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궁예가 걸어간 길이 DMZ가 됐다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그러나 1000년 전 그 상상의 길 위에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정전협정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조항’은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에 1292개의 표지 말뚝을 세우고 이 선 좌우 2㎞ 구간을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이라는 완충지대로 만들자고 약속하고 있다. 임진강 하구는 군사분계선 제0001호 표지 말뚝이 서 있는 곳이니까 분단의 출발선이 그 강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고대의 각축장이었다. 임진강을 먼저 장악한 백제를 필두로 고구려·신라가 가세한 삼국시대의 쟁탈지다. DMZ에 즐비한 산성·보루 등 고대 관방 유적이 그 증거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성재산성은 병자호란 때 평안절도사 유림과 관찰사 홍명구가 근왕병 2000명과 모집 의용병 300여 명으로 10만 호군을 맞아 싸운 곳이다. 1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했다. 훗날 그들의 유골을 모아 커다란 무덤을 만들었다. 높이 7m, 폭 20m의 그 무덤, 전골총은 지금 철책선 안에 들어앉아 있다.

휴전선을 따라 동으로, 서로 가다 보면 어디나 호란·왜란의 침탈로이고 격전지다. 훗날 그 자리에 일제가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았다. 그러나 그 길도 중일전쟁·러일전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보급로였다. 그리고 반세기 전에는 그 자리가 북한군의 남침 루트가 됐고 그때 그 전장은 분단현장이 됐다. 역사상 단 한시도 전쟁을 쉬어 본 일이 없는 곳이 그곳이다.

그러나 50년이 넘도록 꼼짝 않고 있는 이 냉전전선은 너무 길고 지루하다. 우리는 이 분단현장, DMZ가 가만히 시간만 까먹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DMZ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어딘가 낱낱이 기록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우리가 임진강변 고성의 이끼 낀 바위에서 신라·백제·고구려의 각축을 읽듯이 후손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오늘을 읽으려 할 게 틀림없다. 따라서 DMZ는 동서 냉전 유적지인 것이다.

동해안에서 서해안에 이르기까지 전 전선에는 유난히 비석이 많다. 나는 그 비석들에 새겨진 깨알 같은 글씨를 읽으며 휴전선을 따라가 본 적이 있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동해안 마을 광산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화랑사단 전적비가 있었다.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는 351고지 전투 전적비, 진부령 정상에는 향로봉지구 전적비, 양구군 해안면 돌산령에는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남긴 도솔산 전투 전적비, 그 산을 내려오면 양구군 동면 임당리에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 월운리에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 양구군 방산면에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 화천군 파로호변에 파로호 기념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에 조국과 자유수호 전적비, 화천읍 대이리에 643고지 전투 전적비, 화천읍 사내면 사창리에 사창리지구 전투 전적비. 철의 삼각지대로 일컫는 철원 땅은 그런 비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삼천봉지구 전투 전적비, 대성산지구 전투 전적비,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비석들은 한결같이 반세기 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낱낱이 증언하고 있었다. 그 기록들을 역사 위에 올려놓았더니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DMZ에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역사가 낱낱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DMZ를 전쟁사박물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지금 그곳에서 병사들이 신(新)냉전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 함광복 강원도민일보 논설위원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2.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