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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과 전술의 귀재,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2)

2. 치고 빠지는 전술 '수나라군대' 무력화


■ 첨단무기 제작

고구려 청야 · 수성작전 기본 전술


수양제도 고구려의 전투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는 청야작전과 수성작전을 기본으로 삼았는데 청야작전은 침략군이 공격해오면 전 주민들이 튼튼한 석조구조물의 산성으로 대피하면서 중도에 침략군이 이용할 수 있는 곡식 등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공격하려면 공격군이 모든 보급품을 확보해야 했다. 수양제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지만 고구려가 청야작전과 수성작전으로 일관할 경우 산성을 호락호락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이 수양제의 고민이었다. 그러므로 수양제도 고구려 성을 공격하는 데는 공성무기 확보가 관건이라 생각하고 대대적인 신무기 제작을 명령한다.

그 당시 개발된 수나라의 무기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는 아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이와 거의 유사한 무기를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이 단원은 임 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사진설명] 해자를 건너는데 사용된 수나라의 호차와 접첩교, 성 밖에 설치되어 있는 해자를 건너는데 부교로 사용한다.


구름사다리: 고구려 성벽 넘기 위한 장비


① 운제(구름사다리) : 고구려의 철옹성 같은 성벽을 넘기 위한 장비로 수레에 탄 군사들이 밧줄을 잡아당기면 약 40미터 가량의 사다리가 펼쳐진다. 운제의 규모에 따라 사륜ㆍ육륜ㆍ팔륜 차가 있었다.

② 소차 :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성 안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용 차량이다.

③ 전호피차 : 성벽 가까이 접근해 땅을 팔 수 있도록 만든 장갑무기로 터널을 만들어 성안의 진입을 꾀할 때 사용한다.

④ 포차 : 발석차라고도 하는데 거대한 돌을 공격목표 지점까지 날려 보내는 무기로 성벽을 파괴하거나 성벽 위의 적군과 방어무기를 공격한다.

⑤ 당차 : 거대한 쇠망치를 앞뒤로 흔들어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한다.

⑥ 삼단노 : 대형 활로 고구려 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⑦ 호차와 접첩교 : 성 밖에 설치되어 있는 해자를 건너는데 부교로 사용한다.

⑧ 충차(공성퇴) :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하는 장비로 끝을 뾰족하게 깎은 커다란 통나무(쇠를 씌우기도 함)를 밀고 가서 부딪히는 장비이다.

⑨ 누차(팔륜누차, 공성탑) : 운제와 충차를 결합한 초대형 구조물로 대체로 팔륜으로 제작된다.

영화에서는 공격군이 충차나 운제 등을 동원하여 공격하면 수비군이 불화살이나 기름, 또는 돌을 떨어뜨려서 격퇴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방법으로 공격군을 격퇴하기는 매우 어렵다.

공격군도 수비군의 방어 방법을 잘 알고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성파괴 충차 지붕 삼각형으로 돌 피해 최소


우선 공격 장비를 생나무로 만들고 미리 충분한 물기를 먹여 두므로 불이 잘 붙지 않는다. 충차와 같은 경우 물탱크를 두어 아예 소화 병력을 별도로 배치하기도 한다. 또한 돌 공격도 쉽지 않은 것이 나무는 탄력이 있어 의외로 돌에 강하다. 특히 성을 파괴하는데 중요한 충차는 장갑을 이중으로 하고 지붕 부분을 삼각형으로 만들어 떨어지는 돌이 미끄러져 떨어지도록 했으므로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공격군이 운차나 충차로 공격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은 영화장면처럼 불이나 돌이 아니고 갈고리이다. 갈고리로 걸어 쓰러뜨리는 것이다. 일단 공격무기가 쓰러지면 다시 세우기도 힘들고 쓰러질 때 크게 파손되기 십상이다. 또한 수비 측에서도 충차를 만들어 운제를 파괴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성문이나 성벽 파괴에 동원된 포차(좌)와 충차(우), 중국에서는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줄을 잡아당겨 돌을 날리는 포차가 발달했는데 포차 1대당 작게는 50명 많게는 250명이 동원됐다.


