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령 도망할 제 거동 보소. 인궤(印櫃) 잃고 과줄 들고, 병부(兵符) 잃고 송편 들고, 탕건(宕巾) 잃고 용수 쓰고, 갓 잃고 소반(小盤) 쓰고, 칼집 쥐고 오줌 누기.”

이 구절은 전통 소설 ‘춘향전’에서 각 고을 수령들이 암행어사가 출두한 후 도망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인궤·병부가 지방 수령의 소중한 소지품인 데도 그것을 잃어버릴 만큼 수령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의미다.

인궤는 관아에서 쓰는 도장을 넣어 두는 나무 상자다. 그렇다면 병부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지방 수령이 항상 휴대했을까.

전쟁기념관의 박재광 학예관은 “병부는 병력 동원을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신호용 표식”이라고 설명했다. 병부는 좌우 두 조각으로 나누어진 둥글고 납작한 형태의 나무 패(牌)로 지름이 7cm , 두께가 1cm 정도 된다.

병부는 발병부(發兵符)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밀부(密符)라고도 불렀다.

조선 후기의 표준 법전인 ‘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 밀부는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데 왼쪽 조각은 궁궐에 보관하고 오른쪽 조각은 관찰사·통제사·수어사·총융사·절도사·방어사 등 군 지휘관 자격이 있는 무장이나 지방 수령에게 지급했다’고 한다.

실제 병력 동원을 할 때는 군 지휘관이 보관하고 있는 밀부의 오른쪽 조각과 궁궐에서 보관하는 오른쪽 조각이 일치할 경우에만 병력 출동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밀부 실물을 보면 표면에 제○부(符)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숫자가 일치할 경우에만 병력 동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 ‘ 조선왕조실록’에는 밀부의 좌우 조각이 일치하지 않아 큰 소동이 일어났던 사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종(中宗) 29년 8월 임금이 황해도 관찰사에게 병력 출동을 명령했다. 임금의 명령을 전하러 간 선전관이 휴대한 밀부는 제23부였으나 황해도 관찰사가 가지고 있는 밀부는 제10부였던 것이 문제였다. 밀부의 번호가 틀린 것을 이상히 여긴 황해도 관찰사는 출동 명령이 정말 임금이 내린 것인지를 의심, 병력 출동을 망설였던 것은 당연한 일.

임금을 보좌하는 비서관인 승지(承旨)들의 실수로 잘못된 밀부가 전달된 것이다. 중종은 이 사건에 분노, 요즘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都承旨)를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 군대 운용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인 병부나 밀부의 실물 유물은 흔하지 않으며 서울역사박물관에 조선 후기의 밀부 1점이 소장돼 있을 뿐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5.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