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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전에 패전은 없다, 연개소문 (1)

1. 중국과 전투 '백전백승' 불멸의 장수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 실패 여파로 무너진 수나라를 뒤이은 나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국이었지만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와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에게 화평을 제의했고 고구려는 심각한 논란 끝에 이 제안을 수락했다.

고구려의 침공 위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당나라는 내부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곧바로 주변의 동돌궐과 서돌궐, 토번, 고창국(지금의 중국 신강성 돈황에 있던 나라) 등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642년까지 당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고구려뿐이었다.

이 때 당나라를 세계 최강의 부국으로 만드는데 기초를 쌓았다는 태종 이세민이 등장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가 바로 당 태종의 집권기였다. 그가 집권한 시기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할 정도로 영화로운 시대이므로 중국인들은 그를 모택동이 이끈 ‘문화혁명’에서 진시황제를 복권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았다.


당태종 "치밀한 준비 없이 고구려 정복불가"


고구려를 제외하고 변방을 모두 제압했다고 생각한 당의 태종은 곧바로 고구려 정복에 착수했다. 물론 당태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수나라와의 혈투에서 승리한 저력 있는 고구려이므로 치밀한 준비가 없이는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태종의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당은 고구려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 고종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의 사전에 패전은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과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연개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인 연개소문에 대해 3회에 걸쳐 설명한다.




[사진설명] 고구려와 당의 전쟁 상황도, 연개소문 지휘하의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전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 아들들의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 고구려 정복을 위한 당태종의 집념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641년 태종은 직방낭중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다. 직방낭중은 6부(部) 가운데 병부(兵部)에 속하며, 지도를 관리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진대덕은 지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수(官守)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나는 우아하고 산수를 좋아하니 이곳에 좋은 곳이 있으면 나는 구경만 하겠다”하니 관수들이 기뻐하며 이를 인도하니 온갖 곳을 유람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자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 있었고 또 한인(漢人)으로서 수나라에 종군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를 보면 그 친족들의 존망을 말하여 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중략) 진대덕은 사신으로 온 것을 인연으로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은 고구려의 도로, 지세, 산세 등을 파악하는 염탐자로 현대로 따지면 간첩이었다. 그것은 『한원』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보고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신성-남소성 70리, 평양성-국내성 670리, 평양성-오골성 700리, 안시성-은성 100리, 평양성-압록수 450리’


"신라 괴롭히면 전쟁 일으킨다" 고구려 협박


이와 같이 고구려에 대한 철저한 자료를 수집한 태종은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는다. 우선 당나라와 신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핑계 삼아 상리(商里) 현장(玄獎)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괴롭히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고구려를 협박했다. 당의 이런 협박에 연개소문은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태종은 다시 644년에 장엄(蔣儼)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그를 토굴에 가둔다. 이로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취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동정(東征)함은 중국을 위해 자제(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더 늙기 전에 이를 취하려 한다.’




[사진설명] 당의 공성용 신무기 당차, 당나라에서 사용한 최첨단 무기로 성벽이나 성문을 공격할 때 사용했다.


위의 내용을 보면 당태종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전사한 백성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며 셋째는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당태종이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배한 이유를 면밀히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고구려를 공격할 작전을 세웠다고 적었다. 영류왕 시해부분은 뒤에 다시 설명한다.

첫째, 수양제의 패인은 정병(精兵)을 가리지 않고 오합지졸까지 동원하여 군사는 비록 400만에 달했다고 하나 실제로 전투에 참가할 장병은 수십만에도 못 미쳤다. 그러므로 태종은 10년 동안 철저하게 훈련시켜 양성한 군사 중에서 20만 명을 차출했다.


당군 고구려 작전 "요동 점령후 평양침입"


둘째, 수나라는 고구려의 변경부터 잠식해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대군으로 평양에 침투했지만 보급선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다. 당군은 평양으로 곧바로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에 있는 각 고을을 먼저 점령한다.

셋째, 수나라는 진군 중에 자기가 먹을 양식을 장병이 각자 지참하고 추후에 수군(水軍)이 식량을 공급하기로 했으나 수군이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 군은 소ㆍ말ㆍ양 등을 각 장병에게 분배하여 말로 이동하고 양식도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했다. 또한 전쟁터에 도착해서 수군이 공급하는 식량에 의존하지 않고 소ㆍ말ㆍ양 등의 고기로 이를 충당한다.

넷째 수양제는 오로지 수나라 군대로만 작전에 임했으나 당나라는 신라와 공수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방을 교란시키게 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이세적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4만3천 명을 500척의 배로 이끌었다.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했던 당나라와 불과 30년 전 수나라를 멸망시킨 고구려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전쟁은 시작한 것이다.