공성탑은 거대한 망루와 같지만 공격용 무기이므로 수비 측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대부분 사면에 장갑을 둘렀다. 내부에 여러 층을 두고 맨 꼭대기에는 성벽으로 돌출한 널판을 두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병사들이 널판을 가로질러 성벽 안으로 뛰어들 수 있다. 하부에는 공성토를 설치하여 성벽을 부순다. 또한 층층마다 궁수가 있으므로 성 안의 병사와 대등한 높이에서 또는 그보다 높은 곳에서 엄호사격을 할 수 있다.


방어선 뚫리면 병력 신속 투입 전세장악


공성전이 치열해지면 누차를 중앙에 두고 주변에 보다 작은 운제를 보조 공격용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일단 성벽의 어느 부분의 방어선이 뚫리면 운제가 함께 붙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신속하게 투입하여 전세를 장악하도록 한다.

성을 공격하는 데 있어 성문을 파괴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성벽은 두터운 돌이나 흙벽으로 쌓았기 때문에 파괴가 간단하지 않지만 성문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다 용이하다.

성문을 파괴하는 데는 충차 대신에 화공도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특별히 화공용 충차를 만들기도 하는데 기름과 장작을 적재하고 성벽에 부딪혀 성문에 불을 붙인다.


화공대비 성문에 창살모양 셔터 붙여


물론 수비군도 화공에 대비하여 성문 앞면에 철판을 대고 창살 모양의 셔터를 붙여 이중문을 만든다. 공격군이 기름불을 사용할 때 물만으로 불을 끄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수비군은 화공을 사용한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성문에다 젖은 진흙을 발라두기도 한다. 견고한 성을 공격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더구나 수비 측은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미리 함정 또는 장애물을 설치한다. 이때의 최상의 방법은 역시 해자(성벽 주변을 호수로 만들거나 참호를 파서 물을 채운다)를 설치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장갑차를 몰고 성벽에 접근해서 땅을 파는 방법도 있다 소위 무지막지하게 땅굴을 파는 것인데 이것은 성안으로 진입하는 용도와 성벽을 무너뜨리는 용도로 구분되었다. 수나라군은 전호피차를 제작했다. 하나 수나라의 이런 작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고구려 토질 단단한 화강암 땅굴 못파


우리나라의 토질은 많은 지역이 단단한 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어 땅굴을 파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사실 수와 당나라가 고구려의 성 밑으로 땅굴을 쉽사리 뚫을 수 있었다면 고구려는 수많은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여하튼 공격 측은 성벽을 빠른 시간에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수비 측은 부서진 부분을 막고 보수하며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전투가 격렬해지면 수비 측의 장수는 임기응변으로 공격에 따른 각종 피해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설명] 백암성의 치, 수나라는 첨단 무기를 제작해 고구려의 산성들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산성들이 견고해 점령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백암성의 치는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이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고구려도 수나라의 공격을 예상하고 철저한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고구려의 가장 큰 방어전술은 청야작전과 적소에 유기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산성을 이용하는 산성전술을 써서 적이 퇴각할 때까지 항전하는 것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 성 밖으로 나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고구려 백암성 성벽높이 15미터 견고


고구려의 산성이 얼마나 견고하게 건설되었는지는 현재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백암성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백암성의 성벽 높이는 10미터이지만 원래는 15미터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는 반구릉 지대로 한 쪽 면에 태자하라는 강을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다.

또한 백암성은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치가 있으면 성벽을 오르는 적군을 세 방향에서 유효적절하게 공격할 수 있다. 고구려성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것이다. 성문을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 안아 그 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 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수양제는 국내 여건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612년 탁군에 군사를 집결시킨 후 평양성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바 있다.


