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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원자력 (1)

2004년 온 나라와 국제사회가 원자폭탄, 원자력 그리고 방사능으로 시끌벅적했다.

한국정부가 안전조치협정에 따라 IAEA에 신고해야 할 활동 즉 우라늄 변환과 농축, 플루토늄 분리제조 등을 (과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이 되었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한국의 우라늄 분리실험 및 플루토늄 실험과 관련, 총 6건의 안전조치협정 위반 여부에 대해 ‘심각히 우려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등 한국 과학자의 핵물질 실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한국 정부가 공개한 총 6건의 안전조치협정 위반 내용은
△ 2000년 1~2월 우라늄 0.2g분리 실험
△ 1982년 4~5월 플루토늄 수㎎ 추출실험 외에
△ 80년대 천연우라늄을 전환해 150㎏의 금속우라늄 생산
△ 천연우라늄을 금속우라늄으로 전환하는 시설 3곳
△ 금속우라늄 150㎏→134㎏ 변동에 대한 신고누락
△ 플루토늄 실험당시 핵연료 등 재처리 여부 표기 누락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핵개발만큼 국제사회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난제는 없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핵문제를 빌미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이란과 핵개발 문제로 다투고 있으며 원자폭탄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의 핵문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과학기술부는 ‘당시 천연우라늄의 국제가격이 너무 비싸 핵연료 국산화 차원에서 0.02퍼센트의 우라늄을 함유한 수입 인광석에서 천연우라늄을 추출하는 연구가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금속우라늄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험관 속의 태풍`일 수 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전망을 다소간 혼란스럽게 한다며 각종 언론들이 다투어서 원자폭탄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에 대해 정부관계자들도 IAEA로서는 다른 나라와의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 한국의 과거 실험에 대해 당연히 우려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지만 ‘핵물질이 무기개발과 관련한 심각한 양에 이르지 않고 우리 정부가 자발적으로 사찰에 임해왔으며 향후 엄정한 사찰을 받겠다고 공개 표명해왔기 때문에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반성문을 제출했음을 인정했다.

한국의 반성문은 2004년 12월, IAEA로부터 인정받아 한국의 과거 핵물질 실험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의장 성명 채택으로 이 문제를 사실상 종결짓는 결실을 얻었다. 과거 핵물질 실험이 무기 개발 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 차원임을 인정한 것이다. 또 한국이 보여준 국제사회와의 협력 의지 및 평화적 핵 이용 4개항 원칙 발표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동안의 국제적 물의를 말끔히 털어 내는 다행스러운 결정이라는 평가였다

여하튼 플루토늄, 우라늄, 원자폭탄이 근래 세계의 화두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산업자원부는 원전수거물관리시설(원전센터) 부지를 중‧저준위와 고준위(사용후 연료)로 나눠 분산 선정키로 방침을 정하고 오는 2008년까지 중‧저준위 폐기장을 우선 건립키로 확정했다.

중‧저준위 폐기물은 원전 종사자들의 작업복과 장비 등 방사능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폐기물을 말하는데, 압축된 뒤 콘크리트로 굳혀 드럼통 속에 보관한다. 반면에 고준위 폐기물에 해당하는 ‘사용후연료’의 경우 중‧저준위 폐기물 처리장에 임시 저장하는 방식을 백지화하고 이를 시민단체와 국회, 정부가 함께 공론화를 통해 논의키로 했다.

산업자원부는 "앞으로 '사용후연료' 관련시설을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부지에 건설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동안 시민단체 및 지역주민들이 제기해온 우려도 해소됐다"고 발표했다.

물론 중‧저준위 폐기장 부지선정을 위한 신규절차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지역주민, 시민사회단체, 학계, 관계 전문가 등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투명한 절차를 마련함과 동시에, 주민수용성 제고 및 갈등해소를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국회에서도 2005년 3월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의유치지역지원에관한득별법'을 통과시켜 정부는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시설을 유치한 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보장했다.

여하튼 우리에게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인 방사능, 원자폭탄, 원자력발전소, 방사능폐기물들은 생겨날 때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대중이 그 실체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알게 되었고, 이들 단어만 들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거부반응과 노이로제를 불러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단점만큼이나 그 효용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12월 초, 필자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의 일원으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영광원자력발전소를 견학하고 원자력발전에 대한 강연회에도 참석했다.

