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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 (6)

■ 산성의 축조 방법

고구려 산성은 중국과는 달리 매우 견고하게 쌓았기 때문에 현재도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신형식 박사와 서길수 박사의 글을 주로 참조한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기초 작업이다. 특히 고로봉식 산성은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도를 높였다. 지반이 약한 경우 토압이 3N/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보통지반의 토압인 10~20N/제곱미터가 되도록 보강공사를 했다.

지반이 아주 약한 경우 성벽이 통과할 구간의 하단부의 지반을 완전히 들어내고 직경 약 30센티미터, 길이 5~6미터의 통나무를 1~1.5미터 간격으로 놓았다. 그 위에 다시 이보다 더 굵은, 직경이 약 50센티미터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모양으로 약 4미터 간격으로 세로방향으로 놓았으며 그 위에 자갈과 모래, 흙을 넣고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므로 축조에 공은 많이 들어가지만 성벽은 매우 견고했다.


높은 성벽 축조땐 굽도리로 계단식 기단부 축성

성벽의 기초 부분은 큰 돌로 밑받침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 20~60센티미터. 높이 15~40센티미터 정도이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 하단 부는 굽도리 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되었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미터나 된다.

굽도리(원래 방 안 벽의 아랫도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성벽의 아랫도리. 북한에서는 축대라고 한다)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특수 공법을 도입했다.




[사진설명] 박작성 입구, 천혜의 요충인 박작성을 기어코 함락시키지 못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① 기단은 큰 돌 : 맨 아래 기단은 큰 돌로 받쳤다. 땅을 파고 기초를 한 뒤 먼저 큰 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 만들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백암성의 경우 기초 돌은 윗부분에 쌓은 돌보다 3배 이상 크다.

② 굽도리부분 들여쌓기 : 굽도리 부분은 들여쌓았는데(퇴물려쌓기) 이는 튼튼한 굽도리를 위한 공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다. 특히 치성에서는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③ 굽도리 부분 내쌓기 : 들여쌓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서 쌓는 것에 반해 내쌓기는 성벽 밑에 굽도리를 마치 네모난 상자로 받쳐 놓은 것처럼 내쌓는 것을 말한다. 심양 근방에 있는 석대자산성의 치에서 이러한 축성법을 볼 수 있다.

④ 그랭이 공법 : 성벽을 쌓으면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는 돌을 바위가 생긴 대로 쪼아내어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이 그레질이다.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공법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정확하게 접합시키면 상하가 밀착되어 매우 안전한 것으로 고구려의 축성법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그랭이 공법에 대해서는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2)」(국정브리핑, 2005.5.7)을 참조하기 바란다.

둘째는 완벽한 겉 쌓기와 속 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겉 쌓기란 돌로 성벽을 쌓을 때 바깥 면을 말하며 외면 쌓기(한 면만 겉 쌓기)와 양면 쌓기(양면 모두 겉 쌓기)를 한다. 겉 쌓기는 작고 잘 다음은 돌로 하므로 마치 메주를 쌓은 것처럼 가지런하고 빈틈이 없다. 특히 강냉이 알 같은 쐐기꼴 돌을 사용하는 것이 고구려 산성 축조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에 놓으며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정한다.




[사진설명] 백암성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백암성은 남쪽의 안시성 및 요동성과 함께 고구려 서북방 방어의 요충으로 남쪽 성벽은 수십 미터의 가파른 절벽으로 돼 있고 그 아래 유명한 태자하가 흐른다. 고구려 산성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겉 쌓기의 기본공법은 벽돌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로 ‘6합쌓기’를 했다. 6합이란 벽돌을 쌓는데 같은 줄 양 옆에 2개를 놓고 윗줄과 아랫줄 2개는 반씩 물리게 쌓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건물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채용하는데 이와 갚은 6합 쌓기는 밖으로 튀어나오는 치성과 체성을 이을 때 서로 엇갈려 물리기 때문에 잘 연결된다. 여기서 치성은 성이 밖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하여 성벽 안에 속 쌓기를 한 돌도 큰 힘을 받도록 했다. 이렇게 쌓은 성벽은 비록 일부 성벽 돌이 자연히 뽑아지거나 성 밑에서 돌을 뽑아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은 신라와 백제에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처음에 거의 산봉식산성이었는데 백제의 경우 산봉식산성의 단점과 고로봉산성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미 축조된 산봉식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산성을 결합하여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의 사산성,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견지산성, 경기도 화성시의 당성 등이 그런 예이다.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고로봉식산성을 건설했는데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 경기도 여주군 파사성(매초성) 등이 그것들이다.

