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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 (5)

■ 페르시아도 굴복시킨 청야전투

원래 청야전투는 북방기마민족이 고대로부터 사용하던 큰 전술 중에 하나이다.

청야전투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예로 기마민족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키타이와 페르시아간의 전투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전투를 보면 고구려가 사용했던 청야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스키타이가 강성할 때 세계의 패자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8~기원전 486)였다. 페르시아는 서쪽으로 유럽의 발칸까지 진출했고 남쪽으로는 리비아, 에티오피아 및 수단을 포함했고 동쪽으로는 펀잡 지방과 인더스 계곡 전역을 손에 넣는 등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북쪽 국경 너머에는 공포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가 있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어디서인지 모를 정도로 갑자기 나타나 약탈을 일삼고 또 재빨리 철수하곤 했기 때문에 응징이 불가능했다.


600척 대선단에 70만 태우고 스키타이본거지 공격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얕보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스키타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으므로 버릇을 고쳐줄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기원전 514년 고대 국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군을 동원했다. 다리우스는 600척의 대선단에 70만 명(과장되었다는 설도 있음)의 장병을 태우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트라키아(현 루마니아)에 상륙한 후 스키타이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기원전 514년 혹은 기원전 513년에 벌어진 이 ‘페르시아-스키타이 전쟁’은 아시아와 유럽세력이 격돌한 최초로 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스키타이의 작전은 ‘히트 앤 런’(치고 빠지기)작전이었다.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스키타이 왕 이단티르소스가 기발한 전술로 적의 힘 빼기 작전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 군이 하루 정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먹을 만한 것은 모두 불태웠고 우물도 메웠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군에 허점이 보이면 전광석화와 같이 반격을 가한 후 다시 후퇴하곤 했다. 소위 전형적인 청야(淸野)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다리우스는 끝없는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잡히지 않는 적을 쫓아 허망한 추격을 계속했다. 스키타이 병사들이 도나우 강과 볼가 강 사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다리우스의 약을 올리자 화가 치민 다리우스는 이단티르소스 왕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보냈다.




[사진설명]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페르시아는 길이 4백50미터, 폭 3백 미터로 궁전이라기보다 궁전 속의 대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당대 최강의 국가였지만 스키타이의 치고 빠지는 작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대는 도망만 다니고 있는데 결국 다음에 말할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우리 군대에 맞서 싸울 자신이 있다면 더 이상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지 말고 한 곳에서 싸우도록 하자. 만약 역부족이라고 느낀다면 더 이상 도망치지 말로 그대의 주군인 내게 헌상품으로 땅과 물을 알현하러 오라.”

다리우스의 편지에 이단티르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합당한 이유가 없는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해 도망친 적은 없소.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요. 우리나라에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들과 서둘러 싸워야만 되는 도시나 과수원이 없소.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그리고 내가 주군으로서 받드는 분은 우리의 선조이신 제우스와 스키타이의 여왕 헤스티아(화덕의 여신) 두 분밖에 없소. 그대에게 땅과 물 대신 그대에게 합당한 다른 것을 보내 주겠소. 그리고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엿 먹어라’요.”

전격작전을 구상한 다리우스였지만 스키타이의 힘 빼기 작전에 시간만 낭비하자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 군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소비하는 식량이 문제였다. 스키타이가 먹을 만한 것이라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황량한 들판에서는 곡식을 구할 수 없었다.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군의 철수에 대해 매우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스키타이는 자신들이 펼친 청야작전에 휘말려 다리우스가 궁지에 빠졌음을 알아채고 다리우스에게 선물로 새와 쥐와 개구리 그리고 다섯 개의 화살을 보냈다. 다리우스는 선물을 갖고 온 사자에게 선물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자신은 선물을 전달하고 돌아오라는 명령만 받았다며 돌아갔다.

다리우스는 스키타이 쪽에서 보낸 선물의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에서 다리우스는 스키타이인들이 항복을 하고 땅과 물을 바칠 생각인 것 같다고 다음과 같은 풀이를 했다.

“쥐는 땅 속에서 살면서 인간과 똑같은 곡물을 먹고, 개구리는 수중에서 살며, 새는 말과 매우 비슷하고(속도가 빠르다는 뜻), 화살을 가져온 것은 그들의 무기를 인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소.”

