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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죽어도 모르는 독도이야기 (2)
고려 최충헌 "해산물 풍부한 우산국 개척하라"

[사진설명] 울릉도.

신라에 복속된 후 우산국은 잊혀진 나라가 됐다. 우산국이란 이름은 400년이 넘도록 역사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우산국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려 태조 13년(930년)이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자 우산국에서는 새 왕조에 토산물을 바쳤다. 백길(白吉), 토두(土豆)라는 울릉도 사람 둘이 공물을 가지고 왕을 찾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백길에게 정위(正位), 토두에게 정조(正朝)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이들이 받은 벼슬은 향직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이처럼 울릉도는 6세기 초 이후 신라와 고려에 공물을 바침으로써 내륙과 조공관계를 맺어 왔다. 우산국의 지배자는 후삼국기의 성주와 같은 존재였다. 고려사 덕종(德宗) 원년(1032년) 11월에도 ‘우릉(울릉도)성주(芋陵城主)가 아들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증명한다.


◆ 고려 여진족 피해 우산국에 농기구 지원

우산국은 90년 쯤 뒤인 현종 9년(1018년)에 동북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일부 주민들은 여진족에게 잡혀가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배를 타고 내륙으로 피난했다. 농기구를 빼앗기는 바람에 농사도 망쳤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원구를 시켜 동북 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내 주었다. 다음 해에는 내륙으로 피신 온 우산국 사람들을 귀환시켰고, 일부는 경상도 영해 지방에 살 수 있도록 했다. 여진족에 잡혀갔다가 도망쳐온 사람들은 예주(禮州)에서 살게 해주었다.

여진 해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데, 일본 기록에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1019년 여진족이 50척이나 되는 배를 이끌고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내려와 463명을 죽이고 1,230명을 잡아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해적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대개 고려인이었다고 한다. 여진 해적에 잡혀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022년까지 쓰여 오던 우산국이라는 호칭은 이후의 역사 기록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덕종 원년(1032년)을 마지막으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우산국이 11세기 초엽 동북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급격히 쇠망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세기 중엽에는 관원들이 파견되어 울릉도를 관리했다. 의종 11년(1157년)에는 내륙인을 이주시킬 계획도 추진되어 명주도감창사(溟洲道監倉使) 이양실이 울릉도를 다녀왔다. 그에 따르면 “섬 가운데 큰 산이 있고, 이 산정에서 동쪽 해안까지가 1만 5,000여 보, 북쪽 해안까지가 1만 3,000 여 보, 남쪽 해안까지가 1만 5,000여 보, 북쪽 해안까지가 8,000여 보에 달했다. 7군데 촌락과 석불(石佛), 철종(鐵鐘), 석탑(石塔) 등의 유물이 있으나, 암석이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이 무렵의 울릉도는 울릉도·우릉도(羽陵島)·우릉도(芋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려졌다.


◆ 파도에 침몰 ·왜구 변수 이주정책 실패

[사진설명] 고려사에 등장하는 왜구.

울릉도에 사람들이 다시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충헌에 의해서였다. 최충헌은 울릉도가 기름지고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주민들을 실은 배는 바람과 파도를 만나 침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주정책은 실패했다. 왜구라는 해적들도 변수였다. 고려 고종 10년(1223년)부터 시작되어 조선 세종 원년(1419년)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까지 196년 동안 500여 회나 쳐들어왔던 왜구 때문에 울릉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되었다. 하지만 몰래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울릉도는 해산물이 풍족하고 비옥한 옥토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곳에는 자유가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때때로 관리들을 보내 사람들을 잡아 육지로 끌고 나오곤 했다. 사람이 있으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재 일본은 이점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울릉도는 비어있는 섬이었으며, 조선이 영유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울릉도와 독도 관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김성호 :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도연구회’와 인연을 맺었다. 1988년 울릉도-독도 뗏목 탐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독도를 탐사하고, 독도를 주제로 한 각종 전시회를 진행했다. 1993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40주년 기념행사, 2005년에는 독도폭격사건 희생자 위령제를 진행했다. 주요 저서로 <재미있는 대학여행>, <한국의 만화가 55인> 등이 있고, 공저로 <친일변절자 33인>,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등이 있다.

< 출처 : 국정브리핑, 2006. 3. 8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6-03-08 17: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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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allnet 김성호 :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도연구회’와 인연을 맺었다. 1988년 울릉도-독도 뗏목 탐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독도를 탐사하고, 독도를 주제로 한 각종 전시회를 진행했다. 1993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40주년 기념행사, 2005년에는 독도폭격사건 희생자 위령제를 진행했다. 주요 저서로 <재미있는 대학여행>, <한국의 만화가 55인> 등이 있고, 공저로 <친일변절자 33인>,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등이 있다. < 출처 : 국정브리핑, 2006. 3. 13 > 정말인지 부끄러운 문화답사 국사 였습니다.. 부끄럽지 안은 호국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악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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