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6월, 국방과학연구소의 조직 개편에 따라 전자광학연구실이 센서 위주의 개발실로 분리, 독립됐다. 새로 연구실을 맡은 사람은 레이저 전문가 김재기 박사로 레이저 거리측정 기술을 M-48 전차에 적용한 전자식 탄도계산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막 종료한 때였다.

김실장은 열상장비야말로 독자적인 주야간 영상정보획득 등 군 전력 증강을 위해 자체 기술로 꼭 개발해야 할 중요한 전자광학 센서로 판단했다. 그는 예전 열상장비 개발을 직접 담당한 연구원으로 유일하게 전자광학연구실에 남아 있는 홍석민 박사(당시 선임연구원)를 불러 열상장비 연구팀을 편성, 이듬해부터 관련 연구를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


열상장비 연구팀 편성

홍박사는 당혹스러웠다. 황량한 벌판에 벌거벗고 서 있는 기분으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심정. 이미 다른 연구개발에 투입된 옛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또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부서전출을 요청했다.

김재기 실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개발의 필요성과 자신감을 넣어주며 홍박사를 설득해 전출 요청을 어렵게 철회시켰다. 이어 2~3명의 신규 인력을 받아 열상장비 연구를 재개토록 했다. 연구진이 여기서 직면한 어려움은 80년 초 처음 개발할 때보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예전 기술로는 승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때 국내에는 열상장비 개발에 새롭게 발을 붙여볼 공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개발되는 장비가 군 무기체계로 적용되려면 미래 정보전력 증강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파격적으로 화질을 개선하고 정비 유지의 용이성으로 접근해야 했습니다. 기술 확보와 타당성 입증에 최초 기간을 잡았습니다.” (김재기 실장)

화질을 대폭 개선하려면 신기술인 직병렬주사 방식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까지의 열상장비들은 병렬주사 방식을 주로 채택하고 있었다. 적외선 검출소자들을 수직으로 수십 개~200여 개 배열해 상하 방향의 영상을 한꺼번에 획득하며, 수평거울만을 이동시켜 좌우 방향의 영상정보를 순차적으로 가져오는 방식. 비교적 구현이 쉬운 편이다.

하지만 병렬주사 방식을 이용하면 화면을 구성하는 재현선(display line)의 개수가 검출 소자 수만큼 제한돼 분해 능력이 떨어지고 검출소자들이 균일하지 못해 화면에 줄이 나타나는 등 좋은 화질을 얻기 어렵다.

이 불균일성을 해소하면서 화소 수를 대폭 늘려 세밀한 영상을 획득할 수 있는 신기술이 직병렬주사 방식이었다. 당시 유럽 선진 몇 나라만이 정부의 대폭적 지지를 받아 개발을 추진, 장비에 적용하고 있었다.

직병렬주사 방식을 구현하려면 1분에 수만 번 고속으로 회전하는 다면거울의 안정적 제어가 가장 큰 문제다. 초고속으로 들어오는 에너지 정보와 신호처리가 완료된 후 영상으로 나타나는 재현정보의 순서가 서로 102365223662 초(0.1 μ sec) 이내로 정밀하게 일치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전 다면거울을 1분에 수만 번 고속으로 안정되게 돌리기 위해서는 공기에 의한 저항이 없도록 거울을 진공상태에서 돌려야 한다.


노이즈 제거 기술 확보

한번 실패한 열상장비 연구는 국방과학연구소 연구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 있는 상태라 예산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허문회 연구원은 진공용기를 제작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적외선을 투사할 수 있는 적외선 창을 내고 용기에 본드를 칠해 밀폐한 뒤 다시 공기를 뽑아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세한 틈새로 공기가 스며들어 또다시 작업을 하곤 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본드 흔적이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신호처리 부분에서는 영상 노이즈(잡음)를 제거하는 기술 확보가 중요했다. 연구·제작된 영상신호처리기는 일반 TV 영상 크기 정도의 신호에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동작했다. 하지만 온도차에 따른 전압차이, 즉 1도의 차이에 수 μV(102365223661 V)의 전압차이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 미세한 열영상 신호에서는 금방 잡음에 묻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특히 초고속으로 처리되는 열영상 신호들은 병렬주사 방식보다 더 미약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접지와 잡음 차폐를 위해 금박지로 칭칭 동여매고 연결을 이리저리 바꾸는 등 시험장비가 누더기가 되도록 만들어 봐도 별 진전이 없었다. 주사장치와 신호처리기의 궁합이 맞는지 안 맞는지 영상으로 확인해봐야 하는데, 그 영상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길이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연구는 답보상태에서 어느덧 해를 넘겨 91년 봄을 맞이했다. 싸늘한 실험실에서는 봄의 따사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선진국 수준의 장비를 개발하겠다고 연구 목표를 무리하게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불쑥불쑥 스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 신호를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정렬하고, 주사장치를 제어하면서 속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던 중 순간적으로 부분적인 영상이 잠시 나타났다가 깨지는 것이었다.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날부터 연구원들은 영상을 잡기 위해 실험실에 붙어 앉아 불철주야 연구를 계속했다. 김재기 실장의 관심도 고조에 달하는 듯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실험실에 자주 들르지는 않았지만 매일 퇴근을 미루고 초조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끊임없는 도전

연구진은 여전히 초고속으로 처리되는 주사장치와 재현장치의 영상 입출력 순서를 정확히 일치시켜 영상을 잡기 위해 전자회로·소프트웨어를 떡 주무르듯 반복해 수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떴다”는 한 외침이 들렸다. 마침내 옆에 놓인 TV 모니터에 영상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3~4ｍ 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잡힌 영상인데 쪼글쪼글 찌글찌글 도대체가 말이 아니었다. 활짝 편 손가락이 도깨비 뿔같이 보였다.

연구진은 1년 반 동안의 연구 결과가 그 정도면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홍석민 박사는 결과를 기다리던 김실장에게 모기 만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실장님, 글쎄 보이기는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작이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최초로 획득한 영상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도저히 해낼 것 같지 않던 직병렬주사 방식으로 열영상을 획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구원들은 내심 무엇보다 기뻤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기술개발이 “아, 바로 이거야” 하는 가능성,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모두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이때까지 허문회 연구원이 보여준 열정은 연구원 사이에 남다르게 남아 있다. “허문회 연구원은 열상장비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개인 사업을 위해 연구소를 떠났습니다. 그가 만든 주사장치는 지금 기술에 비하면 장난감과 같지만 모두 막막한 상태에서 그는 연구원이 가져야 할 도전정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줬고 그 정신은 우리 연구실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홍석민 박사)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