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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장경각 (2)

■ 천혜의 보관장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은 해인사이다. 이 절은 순응(順應)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가야산에 창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가 있었으며 성종 19년(1488년)에 인수(仁粹), 인혜(人惠) 두 왕대비가 절의 중건을 도와 대장경판당(大藏經版堂)을 비롯한 대적광전과 여러 당(堂)과 요(療) 등을 세웠다. 그후 숙종 21년(1695년)부터 고종 8년(1871년)에 이르는 176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였고 현대의 해인사 모습은 순조 18년(1818년)에 중건된 것이 근간이 되고 있다.

해인사를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해인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불교종파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12교구 본사로, 조계종에 속한 현대 한국 사찰 중 가장 먼저 총림으로 지정된 절이기도 하며, 동시에 대표적인 한국의 사찰 양식을 보여주는 절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또는 경판전(經板殿)은 법보전(法寶殿)과 수다라전(修多羅殿), 동사간고, 서사간고의 네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안에 팔만대장경과 국보 제206호인 고려각판 2275매가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을 구경하기 위해 해인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는 장경각의 외관을 보고 쉽게 실망하곤 한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들이 그 이름과는 달리 무슨 창고나 헛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또 건물의 사면의 차지하고 있는 나무 격자창살 사이로 지루하게 쌓여있는 경판을 구경하는 데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으니 싱겁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꾸밈이 없고 전혀 과학성이 없게 보이는 공간이 바로 대장경판이 750년이나 아무런 피해 없이 오래 저장될 수 있는 비결이다.

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다. 두 경판전은 1430미터의 가야산 중턱인 665미터 지점에서 남쪽 방향으로 앉아 있는데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은 열려있다. 습기를 많이 머금은 동남풍이 자연스럽게 건물 옆으로 흐르게 하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마치 종묘와 같은 일자집이다. 성종 19년 중건 시 경판당 30칸을 다시 짓고 보안당(普眼堂)이라 하였다. 경판전은 수다라장과 법보전 모두를 뜻하는데 이들은 각각 도리통 15칸과 보통 2칸(건평 165평)으로 합하여 30칸이며 기둥은 108개이다. 이는 108번뇌를 상징함과 동시에 번뇌의 집 속에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을 넣어 둠으로써 번뇌 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김종명 박사는 설명했다.




[사진설명] 법보전과 서사간장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은 법보전(우측)과 수다라장으로 나뉘어져 보관되고 있으며 서사간장(좌측)에는 고려각판이라는 다른 경판이 보관돼 있다.


수다라장은 정면 15칸 중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고 앞면에는 상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곡선으로 된 판재를 고정시켰다. 그 안으로 좌우 양측으로 경판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고 경판을 판가(板架)에 보관하도록 한다. 건물 후면의 개구부는 상하 인방과 문설주만 만들고 문을 달지 않아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평면은 기단 위에 네모지거나 자연석 위에 초석을 두어 앞뒤에 갓기둥(平柱)열과 중앙에 높은 기둥(高柱)열을 배치하였다.

갓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을 두었고 높은 기둥은 네모 기둥으로 배흘림이 없다. 건물의 가구(架構)형식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보관창고로서의 기능을 강조하였다. 높은 기둥 좌우로 걸친 대들보 위 중간부분에 각각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워 종(宗)보를 받쳤는데 높은 기둥의 보머리가 이 종보 중앙 밑을 받치고 있어 더욱 견고한 구조가 된다. 특히 종도리를 받드는 솟을합장(人字形 대공)이 있는데 이러한 솟을합장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건물의 중요한 기능은 경판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환기와 온도 및 습기 제거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건물의 통풍이 잘 이루어지도록 건물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다. 특히 벽면의 아래 위와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 위로 돌아 나가도록 절묘한 건축 기술을 발휘하였다.

즉 건물의 전면 벽에는 양측 기둥 사이에 중방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 위로 두었는데, 아래 창은 폭 2.5미터 높이 1.0미터이고 위의 창은 폭 1.2미터 높이 0.44미터이다. 뒷면은 아래 창이 폭 1.36미터 높이 1.2미터이고 위 창은 폭 2.4미터 높이 1.0미터이다.

