다고 인식한다. 물론 국화꽃이 가을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흥수아이가 사망한 시기도 가을로 추정했다.

고인류학계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을 중요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면모도 발달하여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풍습도 가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무스티에 유적지에는 10대 소년이 옆으로 누워서 머리를 팔위에 얹어 놓은 상태로 매장되어 있었다. 그의 손 옆에는 훌륭한 돌도끼 한 개가 놓여 있고 소의 뼈가 둥그렇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년의 사후에 있을 여로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에 놓여진 것이었다.

특히 이라크의 샤니달 동굴에서 발견된 인골은 40세 정도의 남자인데 다리가 접히고 구부러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인골 주위에서 접시꽃, 푸핀, 엉겅퀴, 무스카리 등을 비롯한 많은 꽃가루 화석이 발견되었다.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는 마음을 간직했다는 사실은 시체를 정성스럽게 묻었다는 것으로 원시인의 이미지를 근본부터 뒤덮는 일이었다.

체코의 한 고분에서는 시체 위에 돌로 만든 보호층 아래 14개의 인골이 있었는데 이들 시신은 내세에서도 계속 가깝게 지내겠다는 뜻에서인지 서로 붙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모라비아의 한 고분에서는 매머드의 거대한 견갑골 밑에서 여자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시신 위에 적색의 황토가 소량 뿌려져 있었다. 생명을 주는 혈액으로 추정했을지도 모르는 적색 황토는 유럽 지역의 여러 고분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주로 웅크리거나 자궁 속의 태아 모습으로 수습된 시신 위에 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북한의 고고학자들이 흥수아이를 그토록 열광한 이유는 고고 인류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풍습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뼈화석을 자료로 얼굴을 복원했는데 이 얼굴을 보면 매우 귀여운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한반도에서 유럽인도 발견

1979~1980년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에서 약 2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이를 ‘만달사람’이라 부르는데 보존 상태가 좋은 머리뼈와 아래턱뼈가 함께 발견되어 학자들을 기쁘게 했다.

앞머리뼈에는 현생 인류에게서만 찾아지는 화살융기도 들어있었고 턱구멍이 현대인처럼 낮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가공한 흔적이 뚜렷한 석기 13점과 함께 뼈나 뿔로 만든 골기가 발견되어 만달인은 후기구석기의 신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달사람은 사망할 당시의 나이를 25~30살 정도로 추정하는데 북한은 건장한 용모의 청년으로 만달사람을 복원했다.

그런데 만달사람은 전형적인 장두형이다. 신인단계에서 장두형의 특징은 아시아지역의 신인인 산정동인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들과 다소 다른 점도 발견된다. 머리뼈의 너비가 매우 넓다는 점인데 머리뼈의 넓이가 넓다는 것은 한국인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장두형에 속하는 만달사람은 단두형의 특징을 지닌 고유한 한국인의 모습으로 정형화되기 시작하던 초기의 징표로 인식한다. 이러한 특징은 보다 후대로 추정되는 신인인 ‘룡곡사람’에서도 발견된다.

1980년,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의 여러 석회암동굴에서 상당히 많은 신인의 화석이 나왔는데 이를 ‘룡곡사람’이라고 한다. 특히 룡곡1호 동굴에서 보관 상태가 매우 좋은 2개의 머리뼈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머리뼈는 그 높이가 매우 높은 반면에 얼굴뼈 높이는 중간정도이다. 이들 역시 장두형에 속한다. 룡곡사람 역시 만달사람처럼 한국인의 옛 모습이 형성되던 초기시대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학자들은 동아시아의 신인들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동북아시아형으로 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이다. 둘째는 황화와 장강유형으로 산정동인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견된 신인화석이다. 산정동인에게는 태평양에서 발견되는 남부계열의 특징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유형인데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서 발견된 신인의 화석이 이 유형에 속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에 가까운 특징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되는 신인들이 동아시아의 다른 신인들과 구별되는 일련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선조들이 극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유형을 이룰 수 있는 환경에서 진화되었다고도 추정하는 것이다.

시대를 건너뛰어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간다. 1986년부터 1990년 함경북도 회령시 남산리 검은개봉에서 매우 빠른 시기의 청동기시대 6개체분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1930년대 말에 이미 4개의 머리뼈가 발견되어 모두 10개체분이 발견된 셈인데 그중 남자가 7개, 여자가 3개이다.

머리뼈지수에 의하면 남자는 좀 큰 편으로 중두형에 속하고 여자는 아주 큰 축으로 전형적인 단두형이다. 이것은 검은개봉의 주민들이 의심할바 없이 현대 한국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은개봉유적을 남긴 주민들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중국동북지방에서도 발견된다. 기원전 2000년~1000년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요령성 심양 부근의 정가와자유적과 길림시 서단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가와자와 서단산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현대 북중국인이나 앙소문화인, 은대 안양부근의 서북강유적 주민들과도 뚜렷하게 구별되며 고대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정가와자의 머리뼈는 짧고 높은데 이것은 검은개봉 유적을 비롯하여 현재 한국인에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이들 지역은 현재 중국 영토이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지역이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황석리 13호 인골은 국내학자들을 괴롭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인골을 분석한 서울의대 나세진 박사는 인골의 신장이 약 174센티미터이며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두개지수(頭蓋指數, Sephalic Index)가 66.3으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이다.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두개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이다. 그러므로 황석리 인골의 두 개지수가 66.3이라는 것은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김병모 박사는 기원전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서대의 조용진 박사가 인골들의 두개골을 복원했는데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았다. 조 박사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 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데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황석리의 인골만 갖고 서양인으로 확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유태용은 지금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고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골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뼈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튼튼한 것들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지배층은 평민들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사실상 과도한 노동력을 하면 어깨뼈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은 특별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장두형에서 단두형으로 변형된 한국인