[사진설명] 안시성 내부 모습, 안시성 산허리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제법 큰 마을이 있다. 멀리 산성이 보인다.


당시 당이 택한 전략은 수륙양면작전으로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았으므로 매우 효율적으로 진군했다. 물론 이세적이 고구려의 보루라고 볼 수 있는 신성(新城) 공격에 실패했지만 육군은 개모성을 장악했다. 개모성 전투에서 고구려는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잃었다. 장량은 요동반도의 끝 해안 절벽에 위치한 요충지 비사성도 함락시켰다.

북쪽과 남쪽의 중요한 요새를 점령하여 기선을 잡은 당군은 비로소 요동방어망의 중심이며 정문이라 볼 수 있는 요동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당군이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군량미는 원정군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고질적인 식량문제를 확보할 수 있었고 태종휘하의 군대도 요하에 도착하여 사기를 높였다.


고구려 신성에 병력 4만 요동성 급파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했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은 도착하지 않았고 당태종의 군대도 요하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다.

기회를 포착한 고구려군은 당군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그러나 당의 장군인 도종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대패하고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당군은 곧바로 수양제가 100만 명을 동원하고도 점령하지 못했던 요동성을 공격했다. 이 공격에 당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거대한 투석기를 동원했다. 수양제가 고구려군을 침공할 때 사용한 공성구가 효과를 보지 못한 경험을 살려 당군은 강력한 포차를 제작했다. 이 신형 포차는 300근 짜리 돌을 무려 300보(450미터)나 보낼 수 있었다. 고구려가 자랑하는 맥궁의 사격거리가 240보나 되지만 당군의 피해는 전혀 없이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동군 자체로만 12일간이나 버텼지만 결국 요동성은 함락됐고 포로가 된 병사만 1만, 민간인 포로가 4만, 탈취당한 군량미가 50만 석이나 되었다.

다음 공격 목표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백암성이었다. 백암성은 강으로 둘러싸여 삼면이 절벽이고 출입구는 서남쪽뿐이므로 수비에 절대적인 이점을 갖고 있었다.


백암성 성주 손벌음 당군과 내통 항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암성은 쉽게 함락되었다. 성주 손벌음이 당군과 내통하여 항복했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항복한 손벌음을 계속하여 백암성주로 인정하는 등 선무정책을 베풀면서 항전의지를 불태우는 고구려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치중했다.

다음 목표는 당연히 고구려의 요충지 건안성(建安城)이다. 그런데 건안성 공격을 앞두고 당나라의 진열에서 이견이 생긴다. 건안성이나 오골성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당태종 이세민,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 중에 한 명인 당태종은 고구려 정복에 실패하자 고구려 정복을 포기하라고 유언했다.



■ 안시성 혈투

안시성은 원래 고구려가 요동을 정복한 404년에 쌓은 산성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3년이나 당군과 맞서 항쟁한 곳이다. 그만큼 안시성은 우리 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전승지이지만 놀랍게도 그 구체적인 위치조차 근래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가 한눈에 보이는 중국의 국경도시 단동은 예로부터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된 압록강 철교가 아직도 남아있다. 단동을 지나면 지금도 고려문이라는 지역이 있고 그 문을 지나면 천혜의 요새인 봉황성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연암 박지원이 사료를 근거로 하여 봉황성이 안시성이 아니라고 밝혔다.

근래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안시성은 산의 기복에 따라 산 능성을 둥글게 이어 쌓은 판축(版築)의 토성으로 여러 개의 산을 환형(環形)으로 묶은 고로봉 산성이다.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이견은 있으나 대체로 요령성 해성시 영성자촌에 있는 토성으로 추정된다.


안시성 북쪽 해성하 · 서쪽 해자 절벽 산성이점


안시성은 높고 험한 산위에 있지 않은데다가 성내 넓이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0.5킬로미터에 총길이 4킬로미터 내외의 작은 성이다. 그러나 산은 비록 높지 않지만 북쪽으로는 해성하(태자하 지류), 서쪽으로는 팔리하를 해자로 한 절벽이 있어 산성으로서의 이점을 갖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농경지와 마을이 있고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두 군데의 성문 자리가 있으며 대부분 산허리는 복숭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다.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는 북위 40도 45분 32.6초, 동경 122도 47분 31초이며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금지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원래 안시성은 북으로 백암성, 서쪽으로 건안성이 지켜주는 요충으로 평양성으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는 고구려의 간성인데다가 이 지방의 철광을 지켜주는 보루였다. 지금도 이지역의 철과 해성 부근의 마그네슘 생산은 중국을 대표한다. 바로 수와 당이 고구려와 피나는 쟁탈전을 전개한 이유이다. 안시성 대첩과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안시성대첩과 연개소문」, 국정브리핑, 2004.5.15)에 약간 설명하였지만 이를 보완하여 설명한다.