동원인원수 113만3800명 중국역사상 최대규모


그 당시 동원된 인원수가 무려 113만3,800명이나 되므로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만도 40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 당시 대군이 앞뒤로 이어진 거리가 무려 960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대 동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백제의 무왕은 사신을 보내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수양제는 자신이 고구려 북쪽과 서쪽을 공격하는 동안 백제가 남쪽을 공격하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사신을 보내 침략시기를 알려주었다. 고구려는 양쪽 전쟁을 동시에 치러야하는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여하튼 수나라 군은 요수까지 전격했지만 고구려 군이 강어귀에서 지키고 있어 쉽게 강을 건널 수 없자 3척의 부교를 만들어 띄웠다. 그런데 마침 부교의 길이가 3미터가 짧아 난관에 봉착했을 때 고구려 군이 공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수나라 군은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틀 후 부교를 다시 설치하는데 성공했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군을 재공격하여 결국 1만여 명의 인명손실을 입히는 대승을 거두었다.


[사진설명] 2005년에 발간된 고구려시리즈 개마무사 기념우표, 중장갑기병인 개마무사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때 나타나 적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두어 요하 서편을 확보한 수양제는 점령당한 지역 주민들에게 10년 동안 부역을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주민들을 감복하게 했다.


수나라군 고구려 관문 요동성 공격


여세를 모아 수나라 군은 고구려의 관문이자 요동 지역의 최고 요새인 요동성(요령성의 요양시)을 공격한다. 불행하게도 수나라의 백만 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요동성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요동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이 다소나마 알려져졌다.

요동성은 태자하를 해자로 삼아 평지에 새운 성이다. 성벽 높이는 30미터, 고구려군은 수군과의 직접 전투를 피하고 성안에서 계속 항전하자 수나라 군사는 단 한 번도 이 성벽을 넘지 못한다. 당시 산성 안에는 50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해놓고 수나라 백만 대군의 발목을 계속 잡았다. 수양제가 직접 현장에 나와 장병들을 독려했는데도 고구려 성은 3개월이나 끄떡없었다.

그러자 수양제는 작전을 바꾸었다. 전군을 공성군과 별동대 두 부대로 나누어 공성군은 여러 성을 계속 포위해 고구려 병사들을 성 안에 묶어두고 별동대가 별도로 평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을지문덕 수양제에 '항복협상' 타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5천 명을 편성했다. 그런데 수의 별동대가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 을지문덕이 수에 항복협상을 타진했다. 『수서』에 따르면 수양제가 우중문에게 ‘영양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는 밀지를 주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보면 고구려의 항복 에 관한 협상에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직접 수의 진영을 찾아가는 것으로 사전 약속이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을지문덕이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했다고 추정하는데 임용한은 일국의 수상이 오직 정탐을 위해서 그런 위험을 했을 리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구려의 진정한 목적은 시간 끌기임으로 전투에서 시간을 끌려면 협상을 벌이는 것이 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수나라로 하여금 진정한 협상제안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면 적어도 을지문덕 장군 수준의 인물이 나서야 했다고 설명한다. 을지문덕은 죽음을 각오하고 수나라 진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이 찾아가자 우중문은 수양제의 명에 따라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수군 진영에 위무사로 종군했던 상서우승 유사룡이 항복하려는 적장을 체포해서는 일을 그르친다며 끝까지 체포에 반대하여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결국 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이 끝난 후 수양제에게 처형당했다.


을지문덕 수난군사 식량부족 파악


그런데 을지문덕은 자신이 직접 수나라 진영에 갔을 때 수나라 군사들이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병사들이 스스로 직접 운반해야 하는 100일치의 식량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진군하는 도중에 이를 땅에 파묻었는데 전투기간이 길어지자 식량부족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사진설명]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도(전쟁기념관).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더욱 지치게 만들려는 유인책으로 싸움을 자주 걸면서 지는 것처럼 도주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했다’고 할 정도로 계속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했다.

그런데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는 별동대 30만5천 명을 지원하기 위해 래호아는 수나라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60리 되는 패수(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는 내친김에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외성을 돌파했다.

그러나 고구려를 완파했다고 믿은 내호아는 전투가 채 종결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다.


절안에 매복해 있던 개마무사 수군 격멸


이때 절 안에 매복해 있던 왕의 동생 건무(수륙군의 대원수)가 이끄는 500여명의 개마무사가 튀어 나와 수군을 격멸하기 시작했다. 이 날 건무의 활약이 얼마나 영웅적이었는지는 자신들의 패배를 기록하는데 매우 인색한 중국조차 ‘그의 효용이 절륜하여 500명의 결사대로 내호아군을 패퇴시켰다’라고 기록한 데서 여실히 들어난다.