북한에서 3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대사람, 10만 년 전의 력포사람, 덕천사람, 4만~5만 년 전의 승리산사람, 2만 년 전의 만달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을 70만
~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 동굴에서 살았던 원인(호모 엘렉투스)으로부터 일관하게 진화하여 나온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논지는 간단하다. 한국인은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단일 민족으로 한국인의 원류가 잘 알려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부터 유입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발상지는 우리나라로 소위 ‘다민족기원설’에 의거한 ‘본토기원설’을 주장한다.

한국인이 북방인과 남방인의 두 갈래로 섞여있으며 남방인이 20~30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북한측도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에 많은 반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측에서 본토기원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북한측은 두 가지 면에서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한다. 하나는 평양 유역에서 발견된 신인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과 연결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고유한 특징이 평양 유역에서 발굴된 신인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발견된 신인들의 대뇌피질의 앞머리부가 고인과 유사성을 보이므로 고인이 력포사람의 직계선조라는 설명이다.

한국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든지 일반적으로 얼굴의 높이는 중간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머리뼈 높이는 상당히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특징이 용곡사람과 만달사람에서도 발견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북한의 본토기원설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 단두형인데 신인단계의 유골에서 단두형이 아니라 장두형의 머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장두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진설명] 충북 단양 금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


‘화석인류단계의 머리뼈들은 예외 없이 장두형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시대가 오래될수록 원시적인 특징이 많기 때문이다. 눈확부와 뒤통수부의 뼈주름이 발달되어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머리뼈 길이가 길어지므로 자연히 장두형에 속한다. 평양 일대의 신인들도 장두형에 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인의 단두형은 단두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경우 과거로 올라갈수록 머리뼈 길이가 길어져서 장두형에 속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그와 반대로 현대로 내려오면서 단두형이 비율이 많아진다. 그런데 신인과 조선옛유형사람, 현대한국인의 머리뼈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머리뼈 형태를 규정하는 개별적인 요소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현대 한국인의 머리뼈 형태는 상당히 단두화되어 장두형은 고작 5~6퍼센트로 추정한다. 그런데 과거로 올라갈수록 장두형이나 중두형의 비율이 높아진다. 함경북도 회령시 검은개봉유적의 10개체 머리뼈도 단두형이 4개체이고 6개가 장두형과 중두형에 속한다. 송평동유적에서 발견된 4개체의 머리뼈도 단두형이 2개체, 중두형이 2개체였다. 이것은 과거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머리뼈의 길이가 길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장두진은 설명했다.

사실 상당히 후대로 볼 수 있는 유명한 안악 3호분,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고분,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고분, 강원도의 신라무덤 등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모두 단두형에 속한다.

더욱이 한국인의 특징인 단두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소하다는 점도 북한측은 강조한다. 아시아에서는 동북아시아 일대와 중앙아시아, 유럽에서는 스위스 일대의 알프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서만 단두형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주위는 모두 장두형이다.

물론 고인인 력포사람, 덕천사람에서 신인인 승리산사람, 만달사람들을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지적도 있다. 구석기인들은 자연환경변화나 사냥거리에 따라 빈번히 이동했다. 비록 후기구석기인들이 전·중기구석기인들 보다는 좀 더 붙박이 정착생활 쪽을 택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선주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는 중국 측은 이런 주장을 매우 공격적으로 반박하면서 북한측의 주장을 두둔한다. <중국사회과학원> 왕웨이의 글을 인용한다.

‘서양의 구석기 문화를 보면 약 10만여 년 전 어떤 곳에서 기하형의 세석기들, 예를 들면 삼각형기ㆍ신월형기ㆍ제형기 등이 출현하며, 2만 년 전에는 더욱 정밀한 기하형의 세석기가 출현했다. 그 당시에 이런 석기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구석기 문화 중에서는 이런 기하형의 세석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세석기 제작 기술의 흔적도 없다. 이런 차이점은 중국의 구석기 문화와 서양의 구석기 문화가 서로 다른 문화 계통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왕 교수는 아프리카가설에 의하면 ‘아프리카 이브’의 후예들이 중국으로 옮겨왔을 때 분명히 그들이 갖고 있던 선진 석기 제작기술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석기들을 가져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구석기 문화는 격변을 맞이해야 하는데도 중국에서 3만여 년 전 신인(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어떠한 변화의 징조가 없으며 중국 구석기 문화가 중단된 적도 없다. 적어도 외래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현상도 없는 것을 볼 때 서양의 구석기 문화와 중국 구석기 문화는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위의 설명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한국인의 기원과 연계되지만 다소 다른 면도 있다. 중국에서는 북경원인이 현대 아시아인의 주류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큰 틀에서 ‘다지역기원설’을 지지하면서도 북경원인이 한국인의 원류라고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민족이 형성 되었다는 가설을 감안한다면 매우 작은 양의 인골을 토대로 과거 한민족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관성 있게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보다 많은 인골이 발견되면 한민족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2. 28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2-28 18: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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