주최 측인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원들을 초청한 이유는 보다 객관적으로 원자력에 대한 이해를 갖고 글을 써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필자는 국정브리핑에서 '과학으로 푸는 우리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기획연재를 하고 있는데 ‘원자력’을 유산이라는 주제로 다룰 수 있느냐는 지적에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원래 유산이란 우리의 근거지 안에 있는 유‧무형의 자산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 유‧무형의 자산을 인간이 꼭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산천에 인간의 작품이 아닌 공룡의 발자국이나 천연기념물과 같은 것이 유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논리가 성립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독도나 백두산, 한라산이 유산 속에 포함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2003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총 수입액은 1,788억 달러인데 이중 에너지 수입액은 384억 달러로 총수입의 21.4퍼센트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많은 양의 에너지를 수입해야 하는 것은 2003년 에너지 총소비량이 2억1,517만 TOE인데 이중 자체조달은 3.1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96.9퍼센트를 해외에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자원빈국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실례지만 바로 한국이 자원빈국이라는 것도 우리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유산이라는 틀에서 에너지를 다루고 그 규범 안에서 원자력을 다루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자력 하면 ‘핵’이라는 말 한 마디로 요약되는데 이것들의 단점이 워낙 부각되다보니 그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조차 기피하는 것도 사실이다. 핵은 인간에게 선인가, 악인가? 그 선악의 정도는 어떠한가? 이것들이 지구상에 생겨난 과정은 어떠한가. 한국을 시끄럽게 만들면서 근래의 화두가 된 이들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을 포함하여 3회에 걸쳐 설명한다.


[사진설명] 뢴트겐 사진.


◆ 세상을 놀라게 한 X선

현대문명이 만든 단어 중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방사능'이다. 국내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물론 재처리 시설을 설치한다고 할 때마다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방사능'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사능이 인간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1895년 11월 8일 뢴트겐은 산란된 형광이 유리관의 벽면에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 검고 두꺼운 종이로 크룩스관을 덮었다. 뢴트겐은 실험실의 불을 끄고 크룩스관의 전원을 켰다. 동시에 가까이에 두었던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스크린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크룩스관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책을 두거나 스크린을 더 멀리 놓아도 여전히 방전 때마다 형광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뢴트겐이 관찰하려고 했던 음극선은 아니었다. 음극선의 위력은 책을 관통할 만큼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무언가가 크룩스관에서 나와서 1미터 이상의 공기를 통과하여 형광 스크린을 빛나게 한 것이다. 뢴트겐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방사선을 X선이라고 불렀다.

그는 X선이 통과하는 길에 사진 건판을 놓고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여 손을 그 사이에 놓도록 하였다. 건판을 현상한 그는 예상대로 손가락뼈가 똑똑히 나타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뼈 둘레의 근육의 모습은 희미하게 나타났다. 역사상 처음으로 산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힌 것이었다.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후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협회에 자신의 발견을 '신종 방사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보냈다. 그의 논문을 접수한 협회는 논문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협회기관지에 게재하도록 서둘렀고 다음해인 1896년 1월 23일 뢴트겐이 구두로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전 세계의 학자들이 그의 발견 내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후 단 1년 동안에 X선에 관한 논문이 1,000종, 단행본은 50권 가량이 출판되었고, 1897년에는 뢴트겐협회가 결성되었다. 그 해 11월 5일 뢴트겐협회에서 톰프슨(Elihu Thompson)이 발표한 내용은 이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견의 역사상 이것만큼 즉각적이고 널리 과학적 응용된 전례는 없다.”

그러나 뢴트겐이 사람을 해부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보았다는 소문은 대중과 공공매체에서 많은 두려움과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뉴저지 주의 한 정치가는 오페라 극장의 쌍안경에 X선 사용을 금하는 법안을 제출할 정도로 X선이 개인의 사생활에 종식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널리 퍼졌다. 런던의 란제리 제조업체는 ‘X선이 통과하지 않음을 보증하는 속옷’을 광고했다.




