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병렬 주사방식을 이용해 열영상을 어렴풋이 잡은 날부터 연구원들은 오히려 더 정신을 못 차리게 됐다. 막 발견한 가능성과 충만해지는 자신감은 어느새 연구원들이 갖는 힘의 원천이 됐다.



끊임없는 연구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면서 산더미같이 쌓인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결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좋은 일'이 계속됐다. 김재기 실장이 이때 내린 파격적인 결단이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김실장은 레이저 기술개발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연구해온 핵심인력 두 명을 열상장비 연구에 투입했다. 신호처리 분야의 송인섭 박사·광학계 설계 분야의 김창우 선임연구원이 그들. 두 명의 증원에 불과하지만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전문인력이 아쉬운 때였습니다. 이때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본능적인 감각을 가진, 잘 훈련된 고급 연구인력 두 명을 과감히 투입한 것이 열상장비 개발 성공에 큰 공헌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김박사님의 결단에 항상 고마움을 가집니다.”(홍석민 박사)

이제 아이디어, 그리고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밤 12시를 넘겨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연구원들의 연평균 초과근무시간이 1000시간에 육박하는 기록을 보이기도 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여름 휴가는 자연스럽게 반납됐다.

당시만 해도 개인 승용차가 많지 않아 승용차를 가진 연구원이 대전 시내를 한 바퀴 돌며 동료들을 퇴근시켰다. 사실 이쯤이면 가정이 있건, 독신으로 지내건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법하지만 연구성과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얻는 연구자만의 희열과 짜릿함 때문에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냥 기분 좋은 연구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기분 좋은 일이 또 생겼다. 1991년 8월, 무기체계획득관리규정(현 국방획득관리규정) 개정이 그것인데, 군에서 소요가 확정되지 않은 기술들도 연구에 착수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이다. 무기체계로서의 개발이 아닌 핵심기술·부품 개발도 용이하게 됐고 이에 따라 열상장비 기술도 응용연구사업으로 공식화될 수 있었다.

규정에 있는 정의를 옮겨보자.

핵심기술·부품이란 합동 중·장기 무기체계기획서(JSOP)에 수록된 무기체계의 국내 개발 또는 생산에 필요한 고도·첨단기술 및 이러한 기술들이 집약, 생산되는 중요 부품으로 국내 생산을 위한 관건이 되며 선진 외국에서 이미 개발돼 있어도 기술 이전이나 판매를 회피하는 사항 또는 새로운 기술 및 부품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기술 및 부품 연구개발은 크게 응용연구·시험개발 단계로 나뉜다.

그중 응용연구는 기초연구 결과를 군사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전환하는 단계로 비운영적(실험실)환경 하에서 기술의 타당성과 실용성을 입증하는 연구단계다. 따라서 핵심기술에 필요한 연구개발비가 충분치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예산이 시제품 제작비에도 못 미치는 빠듯한 것이었지만 연구원들은 정식 연구개발 과제로 수행된다는 사실에 큰 힘을 얻었다.

개발과제가 공식화하자 협력업체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열상장비의 국내 개발이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렵게 여겨져 개발 부담이 컸다. 때문에 업체가 인력을 투입할 만큼 예산이 확보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개발 이후에도 군의 양산소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협력업체의 투자를 망설이게 했다.


시스템 개발 확대

업체는 초기 3~4명의 신입사원을 시제 제작에 투입했다. 신입사원들은 그나마 다른 과제와 중복돼 엉뚱한 곳에 시간을 뺏기기 일쑤였다.

그래도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결과일까. 이때 열상장비를 처음 접해본 제작 인력들이 한 분야에 꾸준히 유지돼 현재 국내 관련업체의 열상장비 개발에 중추를 이루고 있다. 연구진의 열상장비 연구는 기존 직병렬 주사장치의 구현 중심에서 이제 열상장비 전체를 구현하는 시스템 개발 중심으로 확대해 나갔다.

설계 현장은 마치 전쟁터와 다를바 없었다. 미약한 적외선 에너지 신호를 손실 없이 모을 수 있는 적외선 망원경을 설계했다. 좀 더 견고하고 안정되게 주사장치를 제작, 영상잡음을 제거했다. 또 주사장치·재현장치 간의 동기를 정확히 일치시키는 정밀 타이밍 회로를 제작하고, 그때마다 구성품 단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찾아 해결해 나갔다.

제대로 된 영상을 획득하기 위한 연구 개발은 끝이 없는 듯 보였다. 그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력의 결과로 조립·조정 시점이 왔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부품을 처음 조립한 후 첫 영상을 본 연구원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모니터에 나타난 영상은 너무나 안정적이고 깔끔했다.

저마다 “이거 정말 우리가 만든 것 맞아”를 연발했다. 조립 이전에 각 구성품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모두 사라진 듯했다. 물론 아직 여러 조각으로 제작돼 외형적으로 보기에 답답한 수준임은 분명했다. 검출소자를 냉각하는 냉각장치(미니해설 참조)도 외장형인 데다 본장비만큼 큼직한 공기 압축기(compressor)를 별도로 사용하니 소음 때문에 옆 사람과 대화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1년전과 다른 영상수준

그렇지만 영상 하나만큼은 속된 말로 끝내주는 수준이었다. 1년 전과는 사뭇 다른 영상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내심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동안 선진국 열상장비의 화질을 비디오를 통해 가끔 보았으나 이 영상이 과연 그 수준에 이르렀는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좋은 일은 계속됐다. 92년 초 국방과학연구원이 핵심기술·부품 연구개발을 전담하는 기술연구본부를 새롭게 편성하면서 기존 전자광학 연구실을 전자광학부로 확대, 개편함에 따라 열상장비 연구팀이 공식적으로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연구 인력은 변함없이 다섯 명이었지만 대외적으로 열상장비 전문부서 명칭을 얻게 된 것이어서 사기가 높아졌다.

연구팀장으로 홍석민 박사가 임명됐다. 홍박사는 연구성과에 힘입어 우선 이 분야의 국내 연구개발 현황을 소비자인 소요군에 정확히 알리고 싶었고 기술연구본부장의 승인을 받아 연구 현황 및 시제 소개회를 준비해 나갔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