이러한 구조는 건물 뒤쪽으로부터 오는 습기를 억제하고 건물 안의 환기를 원활히 하는데 도와준다. 경판가(經板架)는 굵은 각재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설치한 후 경판을 세워서 두 단씩 놓도록 단을 두어 공기 유통이 잘 되도록 하였다.

법보전은 수다라장에서 약 16미터 동북쪽에 떨어져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중앙 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벽을 만들어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경판장에 출입하는 문은 수다라장과는 달리 분합문이 있는 칸의 좌우 양 협칸에 두 짝 판문으로 만들어 출입한다.

건물의 규모와 가구 형식은 수다라장과 같다. 붙박이창도 수다라장과 거의 같은 비율로 적용된다. 건물 정면의 아래 창은 폭 2.4미터 높이 1.0미터이고 위의 창은 폭 1.3미터 높이 0.4미터이다. 뒷면은 아래 창이 폭 1.8미터 높이 0.9미터이고 위 창은 폭 2.2미터 높이 1.1미터이다.




[사진설명] 법보전 환기창과 환기구 아래와 위 창 크기를 달리하여 자연 통풍을 유도했다.


수다라장 앞 벽 아랫부분의 창문은 위에 있는 창문의 약 4배가 되고 뒷벽 윗부분의 창문은 아랫부분의 창문보다 약 1.5배 크다. 법보전의 경우 앞 벽 아랫부분의 창문이 윗부분보다 약 4.6배 크며, 뒷벽 윗 창문은 아래 창문보다 약 1.5배 크다. 이러한 창문 설계는 유체역학과 공기 흐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장경각을 지었음을 증명해준다.

또한 법보전은 뒤쪽 벽 위, 아래 창 전체 면적이 앞쪽보다 1.38배 넓고 수다라장은 뒤쪽이 앞쪽보다 1.85배 넓다. 이는 법보전이 수다라장에 비해 뒤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앞창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내부에 남는 양이 적다는 것을 뜻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김동현 박사는 ‘법보전이 수다라장보다 뒤쪽 계곡에 가까이 있어 주변 습기가 많은 점을 고려하여 공기의 잔량을 적게 함으로써 습기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 간단한 차이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적정 온도도 유지하게 한다. 일례로 경판전 안에서 향을 피워보면 향이 각 전체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판고 전체의 온도도 1.5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더구나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차이가 10~15도를 넘지 않는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 서북 끝과 동북 끝 양쪽에 서로 마주보는 동‧서 사간고는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3량집이다. 이들 건물 역시 수다라장과 법보전과 같이 익공형 주심포계의 집이지만 익공 쇠서가 수다라장과 같이 보머리에 붙지 않고 떠 있으며 벽체 역시 출입을 위한 문과 살창으로 되어 환기를 원활히 하도록 하였다.

바닥은 깊이 땅을 파고 숯, 찰흙, 모래, 소금, 횟가루를 뿌렸다. 비가 많이 와 습기가 차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며 반대로 가뭄이 들 때는 바닥에 숨어 있던 습기가 올라와 습도 조절을 자동적으로 해 주게 되었다. 실제로 대장경을 장기 보존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습도라 할 수 있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판이 썩어 들어갈 위험이 있고 너무 낮으면 갈라질 우려가 있다. 1979년 문화재관리국이 공기조화냉동공학회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판전의 습도조건은 연중 50~70%로 경판을 보관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정밀 조사에 의하면 해인사 주변의 습도는 연중 인근 지역에 비해 6∼1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건대로라면 경판이 썩기 쉽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경판이 온전히 보존돼온 것은 해발 645미터에 있는 판고가 지역적 특성상 3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1킬로미터쯤 북쪽에 위치, 바람이 항상 불어 자연적인 습도 조절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 경판각의 시설 자체가 기막히게 조절 기능을 하고 있다. 현재 경판은 5단으로 된 판가 각 단에 빼곡히 세워져 있는데 이 때문에 밑에서부터 맨 위까지 경판 사이 틈을 통해 바람이 지나면서 골고루 습도를 조절해주는 것이다.




