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군이 어우러져 싸우면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도 수없는 변화가 생기네. 좌우전후 이리저리 헝클어져 눈코 뜰 사이 없이, 호령도 통하지 않고 고함도 들리지 않네.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의 차이가 생기는 법, 무엇으로 정돈하는가. 징과 북, 기(旗)와 휘(麾)로세. 나갈 때는 북을 울리고 물러설 때는 징을 친다네. 휘로써 지시하고 나팔로써 경고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네.”

이 시는 조선 건국 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37~1398)이 지은 ‘금고와 기휘의 찬가’(金鼓旗麾總讚)의 일부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 지방을 수복하는 것이 개인적 꿈이었던 정도전은 병법에도 관심이 많아 병법 서적인 ‘진법’(陣法)을 저술하기도 했다. ‘진법’에 실려 있는 ‘금고와 기휘의 찬가’는 전쟁에서 신호용으로 사용하는 깃발·금고·북·나팔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찬하기 위해 지은 시다.

정도전이 지적했듯이 실제 전쟁터에서는 ‘호령도 통하지 않고 고함도 들리지 않는 것’이 실상이기 때문에 북이나 나팔·깃발을 사용, 지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깃발은 더욱 중요하다. 깃발은 신호용으로 뿐만 아니라 의장용으로 군대의 필수 품목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군대에서 사용했던 군기와 의장기는 100여 종류가 있지만 현재 전해 오는 것은 20여 점에 불과하다. 깃발 중에서 각 부대 지휘관의 직책을 표시한 사명기(司命旗)는 서울 육군박물관에 2점, 진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1점이 전해 온다.

특히 해사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삼도주사사명기(三道舟師司命旗)는 매우 진귀한 유물이다.

해사 박물관의 정진술 기획실장은 “해사에 소장돼 있는 사명기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사명기, 다시 말해 조선 시대 수군의 총지휘부를 상징하는 깃발인 만큼 의미가 큰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전투 현장에서 지휘부를 상징하는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도 상징성이 큰 깃발이지만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노획해 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1점이 소장돼 있을 뿐 현재 국내에는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 왕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 궁중유물전시관에도 조선 시대 군기와 의장기가 10여 점 소장돼 있다. 그중에서 좌독기(坐纛旗)가 주목할 만한 유물이다. 좌독기는 부대가 출전하기 전 병사들이 모두 입에 피를 바르고 맹세할 때 사용했다. 혹은 군형법을 위반했을 때는 좌독기 아래에서 처형하기도 했다. 주술적 힘과 군법의 위엄을 동시에 상징하는 깃발이 좌독기인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월드컵 공원에서 열린 세계 깃발 축제에는 100여 종에 달하는 조선 시대 군기와 의장기가 복원·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축제 종료 후 깃발이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고 흩어져 지금도 이를 아쉬워하는 관계자들이 많은 실정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6.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