그러나 다리우스의 부하인 고브리아스는 다리우스와는 달리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페르시아 놈들아. 네놈들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든지, 쥐가 되어 땅속으로 숨든지, 아니면 개구리가 되어 호수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한, 반드시 이 화살에 꿰뚫려 무사히 귀국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다리우스는 자신의 해석이 틀리고 고브리아스의 해석이 옳다고 판단한 후 철수를 단행했다. 청야전투의 위력에 혼이 난 다리우스는 이후 결코 이들과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사진설명] 중국 중경 통원문(通遠門)에 조각된 공성도,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중경의 관문을 공격하는 공성 장면으로 성벽이 견고할 경우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 고구려의 지정학을 이용한 산성전투

고구려가 외적이 침입했을 때 사용한 또 다른 전술은 청야전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산성전투이다.

러시아나 스키타이의 전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야전투는 자유자재로 공격을 하는 동시에 불리한 경우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라는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러시아나 스키타이(헝가리를 포함한 동구권 거의 전 지역)처럼 광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전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험준한 산악 거점 활용 청야작전 전개

고구려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청야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험준한 산악을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설명된 것 것처럼 지리적 특징이 매우 뚜렷한 지역 중 하나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넓게 탁 트인 벌판이 적다는 이야기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지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활을 주요 무기로 채택했다.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멀리서 쏘아대는 활은 개활지에 비해 위력이 배가될 수 있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면 소수부대로라도 지형지물만 잘 이용하면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활은 적의 접근을 막아주는 지원 세력이 없이는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더구나 활이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에 부합하는 무기라고 해도 항상 고구려의 입맛에 맞게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고구려라 해서 평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궁수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또 언제나 천연지형지물만 이용해서 전투를 치룰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사진설명]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중국 측 마지막 관문인 양관과 한나라 시대에 사용된 고대 무기, 중국 한나라 시대의 무기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이와 유사한 무기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인공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다. 간단한 목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마름쇠 같은 것만 뿌려놓아도 적 기병이나 보병이 신속하게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는 산성(山城)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활이나 노 같은 무기들은 성에 의지해서 싸울 때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성을 공격하는 적의 보병과 기병은 성에 닿을 때까지 거의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성안에 있는 수비군들의 활이나 노 등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노출된다. 가공할만한 위용을 보이는 공성(攻城) 무기 등도 성문 또는 성 자체를 파괴할 때까지는 공격 측이 거의 일방적으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고구려가 사용한 전형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적군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든 주민들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의해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들이 입성할 때 청야작전에 따라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이 기본이다.


산성엔 외적침입 대비 식량 · 물자 항시 비축

고구려의 자랑은 산성으로 철수할 때 큰 짐을 갖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산성에는 항상 외적이 침입할 때 들어가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전략 물자 등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는 고구려가 항상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성이 점령되면 모두가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러므로 산성에 들어가면 군ㆍ관ㆍ민 모두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한데 힘을 모았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런 작전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외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더라도 해를 넘기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만주지역인 고구려 영토에서 원정군이 혹독한 겨울 기후를 버티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고구려는 중국군이 지쳐 철수할 때 경기병이나 개마무사들은 풀어 이들을 추격하여 섬멸했다. 중국이 고구려의 이러한 작전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각종 중국 측 자료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주서』도 고구려의 전술은 ‘성안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킨다’고 기록했다. 성안 농성이 주 전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성을 공격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손자병법에도 그 이유가 잘 설명돼 있다.

‘가장 훌륭한 방책은 적의 전쟁 의도를 분쇄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외교관계를 끊어 고립시키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고 그보다 하책이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후수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성을 공격하려면 노나 분온을 수리하고 공성용 장비를 준비하는 데 3개월이나 걸리며 또 적의 성안을 내려다보는 흙산을 쌓아올리는 데 3개월은 걸려야 완공할 수 있다. 그동안에 장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앞서 말한바 준비도 없이 그저 사병들을 적의 성벽에 개미떼가 달라붙듯이 기어오르게 하고 그중 3분의 1이나 죽게 하고서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이는 공격을 해서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공(謀攻)에 능숙한 장수는 적의 병사들을 굴복시키지만 전투를 감행하지 않으며, 적의 성을 함락시키지만 구태여 공격을 가하지 않으며, 적국을 허물어뜨리지만 장기전을 하지 않는다.’




[사진설명] 혼강에서 바라본 오녀산성 전경, 졸본성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절벽과 같은 산 정상에 위치하여 방어에 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산성 내부로 출입하는 통로는 1~2명이 겨우 지나칠 정도로 좁다.



■ 산성의 국가

고구려가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산성전투를 견지했다는 것은 산성전투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산성이 도처에 확보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성을 기간으로 적군을 퇴치하는 기본전략에 따라 국경선 부근에 여러 겹의 방어용 성을 쌓았고 수도로 접근하는 통로에도 차단용 성을 건설했다. 또한 이런 전략 요충지가 격파되었을 경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수도를 평지성(平地城, 평화시)과 산성(山城, 전쟁시)으로 이원화하는 이른바 도성체제(都城體制)를 확립했다.