[사진설명] 장경각 내부, 팔만대장경은 습기를 최대한 없애도록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된 건물에 보관됐다.


경판전의 우수성은 신판고의 실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1979년 정부는 상당한 재원을 들여 지금의 경판전과는 좀 떨어진 위치에 신판고를 지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우선 최신 설비를 갖춘 콘크리트 구조의 새 건물로 지어졌지만 경판전과 같은 정도의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유지비용만도 수백 만 원씩 소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의 대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습도 조건이 나빠지자 결국 새 경판전으로는 쓰지 못하고 있다.


■ 세계 최고의 옻칠 사용

경판에 옻칠을 한 것도 장기간 보관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글자를 새기고 교정 작업을 마친 목각판은 표면에 먹물을 칠하거나 콩의 전즙과 송연으로 처리한 뒤 판가에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팔만대장경의 경우 특별히 옻칠을 하였다. 목각판에 옻칠한 것은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칠은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양에서만 발달된 특유의 천연도료로 옻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어 채취한 생옻은 회백색의 액체지만 공기와 접촉하면 갈색으로 변한다.

생옻의 주성분은 옻산이며 그밖에 고무질, 질소질과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 옻산은 효소반응에 의한 3차원 구조의 고분자로 산이나 알칼리에 쉽게 녹지 않으며 내열성, 내염성, 방부성, 방수성, 방충성, 절연성이 뛰어나다.

우리나라 옻나무에서 생산되는 생옻은 세계 최고의 품질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는 옻액의 구성성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산 옻산의 함량은 중국품이 72.5퍼센트 고급품이 83.4퍼센트임에 반해 중국산은 59퍼센트와 62퍼센트, 일본산은 65퍼센트와 71.6퍼센트에 불과하다. 옻산의 농도가 높으면 칠을 할 경우 도막(途膜)이 두껍게 생기고 투명성이나 광도가 좋기 때문이라고 전영우 박사는 설명했다.

옻칠은 나무뿐만 아니라 가죽, 종이, 삼베, 모시, 명주와 같은 천, 금속이나 도기 등에도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무공해 도료로 해저케이블선, 선박, 비행기, 각종 첨단 기기 등에 산업용으로 이용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경판에 옻칠한 방법은 목각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바탕인 소지(素地)를 염색한 뒤 그 위에 다시 안료가 섞이지 않은 생칠(여과와 탈수 등 초보적인 정제를 한 생옻)을 2∼3차례 하였다.

일반적인 목기와는 달리 칠 공정의 일부가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칠 재료의 절약과 일손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판의 특성상 칠막이 지나치게 두터울 경우 양각된 글자의 윤곽이 무디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한다. 조사 결과 칠의 두께는 대부분 55∼65마이크로미터 가량으로 균일하며 칠면을 깎아내기 위해 숯을 사용했다. 옻칠이 벗겨진 마구리 등이 다른 부분보다 훼손이 심한 것으로 드러나 옻칠 자체가 경판 보존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한다.




[사진설명] 대장경 계통도.


7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얼마 전까지 팔만대장경 판은 부패하거나 쥐와 좀벌레가 갉아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 경판 자체가 휘는 일도 없이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태녕 서울대 명예 교수 등 전문가 10여 명이 1994년부터 2년간 실시한 연구 결과 곰팡이 해를 입거나 표면이 갈라진 경판이 다수 발견되어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세로로 심하게 휜 경판이 14%, 가로로 심하게 휜 경판이 30%에 달하였으며 경판의 26%가 금이 갔는데 이 중 금이 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23%나 되어 대장경 판의 보존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대장경 판을 보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제기되었는데, 여기서도 석굴암과 같이 곰팡이 등 미생물에 대한 방제대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 장경각의 환경을 원상회복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강조한다. 장경각의 공기 성분은 오존 20, 일산화탄소 5, 질소화합물 5, 아황산가스 0.1 이하로 모두 환경기준치 이하로 나타났다. 그러나 관람객이 늘어남에 따라 경판에 먼지가 심하게 쌓였으며 특히 바깥쪽 경판의 경우 판각한 글자가 잘 안보일 정도여서 그대로 방치할 경우 먼지가 습기를 머금어 경판이 썩을 우려가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관람 편의를 위해 중앙 통로를 설치한 수다라전의 경우 통로 벽이 통풍을 방해한 데다 온․습도를 변화시켜 보존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동사간전 역시, 습기로부터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창밖에 설치한 비막이 판자가 오히려 통풍 장애만 유발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옥외나 다름없이 허술하게 보이는 환경이 대장경 판을 7백 년 이상 보존해 온 비결임이 입증된 셈이다.