[사진설명] 탄환을 찾아내다, 1896년 2월 컬럼비아 대학의 푸핀 교수가 X선을 사용하여 손에 박힌 산탄(까만 점)의 위치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었고 곧 X선의 유용성이 나타났다. 뉴햄프셔 주의 한 병원에서 X선으로 골절을 진단하는 데 사용했고 베를린의 어느 의사는 손가락에 꽂힌 유리 파편을 X선으로 찾아냈다. 리버풀의 의사는 X선으로 소년의 머리에 박힌 탄환을 확인했고 맨체스터의 교수는 총 맞은 여자의 두부를 촬영했다.

이후 X선이 응용된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X선이 갖고 있는 과학과 의학에서의 잠재력을 파악한 노벨상위원회에서 1901년 제1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뢴트겐을 선정한 것은 최초의 수상자라는 명예에 걸맞은 것이었다.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계의 과학자들은 모두 놀라면서 그 현상을 재현하려고 했다. 파리에 있는 에콜 폴리테크닉의 물리학 교수였던 앙리 베크렐(1852∼1908)이 자발적으로 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을 발견했고 퀴리 부부가 우라늄보다 400배나 방사능이 강한 새로운 물질인 폴로늄과 200만 배 더 강한 라듐을 발견했다.

베크렐과 퀴리 부부에 의해 방사성 물질이 발견됨으로써 ‘원자야말로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어떤 방법으로도 쪼갤 수 없다'는 당시 과학자들의 믿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이 발견한 방사선은 극히 미세한 물질입자를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원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자보다도 더 작은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리 퀴리는 우라늄에 의한 방사선은 그것의 화학적 반응과 관계없는 우라늄 원자의 성질이라고 믿었다. 또한 방사능의 강도가 방사능 시료인 우라늄 양에 관계있음도 확인했다. 방사능 물질에서 나온 방사선은 X선보다 투과성이 더 크고 에너지도 더 컸다. 이 방사선은 나중에 감마선으로 밝혀졌다. 마리 퀴리는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을 비롯하여 폴로늄이 이상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방사성(방사능)'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X선을 포함한 방사선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뢴트겐과 베크렐이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방사 분야에서 마리 퀴리가 더욱 중요시 생각되는 것은 그녀가 ‘방사능’이란 단어를 제창한 것은 물론 방사선의 원리에 대해 이론적인 토대를 세웠기 때문이다.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마리 퀴리가 방사능이라는 이상한 성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표하자 학자들은 과거부터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한 미소세계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단점만큼 효용성이 큰 핵 (1)-(3)」, www.sciencetimes.co.kr(한국과학문화재단), 2004.10.4-10.18)>을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에서는 원자폭탄이 개발되는 과정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사진설명] 큐리 부부의 사진.


◆ 인공적인 방사능 물질 창조 가능

페르미는 중성자와 충돌할 원자핵 사이에 어떤 물질을 두면 중성자의 충돌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속도가 감속된 중성자가 원자핵을 지날 때 원자핵은 그 중성자를 잡아당겨 충돌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속도를 늦춘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인공 방사능 물질의 방사능은 더욱 커지게 된다는 점이다. 페르미는 이 연구로 193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때 한 명의 독일 과학자가 페르미의 연구에 주목했다. 바로 오토 한(Otto Han)이다. 원자핵은 분열해서 안정된 원소가 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두 원자핵이 결합해서 안정된 핵이 되려는 경향도 있다. 작은 원자핵이 결합해서 더 안정된 큰 원자핵으로 변해 가는 것을 핵융합이라 하고, 큰 원자핵이 분열해서 작고 안정된 원자핵으로 변환되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한다. 이때는 대개 반응에 참가하는 물질과 생성물질의 질량 사이에 차이가 나게 되는데 이 차이에 해당하는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방출되는 것이다.

오토 한은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에 바륨을 첨가한 후 분리시키면 바륨이 방사능을 띤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이론이다.