당태종은 백암성과 건안성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명하고 수항막(受降幕)을 설치하여 성 함락 후의 기념식까지 준비했다. 이때 동원된 당의 무기는 포차와 당차(撞車)였고 고구려 측도 포노(砲弩, 쇠뇌로 여러 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는데 마차에 의탁하여 이동이 가능하며 주(周)이래 한(漢)대에 크게 활용되었음)와 포차를 동원했는데 학자들은 고구려와 중국의 무기는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시성 혈전' 3개월간 치열한 대접전


안시성의 혈전은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대접전으로 진행됐지만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성주인 양만춘의 전략에 의해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지형이 험하고 군졸이 용감했다’는 『신당서』의 기록을 볼 때 안시성 싸움의 승리는 안시성의 천혜적인 지형과 군졸들의 사기가 중요 요인인 것 같다. 이적(李勣)이 당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들을 모두 죽이자”고 한 사실도 이 전투의 치열함을 말해 준다.

당군이 안시성 공격을 결정했을 때 안시성 안에는 주민을 비롯한 고구려인 10여만 명이 공격에 대비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전투는 고구려에 매우 불리했다.




[사진설명] 수ㆍ당의 공격에 맞선 고구려군.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해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이끄는 15만 명의 고구려 지원병을 급파했다. 지원병 안에는 최소 5천 명 이상 되는 말갈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욕살은 여러 성을 관장하는 광역 행정망의 책임자로 임용한 박사는 고구려의 광역행정망은 동서남북의 방위명을 딴 5부였으므로 이 중 남부와 북부의 병력이 총 동원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고연수가 첫 전투에서 대패하고 휘하 장병 3만 6천명을 거느리고 당태종에게 항복했다. 당태종은 고구려의 지휘관 3500명은 당나라로 압송하고 고구려의 용병이던 말갈병 3300명은 생매장했다.

여기서 당태종은 매우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당태종이 항복한 나머지 고구려 병사를 모두 석방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전투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서 황 원갑은 안시성 결전을 앞두고 포로가 된 고구려 군을 풀어주었다는 『당서』의 기록은 전적으로 허구라고 지적했다. 그는 고연수의 항복에 따르지 않은 고구려 군이 온전히 남아서 연개소문의 지휘에 따라 끈질긴 유격전으로 당군의 보급선과 진격로를 차단하는 등 적 공격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리했다.

고연수가 당태종에게 항복했는데도 그를 따르지 않는 병사가 많이 있자 이를 숨기기 위해 당태종이 마치 방면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고연수의 패배로 인한 고구려의 손실은 엄청나 당 군이 노획한 말이 3만 필, 소 5만 두, 명광개 5천 개, 기타 장비가 5천 점이었다.

고연수의 패배는 또한 고구려의 다른 성주에게 큰 충격을 주어 석황성, 은성 등이 점령당했으며 인근 주민들이 모두 도망 가 수 백리 사이의 인가가 모두 비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고구려의 유명한 청야 작전의 일환으로 모든 사람들이 철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안시성 고작 10만대군에도 항전태세 불태워


여하튼 당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은 안시성으로 좁혀졌다. 당나라는 10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고 안시성에는 고작 10여 만 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안시성은 항복은 커녕 당태종과의 결전에 대비하여 항전태세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때가 7월이다.

고구려의 지원군을 섬멸한 당 태종은 항복하지 않으면 이적의 조언대로 성 안의 남자를 모조리 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장병들에게 성을 함락하면 약탈을 허용하겠다고 사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들의 심리전에 굴하지 않고 성벽에 올라가 북을 울리며 고함을 지르고 당 태종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문제는 기후였다. 중국으로서는 1개월 내에 안시성을 반드시 함락시켜야 했다. 당태종의 원래 목표인 평양을 겨울 전에 함락시키려면 안시성을 1개월 내에 함락시켜야만 평양을 공격할 시간을 2〜3개월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군의 작전은 안시성의 고구려 군이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안시성을 도우려고 출동한 지원군이 패퇴했지만 2〜3개월만 버티면 당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당군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고 접전을 피하면서 고구려 특유의 지구전으로 대처하자 당 태종은 난공불락의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방안을 짜낸다. 안시성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무려 60일 만에 거대한 토산을 완성했다(이 당시 당나라군이 쌓았다는 토산은 근래 위성사진으로도 확인되었다). 이 토산은 성벽보다 높았고 정상부에만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는 규모였다. 더구나 고구려의 성벽과의 거리는 수 장(1장은 3미터)에 불과했다.