■ 전산화된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의 문제점은 보관에만 있지 않다는데 있다.

조선시대 유일한 호불 군주라고 볼 수 있는 세조는 주요 사찰에 배분할 목적으로 1458년 역사상 가장 많은 50부의 팔만대장경 인쇄를 명했고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간행했다. 팔만대장경은 1963년부터 1968년 사이에도 12부가 인쇄되었다. 이 가운데 4부는 일본, 1부는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교, 1부는 오스트리아, 2부는 영국에 보냈으며 한국에는 4부가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976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48권으로 된 축쇄영인본을 출간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팔만대장경이 한역 대장경 중 최고의 판본이므로 실제로 활용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판본이라는 것은 필사와 활자의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 더구나 팔만이라는 숫자가 드러내듯 분량이 방대하고 한문으로 표기되어 웬만한 전문가라도 그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진설명] 옻나무, 옻칠액은 줄기에 홈을 파서 채취한다(사진 전영우).


그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활자를 발명한 나라라고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활자화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이 1930년대에 100권짜리 '대정신수대장경'을 활자화하자 불교학의 기본 텍스트는 대정신수대장경으로 바뀌었다고 학자들은 아쉬워했다. 역사적인 가치보다도 오로지 활자본이라는 이점 때문이다.

한국의 학승과 불교학자들이 일본으로 유학 가는 이유도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 불교 공부의 대부분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국내에서 번역되고 있는 대장경 대부분이 일본 것을 따른 것이라고 지적되어 팔만대장경의 활용도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불교계에서도 이의 시급성을 인정하여 1997년에는 ‘팔만대장경에 새 생명을-21세기 디지털 팔만대장경을 만듭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곧바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대장경 원본과 현대적 재해석을 거친 한글 번역문을 입력하고 대장경 인터넷 서버 구축 등의 전산화작업에 착수했다. 전산화 작업은 순조롭게 완료되어 2000년 12월에 CD-ROM으로 제작되었다. 2001년에는 팔만대장경 한문 영인본의 한글 번역본으로서 318권으로 구성된 한글대장경도 완간되었다.

한편 2004년에 고려대장경에도 오자가 있으며, 고려대장경을 모본(母本)으로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新修)대장경'에는 더 많은 오자가 발견된다는 비교연구결과가 나왔다.

종림 스님은 팔만대장경과 신수대장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직접 비교 대조하는 일자대조 작업을 통해 팔만대장경 원문 자체에서 130여자(字), 신수대장경에서는 580여자의 오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팔만대장경에서는 ‘시(示)'를 ‘역(亦)'으로, `보살마하살'을 ‘보살마보살'로 판각하는 등의 오류가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이런 결과는 팔만대장경의 전산화를 추진하면서 팔만대장경 전산본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신수대장경 전산본과 3차례에 걸쳐 비교 작업한 노력의 성과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놀라는 것은 수천 만 자를 각자하면서 겨우 130자만 오자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만들면서 고려인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라 볼 수 있다.




[사진설명] 2004년 해인사에서 열린 팔만대장경 축제.


한편 서지학자 조병순 박사는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대장경'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대장경'의 모본(母本)이었다고 발표했다.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거란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사실상 만들었다고 알려지는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대장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했다는 내용이 '고려국신조대장(新雕大藏)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팔만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발해)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복사했다는 얘기가 된다. 조 박사는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병순 박사는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도 자연스럽게 부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4. 28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4-28 17: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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