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획득심의회에서 전방감시 열상장비(TOD)에 대한 국내 연구개발 정책 결정이 내려지고 연구개발동의서(LOA:Letter of Agreement·현 체계개발동의서)를 군과 작성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체계 연구개발이 아닌 핵심기술·부품 시험개발 과제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연구진은 이 과정이 군의 무기체계 획득 관련 규정·절차에 부합하는 것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구진은 규정·절차에 거의 문외한이었던 데다 연구개발 과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탓에 이후 처리해야 할 규정·절차에 대해 크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행정 전문이 아닌 과학자로서 이 부분에 대한 이해 부족 정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석민 박사를 비롯한 연구팀은 군의 요구가 LOA를 통해 확정되면서 연구개발 내용·범위가 대폭 확대되고 이에 따라 예산·인력을 추가 편성, 연구계획을 수정하고 현재 진행 중인 사업과 연계해 체계개발로 전환시키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LOA를 확정시키고도 수 개월 동안 과제의 행정적 진행을 옭아매는 사슬이 돼 버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시 사업진행 과정에 제일 먼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제기한 것은 육군이었다.

당시 육군본부 무기체계과장 김영도 대령은 “LOA가 작성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선행개발 또는 실용개발(현 체계개발) 계획이 사전에 국방중기 계획에 반영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LOA 작성이 가능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했고 이 의문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홍박사는 이 문제와 관련, 국방부·국방과학연구소 관련부서 실무자들과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장담하듯 말했다.

“획득심의회에서 이미 국내 연구개발로 획득방법을 결정했고, 또 1993년 10월19일 국방부에서 개최된 전방감시 열상장비(TOD) 연구개발사업 추진회의에서는 가능한 한 빠른 전력화를 위해 선행개발 단계를 생략하고 LOA와 실용개발 계획 승인을 동시에 추진키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군이 LOA만 빨리 작성, 제출하면 실용개발로 전환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LOA가 확정돼야 그에 따른 예산도 추가 반영하고 일정도 확정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추진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호언은 끝내 허언이 되고 말았다. TOD 전체 개발 과정 중 유일하게 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례가 된 것이다. LOA가 확정되고 이를 근거로 시험개발에서 실용개발로 전환해 추진하려던 생각은 관련 실무자를 거쳐 주무과장들의 검토에 이르자 곳곳에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규정·절차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칙대로 사업을 추진한다면 시험개발을 중단하고 복잡한 절차에 따라 사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그러면 연구개발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군의 전력화 시기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사업을 진행해야 할까. 그것은 획득방법이 결정된 획득심의회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세부 추진방안까지 동시에 확정해 지휘결심을 미리 받았으면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업추진이 한결 원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본사항, 즉 획득방안만 결정됐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안들은 `방위력 개선사업 집행방침 및 절차'와 `무기체계 획득관리 규정'에 의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것을 뛰어넘으려면 정책적 결심이 필요한데 이는 실무부서에서 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합참에서 LOA로 개발 목표가 확정됐으나 진행 중이던 시험개발 과제로는 주어진 기간 내에 주어진 개발 요구 내용을 전혀 달성할 수 없었다. 당시 적용되던 무기체계 획득관리 규정(국방부훈령 제431호)의 핵심기술·부품 연구개발 업무절차로는 TOD 사업이 처음 규정된 것이어서 후속 조치에 대한 내용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소요 군도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핵심기술·부품사업이 생소했고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급기야 군 일각에서는 “TOD사업 말이야. 그거 (무기체계)개발사업이 아니라던데”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

연구팀은 당혹스렀다. 제일 난감한 것은 개발 내용이 대폭 증가함에 따라 예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전회에 언급한 차량 탑재 및 야전전자정비장비 등 종합군수지원(ILS) 요소의 동시 개발 요구 등은 물론 시제 1조를 추가해 4조를 요구해온 것이다. 이는 기존의 시험개발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과제책임자 홍박사는 매일같이 연구관리실의 심재운 실장에게 달려가 해결방법을 찾아줄 것을 호소했다. 심실장은 오랫동안 국과연에서 연구계획·연구관리 분야의 실장을 맡아 온 베테랑이었다. 그는 몇 차례 국방부에 사업 추진 방향에 대해 이런저런 건의를 하기도 하고 국방부 실무부서도 관련부서회의를 개최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특별한 해결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과 같이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심실장은 지혜롭게 다른 방안을 찾아냈다. 핵심기술·부품사업으로 계속 추진하되 먼저 LOA에 규정된 모든 개발이 가능토록 예산을 확보해주고, 다음에 군 운용시험을 체계개발에 준해 실시토록 협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심실장이 이때 문제 해결의 키를 찾아냈다면 이 키로 문을 연 사람은 당시 국방부 사업조정관실 실무과장 남궁혁(현 합참 전력발전부 차장·공사22기·준장)대령이었다. 남궁 대령은 예산 증액을 위한 집행계획 변경을 건의받자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개발 단계에서 ILS 요소를 개발하기 위해 예산 증액을 요청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TOD 장비의 연구개발 경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남궁 대령은 숙고 끝에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건의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출처 :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