대형 전쟁에는 항상 돌발사고가 생겨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다는 말처럼 이번에도 극적인 사건이 생긴다. 당군이 토산을 통해 안시성을 공격하기 직전에 토산이 안시성 쪽으로 무너지면서 고구려 성벽 일부도 무너져 토산과 성이 저절로 연결된 것이다.




[사진설명] 해룡천 산성 정상, 일반적으로 안시성으로 추정하는 영성자산성이 매우 협소하다는 것 등을 근거로 안시성이 해룡천 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김일경 사진).


고구려 성벽밖 토산점령…당군 접근 못해


이것이 고구려 측에겐 기회였다. 원래 토산이 안시성과 연결되었으므로 당군에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의 토산의 수비 책임자인 부복애는 마침 자리에 없었는데 추후에 토산을 지키지 못한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태종은 패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부복애의 잘린 목을 군사들에게 돌렸다.

당군은 최종적으로 3일에 걸쳐 안시성을 맹공격했으나 안시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당 군은 더 이상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당군이 곧바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기후가 고구려를 도왔기 때문이다. 예년에 비해 추위가 일찍 찾아와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당시의 기록은 다소 연극의 한 장면과 같다. 당태종이 퇴각할 때 안시성주인 양만춘이 성에 올라 절을 하자 황제가 안시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보냈다고 『삼국사기』에도 적혀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는 만주 토착민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당 태종이 철군을 명하자 안시성주 양만춘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는 바람에 당군이 큰 혼란에 빠져 인마가 서로 밟혔는데, 그 와중에 당 태종의 말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급기야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사로잡힐 위기에 몰렸다. 당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와 그를 구출했다’’

안시성주 양만춘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하맹춘이란 사람이 지은 『여동서록』에서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고 기록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하맹춘은 명나라 때 사람이라 시대가 매우 떨어진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안시성 전투가 중국에서 워낙 유명한 사건이므로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하맹춘이 구전에서 채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 꼬리를 무는 안시성 위치

지금까지의 설명은 안시성을 영성자산성으로 비정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아직도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영성자산성 안시성 아니다" 안시성 미스터리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데는 여러 근거가 있다. 첫째, 산성의 지형이 험하지 않고 산도 높지 않으며 토성이어서 견고하지 않다. 성벽이 좁은 데는 너비가 2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당나라의 포차ㆍ충차의 경우 2미터 정도의 흙덩어리는 얼마든지 뚫을 수 있는데 이런 토성에서는 당나라 100만 대군의 공격을 3개월이나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지적이다.

둘째는 영성자산성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성내는 주로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평탄한 곳이 적어 10만 명의 군사가 주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기록에 의하면 산성 동남쪽에 인공 토산이 있다는데 그 토산은 너비가 20미터도 채 안되고 산등성 중간이 바로 동쪽 성벽의 토대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공위성이 촬영했다는 영성자산성의 토산 흔적도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의 경우 인공 토산이 아니라 동쪽 성벽이 허물어진 흙더미로 추정하기도 한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학자 김 일경은 만주 대석교 인근의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이라고 주장했다.

해룡천산성은 산성을 견고하게 쌓은 것은 물론 둘레의 길이가 3000여 미터나 된다. 산성 안은 넓고 수원이 풍부하며 성 안에서 전형적인 고구려의 붉은 색 무늬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 안시성은 적정을 파악하는 곳으로 특별히 중요성이 있는데 성 북쪽의 해룡천 주봉과 그 가운데의 산등성이가 점장대 역할을 했으며 성내에도 두 곳에 점장대가 설치돼 있다.

성에서 서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초소(보루성)가 있는데 현지 사람들이 그곳을 ‘고려성’으로 부르는 것도 심증을 굳혀 준다는 것이다. 아직 이 부분은 학계에서 정설로 확정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인공위성 촬영으로 영성자산성에 무너진 토산이 발견되자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라는 과거의 설이 보다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안시성을 방문했을 때도 10여 만 명이 거주하기에는 다소 작은 감을 받았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안시성(영성자산성)에서 당나라와 혈투를 벌였던 고구려 군은 10만 명이 아니라 다소 적은 인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10. 17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10-17 15:4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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