곧바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한의 이론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고 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증거가 수없이 발견되었다. 이제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꿈에 그리던 원소를 변환시킬 모든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학자들은 핵분열 시에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실제로 1그램의 우라늄이 분열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는 3.2톤의 석탄, 267리터의 석유, 21톤의 TNT가 내뿜는 에너지와 비슷하다. 더구나 각 단계의 반응이 일어나는 시간 간격이 겨우 50조 분의 1초밖에 되지 않으므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기 때문에 핵분열에 의한 반응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사진설명] 노벨상 시상식장에서 펄벅 여사와 함께 앉은 페르미, 페르미는 중성자와 충돌할 원자핵 사이에 어떤 물질을 두면 중성자의 충돌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발견했고 이것이 원자력을 산업에 이용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원자핵들은 어느 정도 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러한 핵반응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핵분열반응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중성자로 핵을 때려야 하고,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입자를 큰 속도로 가열하여 충돌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라늄의 연속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거대한 실험 장비와 예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구에서는 이런 때에 항상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해결책을 제시한다. 변수는 역시 전쟁이었다. 오토 한은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스웨덴에 있던 리이저 마이트너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보어의 공동 연구자이던 오토 프리시와 상의하였다. 프리시는 마침 미국으로 출발하려던 보어에게 한이 발견한 핵분열에 대한 실험을 설명했다.

문제는 오토 한이 독일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가 나치에 협조하여 핵폭탄 개발에 발 벗고 나선다면 세계는 온통 나치의 치하로 들어갈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상했다. 물론 후일담이지만 오토 한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는커녕 오히려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여 태업 아닌 태업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추후에 밝혀졌다.

여하튼 오토 한의 의도를 모르는 과학자들은 나치에 의해 원자폭탄이 개발된다는 것을 가장 큰 악몽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핵분야 과학자들에게 무분별한 논문발표를 자제해 줄 것을 호소했다.

결국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에 망명 중이던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우라늄의 붕괴가 지닌 잠재력을 지적하면서 나치에 앞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1939년 8월 2일자인데 그 편지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11일이었고 그 동안에 유럽에서는 우려하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마침내 미국은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요구하는 대로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하였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나 이관수 박사는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약간 다르다고 지적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계기로 설치한 우라늄위원회(Uranium Committee)는 딱 두 번 모임을 가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진설명]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 독일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라

엄밀한 의미에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계획은 페르미가 성공한 원자핵분열 제어를 대규모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계획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뉴멕시코 사막 로스앨러모스에 건설된 원자탄 연구소에서 진행되었다. 오펜하이머(John Robert Oppenheimer)가 소장인 이 연구소에서 진행된 원자탄 개발 프로젝트가 바로 유명한 ‘맨해튼 계획'이다.

맨해튼 계획을 실무적으로 총괄 주도한 사람은 전기공학자 베너버 부시(V. Bush)였다. 부시는 전미국방개발위원회(NDRC)의 초대 의장이었는데 1941년에 신설된 대통령직속 과학연구개발국(OSRD)의 장으로서 미국의 전쟁연구개발 체제를 총괄하고 있었다. 부시의 주도아래 1941년 11월 원자폭탄 개발 방향이 제시되었는데 마침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자 10일 후에 당시 부통령 월러스가 참석한 회의에서 부시가 제안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승인되었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승인되자 ‘맨해튼 계획'은 실무책임자로서 육군성의 그로브즈 장군이 지휘했다. 극도의 기밀 유지를 위해 각 개인들의 이름이 사라졌다. 가슴에 붙은 배지 번호가 이름을 대신했는데 오펜하이머 소장의 번호는 ‘47'이었다. 주소도 암호로 사용했다. 로스앨러모스라는 지명은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국에서 사라졌다. 우편물은 모두 한 곳에 모아졌고 전부 개봉되었다. 전화가 도청되는 것은 물론 모두 녹음되었다.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실제로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이 원폭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앞장 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는 전격작전으로 폴란드를 침공했고 1940년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이어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치가 벨기에를 점령하자 영국은 벨기에령 콩고가 나치의 수중으로 들어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당시에 벨기에령 콩고에서 상당량의 우라늄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토 프리시와 루돌프 파이얼스는 핵폭탄의 제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즉 순수 우라늄235에는 충분히 빠른 연쇄반응이 존재하며 우라늄235를 분리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안했다.




