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정비장비 너무 크다" 뜻밖에 난관

1990년대 초는 군이 종합군수지원(ILS) 분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종합군수지원은 수명주기 비용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로 점차 획득비용보다 더 많이 소요되는 운용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방안 모색이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방부와 각군은 새로운 업무 규정과 절차를 확립하고 주장비와 ILS요소를 동시에 개발하는 것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열상장비(TOD) 개발사업은 이같은 동시개발 시범사업과도 같았다. 93년 7월 육본 군수참모부는 ILS 실무지침서를 발간한 데 이어 군수사령부에서 관련 세미나를 개최했고 93년 10월 말 TOD의 연구개발 추진 방향이 국방부가 주관하는 회의에서 결정됐다.

이에 따라 실용개발(현 체계개발)에 준한 연구개발동의서(LOA·현 체계개발동의서) 작성이 육군에 요구됐다. LOA는 운영개념에 입각한 요구 성능과 제원, 전력화 지원요소를 포함한 개발 방법·일정 계획을 합의하는 문서다. LOA는 비교적 빠르게 작성됐고 각 실무부서를 거치는 동안 작전요구능력(ROC)과 경제성이 상세히 검토돼 94년 4월26일 확정됐다.

합참에서 LOA가 확정되기 전날, 이와 관련한 연구개발 현황을 보고받던 전력기획부장 조영길(曺永吉·현 국방부장관)장군은 “국방과학연구소는 연구개발이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추진하고, 합참 관련부서는 국내 열상장비의 최초 개발이므로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당부했다.

연구팀장 홍석민 박사는 소비자, 즉 국방부·합참·소요군과 직접 상대하면서 두 가지 기본 원칙을 설정하고 회의 때마다 연구진에 강조했다.
첫 번째는 `약속을 지키자'였다. 즉 소비자의 신뢰가 개발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인데, 사업계획서와 LOA에 담겨 있는 내용이 철저히 지켜지도록 노력했다.

두 번째는 `소비자(소요군)는 왕'이라는 것이었다. 국내 연구개발의 장점 중 하나는 소비자 입맛에 맞게 개발 가능하다는 점이다. 외국 장비를 도입할 때는 사소한 개선요구도 반영하기 어렵지만 개발장비는 개발과정에서 소비자와 충분한 토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팀은 군이 요구하는 개선사항을 무엇보다 우선 반영했고 요구 결과를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가시화해 직접 보여줬다. 시간이 걸릴 경우 실물 크기 모형(mock-up)으로 먼저 제시한 후 후속조치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많은 부분을 소비자 편에서 개선, 운용상 불편을 덜 수 있도록 설계를 과감히 변경했다.

협력업체인 삼성항공(현 삼성탈레스)와 한국광학(현 이오시스템)도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개발에 참여했다. 천신만고 끝에 시제품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부수장비, 차량이 포함된 지원장비, 야전전자정비장비 그리고 ILS요소 개발 등도 하나 둘씩 형태를 드러냈다.

특히 바쁜 와중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전자 야전정비장비는 장비가 3등분된 탓에 캐비닛 2개 정도로 컸지만 연구진에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기판이나 모듈을 장착하고 PC를 이용, 마우스로 톡톡 눌러주면 구성품의 고장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해줄 뿐만 아니라 고장 부위도 주요 부품 단위로 나타나도록 개발한 것이다.

시제품에 대한 기술시험평가계획서를 국방부에 제출할 즈음 연구팀은 자신감을 갖고 이 정비장비 개발내용을 중심으로 한 종합군수지원 실무토의(ILS-MT)를 개최했다. 시연을 본 참석자 대부분이 이 정비장비에 감탄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육본 ILS과에 새로 주무장교로 부임한 이태원 중령이었다. 그는 통신·전자무기체계의 야전정비에 이골이 난 실무장교였다. 한참 생각하던 그가 마침내 눈을 뜨고 의견을 제시했다.

“TOD 장비의 정비 핵심은 얼마나 운용 가용도를 높일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육군은 전자장비류의 기판, 모듈류에 대한 교체교환을 신속히 점검할 수 있는 정비장비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이동정비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 개발장비는 기능을 과다하게 포함, 대형화돼 야전정비 운용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순간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연구팀은 물론 참석자 전원을 경악케 하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정비장비 개발이 완료돼 이제 막 공식 시험을 하려는 순간인데 이 정비장비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견해였다. 회의는 서먹하게 파장을 맞았다.

연구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와서 정비장비의 설계 개념부터 원천적으로 바꿔 다시 시작하라니. 협력업체 삼성탈레스 연구진까지 합세했지만 대안이 없었다. 이동정비를 위해서는 장비의 야전운용 환경성부터 다시 고려해야 했다. 막막했지만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현장 근접지원이 가능토록 이동형 정비장비로 외형을 최소화하고, 차량 이동시 진동·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진동 흡수형 운반상자를 사용했다. 기능은 가급적 기존 개발장비와 동일하게 유지하되 5계단 정비에 해당하는 부품단위 수동검사는 제외시켜 계측기 수를 대폭 줄였다.

컴퓨터는 데스크톱에서 노트북으로 대체했고 전자교범을 내장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이에 따라 기능시험은 기존 개발장비로 우선 실시하되 시험평가 완료 전 보완 정비장비에 대해 추가시험을 실시해줄 것을 건의했다. 육군은 이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일단 생각을 바꿔 보완·개발한다고 방향을 정하니 마음도 편했고 한번 해본 것이어서 진도도 빨랐다.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면서 전방감시용 열상장비 개발과 관련한 기술적 어려움과 핵심적 문제점들은 모두 해소됐다. 그런데 연구개발 자체와는 큰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이던 엉뚱한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규정과 절차'였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