고구려의 성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柵城)으로 되어 있다. 평지성의 경우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안학궁이 있다. 대표적인 평지성으로 하고성은 오녀산성이 험준한 절벽에 있으므로 그 보완적 의미가 있다. 고구려 산성은 200여 개가 되므로 이곳에서는 일일이 상술하지 않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혈투기간에 가장 크게 활약한 천리장성과 압록강 하구의 산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사진설명] 천리장성 위치도, 요하 동편에 구축된 천리장성은 북으로 부여성(농안 일대)으로부터 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으로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했지만 연개소문이 처음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해 중요한 산성을 보완 개축한 것이다.



■ 천리장성과 압록강 하구의 산성

요하 동편에 구축된 천리장성은 북으로 부여성(농안 일대)으로부터 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으로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했고 그 축성의 주역은 연개소문이었다.

신 형식 박사는 영류왕 때 연개소문이 처음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그전부토 있던 중요 산성들을 보수, 개축하여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성(무순의 고이산성-古爾山城)ㆍ요동성(요양)ㆍ백암성ㆍ안시성(해성의 영성자산성)ㆍ건안성ㆍ비사성(대련의 대흑산성) 등으로 이어지는 방어성이 곧 천리장성의 주축이 된다.


신성 · 백암성 · 요동성등 공동전선 구축

그러나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신성에서 비사성까지 하나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방어성이 신성ㆍ백암성ㆍ요동성ㆍ안시성ㆍ비사성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공동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이들 산성은 각기 독자적인 상호연락망을 통해 방어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당(對唐)전선을 구성했다. 특히 안시성과 백암성은 남북에서 요동성을 보호했고, 건안성은 수륙양면의 요충이며, 비사성은 오호도에 건설된 당군의 군량기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등 수ㆍ당의 수륙양면 작전에 대응하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이들 산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앞에서 산성의 축조 방법을 설명할 때 거론된 백암성이다.

백암성은 남쪽의 안시성 및 요동성과 함께 고구려 서북방 방어의 요충으로 산성 정상 부분에 4미터의 넓은 길이 나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백암성의 특징은 고구려 산성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북쪽의 성벽과 현재까지 남아있는 5개의 치(雉)의 존재이다. 남북과 동서의 길이가 6미터인 치가 북벽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 네모로 튼튼하게 쌓은 망대(봉수대)가 있고 그 주위에 장수들이 주둔했던 내성(內城)이 있다. 10미터가 넘는 치를 받치기 위해 밑 부분은 2~3미터 정도의 굽도리 기단을 계단식으로 쌓아 고구려의 산성 축조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쪽 성벽 위의 자연 암석으로 보호되는 성내(內城) 안에는 점장대가 있다. 이 전방지휘소 아래 남쪽 성벽은 수십 미터의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유명한 태자하가 흐른다.

백암성은 요동 지방 최대의 산성이지만 성주인 손대음이 645년 당 태종에게 모반하여 고구려 군이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645년 전투 당시 이적은 서남쪽, 지금의 서문지 쪽으로 쳐들어왔고 당 태종은 서북쪽 즉 현재의 마을 북쪽 끝 부분으로 침입했다. 이는 동쪽(절벽)과 남쪽(태자하)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암성이 손대음의 모반으로 손쉽게 무너졌다는 것은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요충이 무너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을 남쪽에 있는 안시성이 맡게 되자 고구려와 당나라가 안시성에서 혈투를 벌인 것이다.

여하튼 백암성을 비롯한 천리장성은 당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고구려인의 단결된 의지의 표현이자 중국에 대한 민족보존의 최후 보루였다. 물론 이를 위해 고구려인들이 쏟은 땀은 고구려인의 투철한 애국정신의 결집이라 볼 수 있지만 그 보존에 따른 경제적ㆍ군사적 모험으로 수도 방어의 허점이 노출되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허망하게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안선은 정치ㆍ군사ㆍ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중국이 통일되어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이게 되자 요동반도가 양국의 운명을 건 군사적 충돌의 격전장이 되었다. 이 대결에서 영토를 수호해야하는 입장이었던 고구려는 곳곳에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사진설명] 백암성의 굽도리 들여쌓기(사진 서길수).