[사진설명] 오크리지의 우라늄농축공장.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오토 프리시 등이 원자폭탄을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자 영국은 재빨리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모드위원회(Maud Committee)를 신설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이관수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41년 7월에 비밀리에 발간된 영국의 모드위원회(MAUD, 보어가 영국에 보낸 전보에 MAUD양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영국 물리학자들은 이 전문은 암호로 독일이 원폭을 개발하고 있다는 내용이라고 착각했으므로 모드위원회를 붙였다)에서는 10킬로그램 정도의 우라늄 235가 있으면 원폭을 제조하는데 충분하며 원폭을 항공기에서 투하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특히 원폭을 제작하는데 약 2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모드위원회의 결론은 원폭 제작을 진행 중인 독일이 먼저 원폭을 제작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독일 공군의 폭격 범위에 들어 있는데다 영국에서 원폭제조에 필요한 설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에 모드위원회 보고서를 넘겼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독일이 오토 한과 또 다른 과학자에 의해 미국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이다. 그는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친 연구에서 이미 원자로와 원자폭탄의 기본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갖고 있었다.

1941년 10월에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코펜하겐을 방문하여 미국으로 탈출하기 직전의 스승인 보어를 만났다. 나치의 엄중한 감시 때문에 두 사람은 은밀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핵반응에 대해 언급하면서 원자로의 윤곽을 설명했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전시에 물리학자가 우라늄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 당시 비밀리에 미국의 연구에 관여하고 있었던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을 독일이 원폭에 대해 많은 진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보어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을 전해들은 원자폭탄 관련자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 역시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만나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에 관해 질문했다는 자체를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어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오토 한과 같이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제조하려는 계획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추후에 그는 원자폭탄 제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히틀러에게 말하지도 않았음이 밝혀졌다. 오히려 독일의 항복 이후에 연합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억류 상태에 있던 그는 일본이 미국에서 투하한 원자폭탄 때문에 항복했다는 것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이 끝나자 1948년에 '카이저빌헬름연구소'를 해체하고 '막스플랑크연구소'를 창설하여 그 소장이 되었다. 독일은 전쟁의 참패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운 면이 많았는데도 계속 과학 분야에서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창설한 막스플랑크연구소 때문이라는 것이 설도 있다.


◆ 원자폭탄 투하

우라늄은 지각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원소로 1톤의 암석에서 평균 2그램 정도 얻을 수 있다. 우라늄238은 일정량 이상의 에너지를 가진 중성자에 의해서만 분열을 일으키는데 우라늄235는 간단한 열중성자에 의해서도 분열된다. 그러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우라늄을 정제하면 99.3퍼센트가 우라늄238이고 0.7퍼센트만이 우라늄235이다. 따라서 천연 우라늄에서 핵폭탄을 제조하는 데 충분한 우라늄238을 분리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도 전쟁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했다. 우라늄238을 얻기 위해 평화시였다면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폐기되었을 기체 분사식이란 방법이 채택되었다. 이 방법은 우라늄의 혼합물을 원심 분리기에 넣고 회전시키면 우라늄238보다 1.3퍼센트 정도 가벼운 우라늄235가 분리되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기체 분사식의 첫 번째 문제는 우라늄을 기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 우라늄을 6개의 불소와 화합시키는 ‘6불화우라늄'이라는 휘발성 액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화합물에서도 우라늄235를 가진 것이 우라늄238을 가진 것보다 1.3퍼센트 정도 가볍기 때문에 기체 분사에 의해 충분히 분리될 수 있다.