고구려의 역사는 ‘축성(築城)의 역사’라고 말한다. 당 태종도 고구려는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없었음을 인정할 정도로 고구려는 견고한 산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산성체제를 북한에서는 요하 일대에 구축된 전연방어성(기본방어성)을 축으로 하고 수도(집안)에 이르는 중간지역(태자하 상류와 소자하 일대)에 중심방어성(중간방어성)과 수도 방어를 위한 수도방어성으로 나뉜 3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수도를 향하는 길목에 여러 방어성을 조성하는 수비책은 고구려 초창기의 오녀산성(졸본성: 홀승골성)과 하고성을 비롯하여,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 천도 후의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산성의 숫자는 학자에 따라 달라지나 대체로 요령성의 120여기를 포함하여 길림성이나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 등을 모두 합쳐 200여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가 고분과 함께 돌의 문화를 이룬 국가로서 결국 고구려의 성장과 문화는 돌을 통해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국가들이 치수(治水)에 의한 대규모 인력동원으로 성장한 것처럼 고구려는 치석(治石)을 통한 많은 인력동원에서 나라를 이룩하고 발전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조선기술발전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산성은 지형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되어 건설되었다. 이 부분은 「고구려인은 축성의 달인이었다」(국정브리핑, 2004.5.2)에서도 약간 다루었지만 이를 좀 더 보완해 설명한다.




[사진설명] 단동시의 동호산성의 우물, 산성의 건설에 수원지 확보는 필수적으로 이 우물을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수량을 갖고 있다.


첫째, 고구려 산성은 ‘고로봉식’으로 이는 고리짝같이 4면 주위가 높은 산등으로 둘러막히고 가운데가 오묵하게 생긴 지형이며 둘째, ‘산봉식’으로 마늘 밑둥 모양으로 높은 산. 넓은 대지가 있고 그 둘레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 지형이며 셋째, ‘사모봉’형으로 사모(고대 관리들이 쓰던 모자의 한 가지) 모양으로 뒤에 산이 가로막히고 앞은 평지로 되어 있어 그 등성이와 평지에 걸쳐 성을 쌓은 형태이며 마지막으로 ‘마안봉식’으로 말안장 모양으로 산마루의 양쪽이 높고 중간이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고구려는 장병들의 삶을 안전하게 보장하면서 장기전에 들어갈 수 있는 고로봉식 산성을 위주로 건설했다.


산 능선 · 절벽따라 성벽 쌓아 방어 유리

고로봉식 산성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산 능선 또는 절벽을 따라 성벽을 쌓기 때문에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고 적을 방어하기에는 유리하다.

둘째로 성벽을 산 능선을 따라가면서 쌓기 때문에 겹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다.

셋째로 성 안은 우묵한 골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 안에서는 적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으나 성 밖에 있는 적들은 성 안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전투에서 전술상 유리한 조건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넷째로 풍부한 수원과 넓은 골짜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전투 물자를 비축해 장기전에 대처할 수 있다.

또한 돌을 4각추 형태로 다듬어서 서로 잘 물리도록 쌓았는데 암반기초가 없는 부분에서는 땅을 깊이 파고 돌로 기초를 튼튼히 한 후 그 위에 큰 돌 순서로 엇바꾸어 쌓았으므로 견고한 성벽을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견고하고 지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세워진 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 밖에 토산(假山)을 만들어 대항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나라와 혈전을 벌였던 안시성의 전투 상황(645)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강하왕 도종은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 귀퉁이에다 돌산을 쌓고 성을 침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의 사졸이 분전하여 교전하기를 하루에 6~7회, 충차(衝車)와 포차(抛車)로 성을 파괴하니 성 안에서는 목책(木柵)을 세워 빈 곳을 막았다.’




[사진설명] 백암성 망대(적대), 성문 가까운 양쪽에 성벽과 같은 너비와 높이를 돌출시켜 성문에 다가오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킬 수 있다.



■ 중국과 다른 산성

고구려 산성이 절대적인 위용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산성이 견고한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화 강 유역의 평지에 황토를 층층이 다져 성곽을 축조했다. 이에 따라 평지에 쌓은 네모꼴 토성이 중국 성곽의 기본형이 되었다. 고구려보다 늦게 만주를 호령했던 여진족의 금도 이를 받아들여 평지 토성을 축조했다.

