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産 장비보다 우수한 열영상

열상장비연구팀장 홍석민 박사는 기술연구본부장의 승인을 받아 1992년 6월9일 열상장비 연구 현황 및 시제 소개회를 연구소에서 개최했다.

그런데 바로 전날, 그야말로 시제품을 갈고 닦고 조이고 기름치면서 광을 내고, 또 마지막으로 작동을 점검하던 밤 11시쯤 뜻밖의 일이 터졌다. 조립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전원을 연결하자 신호처리 기판의 주요 부품이 모두 타버린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참으로 암담한 순간이었다.

간신히 부품을 모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소프트웨어를 내장하는 칩 하나는 업체의 설비를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홍박사는 연구팀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실과 업체에 대기시킨 채 새벽 1시에 모든 준비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당시의 시제품은 이후에도 주요행사가 열릴 즈음이면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도 막상 행사 개막이 닥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연구팀은 이 모델을 효자라고 부르곤 했다. 연구팀은 벌써 10년 전 일이고, 또 이 모델에서 일부 부품도 중간에 빼내 써 버렸지만 아직도 이 효자가 잘 작동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열상장비 연구팀이 처음 마련한 열상장비 소개회는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열상장비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돕고 또 개발된 조그마한 장비를 보기 위해 연구소 내외에서 무려 60명이나 참석했다.

이 중 국방부·합참·육군본부에서 참석한 실무진이 11개 부서, 25명이나 돼 연구팀을 놀라게 했다. 기술 설명에 이어 시연(試演)이 시작됐다. 저마다 깊은 관심을 갖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산뜻하게 나타난 영상에 저마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국과연 개발품이 잡아낸 영상에 대한 판정은 유보하고 있었다. 비교할 수 있는 영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좌중은 조용했다. 의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마침내 누군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이거 우리가 교육용으로 갖고 있는 캐나다 도입 장비보다 영상이 훨씬 우수한 것 같습니다.” 육군정보학교 소속 오중섭 소령이었다. “오호!” 비로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소령의 의견은 시제 소개회를 개최한 데 따른 정보 관계관으로서 `인사성'일 수도 있었지만 참석자들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확실하게 붙들었다. 연구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소령에게 외국산 장비와의 비교 시연을 부탁했다. 사실 이때까지 연구팀은 외국산 열상장비 실물을 제대로 분석해보지도 못했고, 때문에 그 화질이 어느 수준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정보학교는 연구진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7월 초, 연구팀은 외국 도입장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개발장비와 비교·분석하기 위해 정보학교로 향했다. 연구팀은 정보학교의 영상 교육장에 도착, 주섬주섬 어설픈 장비를 조립하면서 연방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함께 자리한 학교 측 관계관에게 “이제 처음 국내에서 연구하는 것이라 아직 장비가 볼품이 없다”며 계면쩍어 했다.

냉각장치를 가동한 후 영상이 뜨기를 기다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 초조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모니터에 영상이 잡혔다. 연구팀뿐만 아니라 교관들까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화질의 선명도가 수입장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개발장비가 우수했던 것이다.

1㎞ 전방에 있는 도로를 관측하면서 전봇대 전선을 포착했다. 네 가닥의 전선이 도입 장비에는 두 가닥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던 교관들에게 “교육용(도입) 장비는 아마 그동안 많이 사용해 화질이 저하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제는 장비답게 만들려면 기술이 아직 멀었습니다”하고 겸손히 말했다.

하지만 연구팀 모두 내심 이미 승부가 판가름 난 것을 알고 있었다. 개발 성공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때 녹화된 영상을 연구팀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신줏단지 모시듯 각별히 대우하고 있다.

이후 군에서는 실무자 위주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쓸 만한 열상장비를 개발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국과연에서도 기술연구본부의 대표적 개발 성과로 여겨 이곳저곳 각종 전시에 내보냈다.

대공미사일(KP-SAM) 천마·노봉·무인항공기(UAV) 등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어설퍼 보였지만 정보분야 무기체계의 핵심기술로 `덩치 큰' 체계개발 시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해 10월 서해안 대공사격장에서의 전시에는 공군·육군 참모총장까지 관심을 표명해 연구원들의 자부심을 한껏 올려주었다.

열상장비에 대한 응용연구는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렸다. 국방부가 1993년까지 계획돼 있던 연구기간을 1년 단축, 조기 종결하고 시험개발에 즉시 착수하라는 지시를 하달한 것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는 국방과학연구소의 92년도 우수과제 선정으로 막을 내렸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연구로 얻는 기쁨이 충만한 한 해가 응용연구 종료와 함께 저물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기 전력화 가능성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열상장비는 전자광학장비로 구성이 매우 복잡하다. 일반적인 타 군용장비에 비해 정비 유지 소요가 많이 발생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외국에서 막 도입 운용하기 시작한 열상장비(TOD)는 정비유지 측면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추가로 안고 있었다.

첫째, 야간감시장비로 활용되기 때문에 연간 운용시간이 기존 장비보다 대폭 증가한 것이다. 즉 다른 무기체계의 사격통제 센서로 활용되는 열상장비는 주로 야간작전이나 훈련에만 이용돼 운용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은 데 비해 TOD 장비는 야간에 매일 운용하는 장비다. 따라서 기존에 운용되던 다른 열상장비에 비해 정비 소요가 급증하는 것이다.

둘째, 도입 TOD 장비는 선진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직렬주사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주사장치가 원천적으로 취약한 구조적 특징을 가진 방식이다. 때문에 고장이 잦고 어느 정도 운용시간이 경과하면 주사장치를 교환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셋째, 해외도입 장비로서 갖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도입 초기 정비유지체계도 잘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장이 빈번하고, 또 부품 조달도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정비 소요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군은 이같은 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즈음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겁게 마음을 누르던 문제들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쾌거와 심각한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생겼다. 문제가 있기는 해도 `그래도 TOD'라는 것이었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