원자폭탄을 만들 정도의 많은 양을 모으려면 6불화우라늄 증기가 높은 기압 아래서 수천 개의 구멍이 나 있는 장애물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런 시설을 갖추려면 엄청난 예산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전쟁에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미국으로 하여금 20억 달러를 들여 공장을 세우게 한 것이다. 이때 6불화우라늄의 용기로서 극비리에 개발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비밀이 해제되자마자 일반 가정에 판매되어 호평리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있다. 현재 가정주부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주방기기 중에 하나인 ‘달라붙지 않는 프라이팬’에 사용되는 테플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라늄235를 다량 확보하는 것이 워낙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과학자들은 우라늄235가 아닌 또 다른 핵분열의 원료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플루토늄239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로마로 신화의 무대를 옮기면 넵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바로 이 넵튠에서 넵투늄(1940년 5월 버클리대학의 에드윈 맥밀런과 에이블슨이 발견)이라는 원소의 이름이 비롯된다. 천연 상태의 우라늄239에 중성자가 하나 흡수될 때, 우라늄은 넵투늄239로 변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이 넵투늄이 며칠 지나면 구조가 바뀌어서 또 다른 물질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하데스는 지옥의 신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플루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플루토에서 플루토늄(1941년2월 버클리대학의 시보그와 세그레가 발견)을 유추해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라늄238을 핵변환시켜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다는 뜻에서 ‘지옥의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여하튼 일본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플루토늄239로 만들어진 것이다.

‘맨해튼 계획' 팀은 1945년 핵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를 정제하였다. 그들은 로스앨러모스(우라늄 농축 및 관련 연구는 테네시 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담당)로부터 300킬로미터 떨어진 뉴멕시코 주 앨러모고도 트리니티사이트에서 원폭 1개를 실험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의 일이었다. 이때의 폭발 장면을 목격한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 실험이 성공하자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30초, 서태평양 티니안섬 기지를 출발한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상공 9,600미터 지점에서 원자폭탄을 투하, 인구 30만 명의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에놀라 게이'는 B29 조종사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에서 딴 이름이고, 지름 71센티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4톤의 원폭 1호는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사진설명]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과는 달리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만든 것이다.


공습경보가 한 차례 지나가고 시민들이 막 일상으로 돌아가던 때, 원자폭탄이 도시를 강타하자 오렌지 빛 섬광과 엄청난 불덩이가 치솟으며 도시의 60퍼센트가 파괴됐고 폭심지(爆心地)로부터 반경 500미터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첫 번째 원자폭탄은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239로 만든 두 번째 원자폭탄 ‘뚱뚱한 사람(fat man)'을 떨어뜨렸다. 두 개의 원자폭탄이 가진 위력은 TNT 3만 5천 톤과 맞먹는다. 일본의 선택은 항복뿐이었다.

자료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히로시마에서 최소 10만 명이 사망했으며 건물 7만 채가 반파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도 1945년 말까지 7만 명이 사망하게 만들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된 배경으로 당시의 국제 정세를 무시할 수 없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의 일본 참전 기한은 석 달 후인 1945년 8월 8일로 정해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 이미 전쟁이 종료되면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과의 대립을 예상하고 있었다. 종전 후 국제사회에서 우세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미국만의 힘으로 일본이 항복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원자폭탄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시보오그(Glenn Seaborg)는 원자탄의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6월, 일본 참관인이 참석한 가운데 원자탄의 효력을 보여주어 일본 본토에 이 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항복하게 해야 한다는 건의안이 제시되었다. 이 건의안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다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내막은 잘 모르나 결국 투르먼 대통령이 일본에 폭탄을 사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중략) 나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시 나를 괴롭힌 것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번째 폭탄이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히로시마 투하 후 어째서 일본의 반응을 좀 더 지켜보지 않았는가 궁금하다. 나는 히로시마 폭탄으로 결국 일본이 실상을 알아 항복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 결론적으로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에 놀란 학자들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히틀러와 같은 적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핵폭탄 제조에 참여한 학자들은 심한 동요를 일으켰으며 핵폭탄이 갖고 올 파장을 우려하여 더 이상의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때 원자탄 개발과 관련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사망하기 5개월 전인 1954년 11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원자탄 제조를 추천하는 편지에 서명했을 때 나는 일생에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 그러나 독일인이 만들려고 할 것이라는 위험성의 점에서 어떤 정당성이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반면에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 태어나자 환영한 학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 사용되어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데 이용되기도 했지만 도로나 교량 건설, 광산 등에서 평화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핵도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원폭의 폭발력이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위력적이므로 댐과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건설 계획에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구의 건설, 해협을 파는 것, 암석 파괴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소박한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마리 퀴리가 명명한 ‘방사능'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3. 21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5-03-21 15: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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