고구려 해양방어체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방위 성 연결선은 건안성에서 시작하여 비사성, 장산도, 해양도, 오고성, 석성 등 요동반도의 성들과 압록강변의 서안평성, 구련성, 박작성, 대행성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 및 대동강 하구의 전략지구는 황해북부와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압록강 하구로 서한만의 입구인 서안평성에 진출했다. 고구려 군은 태조왕 94년(146)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왔다. 이후 동천왕 때 손권의 오나라와 교섭한다. 당시 요동반도는 양국에 적대적인 공손씨가 장악하고 있으므로 손권의 사신들은 양자강 하구에서 출발하여 서안평성을 통해 수도인 국내성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권은 235년에 동천왕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고 의복과 보물을 보내어 고구려와 함께 요동을 치자고 제의했다. 서안평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가까우므로 수ㆍ당군의 침입을 방어하는 기지 역할을 한다. 압록강 강구는 폭이 좁으므로 적이 수로를 통해서 국내성까지 침입하기가 쉽지 않다. 강폭이 넓을 때는 강안에서 방어하기가 힘들지만 폭이 좁을 때는 충분히 강 양변에서 공격할 수 있고 강에다가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설치할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인근에 있는 박작성과 긴밀히 연관을 맺으면서 공동작전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작성은 압록강구의 교통을 말할 때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성으로 호산진 호산촌에 있으며 현재는 그 자리에 명나라의 장성인 탑호산성이 세워져 있다.


박작성 1990년 발굴 대형 돌 건축 유적 발견

박작성은 199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석벽 500미터와 대형 돌 건축 유지가 발견되었다. 커다란 돌로 쌓은 우물도 발견되었는데 입구의 직경이 4.4미터, 우물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23여 미터, 우물의 깊이는 13미터였다.

우물 내부에서는 길이 3.7미터의 목선이 나왔는데 이것은 고구려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한 목선이다. 이외에 성 안에서 철촉ㆍ철창ㆍ철 도끼 등 무기류와 거울ㆍ낫ㆍ괭이 같은 농기구도 발견되었다. 박작성은 서진(西晉) 또는 그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필자가 2002년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이 고구려 성터에 세워진 명나라 성이 관광지로 개발되는 바람에 고구려 우물은 메워져 있었다.


■ 죽어서도 사는 고구려인

고구려는 중국이 침공했을 때 흔히 산성전투와 청야작전으로 맞섰다. 이 때 중국 군에 허점이 보이면 그 유명한 개마무사와 경기병 등을 투입하여 침략군을 철저히 응징했다.

고구려의 이 같은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 동북방의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중국 세력에 직면하여 고구려는 한편으로는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중국이 타국에 비해 우월성을 보이는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數)이다. 물론 전쟁은 장병의 수만 많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에서 볼 때 대규모 인해전술과 물량작전을 펴서 실패한 경우는 퍽 드물다.




[사진설명] 저승에서 사자를 위해 일할 우샵티, 이집트인들은 죽은 후에도 이승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반드시 저승에서 부릴 하인들을 함께 매장했다. 유명한 투탄카멘 묘에서는 우삽티와 샤웁티가 400개가 발견됐다.


하나 중국은 고구려를 상대해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중국보다 우수한 장비를 부단히 공급할 수 있었고 산성전투와 청야전투 등을 활용하면서 공격군에게 치명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도 초창기에는 고구려에 장비가 다소 뒤졌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서로의 장단점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지』에도 자주 나온다.

이는 장수끼리의 일 대 일 대결에서 일부러 등을 보이며 도망가다가 몰래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재빨리 돌아서서 적을 쏘는 것인데 이를 타도계(拖刀計)라 한다. 상대가 바짝 뒤쫓아 와서 창으로 막 찌르려는 순간 뒤돌아서 활을 쏘는 것이다. 화살이 급소를 비켜 간다고 하더라도 화살을 피하려는 동작 때문에 말에서 떨어지기 십상이다. 뒤쫓아 오던 자가 자주 포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고구려가 중국의 물량작전에 강인하게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전술의 복합적 구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중요 요인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의 평소의 삶과 정신세계이다.

고구려의 유산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무덤의 벽화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벽화는 기원전 27세기에서 11세기까지 그려진 이집트 고분벽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만들어진 이탈리아의 폼페이 유적의 벽화, 기원후 4세기에서 7세기까지 만들어진 고구려의 벽화, 기원후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만들어진 중국의 돈황 벽화 등이다.