내호아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는데 그를 따라 함대까지 도착한 병사는 당초 평양으로 진격한 4만 명의 병사 중 불과 수천에 불과했다. 고구려 군에 혼이 난 내호하는 대동강 하구로 후퇴했다. 이 말은 수나라 수군(水軍)이 당초의 작전계획대로 육군과 합류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 을지문덕의 오언시

당초의 작전 계획대로 수군과 육군이 합류하지 못했다는 것은 수나라의 작전에 결정적인 차질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원정이 내호아의 패배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수양제는 원래 육군이 공격에 필요한 식량만 지참하고 신속하게 진격하여 평양성을 점령토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추가 보급은 수군이 맡도록 했는데 수군이 전멸했다는 것은 육군에 더 이상 보급품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30만5천별동대 고구려진영 계속진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문제의 특명을 받은 30만5천 명의 별동대 육군은 고구려 성을 공격할 각종 공성장비를 끌고 고구려 진영으로 계속 진격했다. 그 당시 수나라 진영에서도 보급로가 길어지고 식량이 거의 고갈되자 회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수양제는 우중문에게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추격하도록 명령했다. 평양성만 점령하면 식량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육군은 계속 전진하여 살수(지금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되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고구려의 유명한 작전 중에 하나가 청야전술임은 이미 말한바와 같다. 고구려 영토에 진입한 적군이 한 톨의 식량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청야전술인데 고구려는 모든 주민과 식량을 성 안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으므로 평양 인근은 인적이 끊겨 식량 한 줌도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진설명] 고구려 평양성(장안성), 장안성은 552년에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된 성으로 북성, 내성, 중성, 외성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됐으며, 그 둘레는 23킬로미터, 성 안 총면적은 1186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큰 성이다. 내호아는 외성을 돌파했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철수했다.


우문술이 의심이 들어 전령으로 하여금 성문을 두드리자 성안에서의 회답은 우문술을 놀라게 했다. 고구려가 항복 준비를 하려고 토지와 인구 대장을 조사하는 중이니 수나라 군대는 성 밖에서 5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문술은 고구려의 회신을 받고 기다렸으나 5일은 커녕 10일이 지나도 항복하는 사절이 나오지 않자 그 때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을지문덕이 사절을 파견하여 유명한 오언시 한 편을 보냈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다. / 이미 싸움에 이겨 공이 높으니 /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한가.’


우문술 고구려계략 알고 곧바로 철군명령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이 유명한 시를 받아 본 우문술은 자신들이 고구려의 계략에 걸린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철군을 명령했다. 수나라군대가 철군하기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를 사면에서 습격하였고 수나라 군대가 그해 7월 살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반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고구려군은 살수의 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군이 건너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은 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 군대 대열의 허리를 끊었다. 그런 다음 고립된 수나라군의 선두와 후미를 총공격했고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 압록강까지 추격했다.

이때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고구려 공격군 30만 5천 명 대부분을 잃었다. 수나라군사가 요동성에 도착했을 때는 살아남은 병사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이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그 당시 수나라에는 이런 반전 가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긴창은 하늘 덮고 수레와 칼은 번쩍인다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수레와 칼은 햇빛에 번쩍인다. / 산 위에선 사슴과 노루를 잡고 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 / 문득 관군이 왔다는데 칼을 들어 먼 나라를 공격한다고 한다. / 그러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머리 잘리고 어찌 상하지 않겠는가.’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은 출정준비와 출정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산동과 하남에서 큰 수재가 일어나 민심이 악화된 데다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 군이 지리적 조건과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수나라 군을 무력화시켰다. 이것은 전략과 전술에 앞선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전쟁을 이끌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나라가 백만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군에게 참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왕의 동생 건무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水軍)을 격파하지 않았으면 을지문덕이 육전에서 승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들어 건무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0. 1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10-13 17: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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