반면, 고구려는 평상시에 들판에서 농사를 짓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험준한 산으로 대피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을 쌓았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적석총을 만들면서 터득한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했다. 산에다 쌓은 석성(石城)은 고구려의 고유 브랜드인 셈이다.

물론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돌로만 쌓은 것은 아니다. 가령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도성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쌓았는데 평원지대에서는 구하기 쉬운 흙으로 토성을 많이 쌓았다. 특히 평지성이나 토성을 축조할 때는 중국의 축성술을 도입해 활용하는 등 고구려 특유의 전통과 신기술을 접목시켜 성의 나라를 건설했다고 여 호규 박사는 말한다.

고구려 산성은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갖고 있어야 하므로 다소 특이한 구조로 건설되었다.


성문 장엄한 외형… 정문 제외하고 대부분 은폐

우선 산성은 산성 자체를 보호하고 외적을 방어해야하므로 어느 정도의 필수시설을 구비했다. 우선 성문은 성의 정문으로서 출입구인 동시에 장엄한 외형을 나타낸다. 산성의 경우 성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은폐시켰다. 한편 평지성의 경우 정문을 교통 요지에 설치했다.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대체로 2층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망루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성문은 적의 제일 중요한 공격목표인 동시에 최후 방어선이므로 매우 견고하게 건설했는데 당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할 때 고구려 군이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성문이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격군은 가능한 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문이 스스로 열리도록 하는 계책을 사용했다.

둘째는 성문을 철통같이 막는 옹성(甕城)이다. 옹성은 성에 접근하는 적을 퇴치하기 위해 성벽을 이중으로 쌓는 것을 말한다. 성문의 안이나 밖에다 현지 지형에 맞게 여러 가지 특징과 모양으로 설치했다. 고이산성 남문의 경우 성문 밖을 반원형으로 감쌌으며 국내성은 ⊂형을 하고 있고 환도산성의 경우는 성안으로 네모나게 오므렸다.

셋째는 전투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치성(雉城)이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쉽게 관측하는 등 전투력을 배양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을 치성(치(雉)라고도 함)이라고 한다. 백암성의 경우 5개의 치가 남아 있는데 그 크기는 6제곱미터로 56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어있다. 석대자산성은 치가 10개나 된다.

넷째로 적대(敵臺)가 있다. 이것은 성문 가까운 양쪽에 성벽과 같은 너비와 높이를 돌출시킨 망대(望臺)로 성문에 다가오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키는 시설물이다. 치와 적대는 성 위에서 시계(視界)와 사계(射界)를 넓히고 화살의 발사 각도를 최소한 좁히게 한다.

다섯째는 각루(角樓)이다. 각루는 모서리를 지키는 시설로 성내의 전투를 지휘하는 보조지휘소 역할을 하며 성의 위엄을 나타내는 부수적인 역할도 한다.

여섯째는 암문(暗門)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다.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두었다가 필요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암문으로 통하는 성벽 안에 군대의 비밀집결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공지가 있다. 이러한 암문과 달리 배수구로서의 수구문이 따로 있다.

일곱째로 여장(女檣)이 있는데 이것은 성벽 위에 설치한 사격대로 성벽위에 몸을 숨기거나 낮춘 후 접근하는 적을 사격하는 시설물로 상층부는 대개 요철(凹凸) 모양을 하고 있다. 환도산성이나 패왕조산성의 경우 여장 밑에는 100미터 간격으로 네모의 구멍이 있는데 위치와 크기로 보아 노포(弩砲)를 성벽 위에 설치하고 고정시키는데 쓴 것으로 추정한다.

여덟 번째로 풍부하고 완벽한 저수시설과 배수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 높고 험악한 산 위에 건설된 것이지만 모두 물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위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나도 배수가 잘 되어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저수지와 배수구를 유효 적절히 배치하였다. 오녀산성의 천지, 용담산성의 용담, 환도산성의 음마만(飮馬灣)이 그것들이다. 또한 대성산성에는 100여개의 못(우물)이 있었다. 환도산성에서도 2개가의 우물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성 안에는 이외에도 많은 시설을 갖추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전체를 지휘하는 내성(아성)과 점장대(성 안에서 안팎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가 있었다. 점장대는 성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구릉에 둔 망대로서 전투지휘소이다. 백암성의 경우 높게 쌓은 석축 안에 있어 후세에 봉수대(墩臺)로 활용되기도 했다. 봉수대는 주변과 연락하는 통신시설로서 성의 필수시설이다. 또한 성밖으로는 적군이 성벽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밖으로 도랑을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군사들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병영엔 온돌을 만들고 곡식과 무기 창고도 곳곳에 설치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0. 6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10-06 18: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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