이 중에서 폼페이 벽화는 꽃과 과일나무, 새로 가득 찬 즐거운 정원 풍경, 연극 장면 등이 신화나 설화와 어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은 당대의 그리스ㆍ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아 폼페이 시민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돋보이게 하는 목적으로 그려졌다.

돈황의 벽화는 실크로드를 지나는 상인들과 불교도들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재현하면서 당시의 종교관과 동ㆍ서문화의 교류상을 담고 있다. 수많은 돈황의 석굴사원은 하나하나가 작은 미술관이라고 할 만큼 수많은 회화와 장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천장을 메운 장식이나 선인의 모습이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고구려와 서역의 폭넓은 교류를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들 벽화들과 고구려나 이집트의 고분벽화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집트의 벽화에는 농사짓고 고기를 잡고 포도주를 만들고 빵을 굽는 등의 장면들이 있으며 머리를 깎고 면도하는 장면도 있다. 무용은 물론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고분의 벽화만으로도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상당히 넓게 파악할 수 있다.




[사진설명] 안악 3호 고분의 물 긷는 아낙 모습, 무덤 주인공의 살던 집은 물론 고인이 실제 생활했던 모습을 그대로 벽화로 재현하여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들 모두 매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자신의 작업에 충실히 임하는 모습이었다.

이집트인은 어느 민족보다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신이자 통치자인 파라오의 강력한 지배 하에 살았지만 이집트인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불행해 보이진 않는다.

더욱이 3천2백 년의 긴 역사 동안 이집트인들은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며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인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이집트는 평온한 생활을 영위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민족에 비하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별로 근심도 없었는데 그것은 이집트의 전력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다른 나라보다 전력이 강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투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만큼 위험한 요소는 없다. 병사들의 전투 공포심, 탈영, 사기저하 등은 거의 모두 패배할 경우의 죽음 또는 노예로 끌려갈 경우의 고통 등에 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은 죽으면 오히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파라오를 위해 싸우다가 사망해도 걱정이 없었다. 파라오와 함께 내세에서 다시 태어나 영원히 살아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폼페이, 돈황, 이집트와 고구려 벽화들을 각각 현장에서 직접 보면서 폼페이와 돈황 벽화와는 달리 이집트 벽화의 그림 소재가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구려 벽화에도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베를 짜는 여인이나 부엌, 고깃간, 방앗간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사냥을 하는 장면, 무용하는 모습 등 무덤의 주인이 체험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이집트 고분 벽화는 쌍둥이」(국정브리핑, 2004.6.5)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통과 풍습은 물론 종교도 다르고 또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벽화만을 놓고 볼 때 이집트와 고구려의 차이점은 별로 없었다. 무덤을 죽은 자의 집으로 여기고 죽은 후에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점은 두 사회의 공통점이었다. 고구려인들도 이집트인처럼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의 삶이 천상에서 이어진다고 믿었다.


고구려 내세에 무한한 믿음…벽화 내용 밝고 힘차

고구려인들이 이집트인들과 같이 내세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벽화의 내용이 매우 밝고 힘차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의 벽화에 사신과 도깨비 귀신, 하늘을 나는 신선과 용, 학, 봉황, 기린 등이 등장하지만 사악한 신이나 지옥의 풍경은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고구려인들은 내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다 설사 전투에서 죽는다하더라도 보다 좋은 영원의 세계로 간다고 생각하는 고구려인들에게는 전쟁도 살아가는 삶의 일종이었다. 고구려 군이 어느 나라 군보다 사기가 높고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고구려가 강성하게 된 내부 요인으로 신채호는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꼽았다. 선배제도의 창설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창설은 태조 때로 추정된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仙人)’, ‘선인(先人)’이라 쓴다.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사람을 모아 칼춤을 추고 활도 쏘며, 태껸도 하고 또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을 하는가 하면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이런 여러 가지 놀이와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선배’라 일컫고 우대했는데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겼다.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 또는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이 마리(대형), 맨 아래는 소형이라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전쟁터로 나갔고 승리하면 응당 보상이 있었으나 패하면 이들을 업신여겼으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했다고 전한다.

당시 고구려의 신분제도는 철저한 골품제를 유지했으므로 미천한 사람이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선배에 소속된 사람들은 귀천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들이 국가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똘똘 뭉쳐 환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 가운데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고 단재 신채호는 말했다. 유명한 온달장군, 연개소문 등도 선배 출신으로 추정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0. 11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10-11 16: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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