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총화력의 네 배에 달하는 800만 톤의 폭탄 투하, 54만 명의 미군 주둔, 2400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戰費) 지출, 8000명의 공군을 포함한 5만7000명의 미군 전사, 그리고 5700대의 비행기 손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얻은 초라한 성적표다. 절대적인 객관적 우위 속에 길고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역사는 두고두고 미국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군이 고전한 데에는 우림 속에서 신출귀몰하는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이 주효했다. 미군은 작전 수행에 장애가 되는 밀림 지대의 수풀을 제거하고 게릴라의 은신처를 파괴하기 위해 소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불리는 제초제를 대량 살포한다.

에이전트 오렌지란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쓴 고엽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담은 드럼통의 줄무늬가 오렌지색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1964년 7월부터 70년 10월까지 무려 7년간 베트남 전 국토의 18%에 달하는 지역에 1200만 갤론의 고엽제가 살포됐다.

베트남 전쟁 실패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 전에 미국은 또 다른 문제로 술렁인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참전 군인이 피부 질환·무력증에 시달리면서 일상생활도 어려워진 것이다.

관련 당국은 참전 군인들이 전쟁에 참가한 심리적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을 뿐이라며 애써 진화에 나섰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일부 호주·뉴질랜드 군인들에게서 암이 발병하고 선천적 기형을 동반한 2세가 태어나면서 뉴욕 지방 법원에 고엽제 제조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된다. 종전 후 베트남 사람 가운데 기형아 출산이 12배나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

고엽제의 주성분인 다이옥신(dioxin)은 1872년 독일의 화학자가 합성해 낸 물질로서 독성이 청산가리의 1만 배에 달한다. 1976년 7월10일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지역 세베소라는 마을에 위치한 제약 회사 공장에서 다량의 다이옥신이 누출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다이옥신은 90% 가량이 쓰레기 소각장에서 배출되고 산업 폐수나 담배 연기 속에도 일부 포함돼 있는데 인체에 축적될 경우 각종 암은 물론 남성의 정자 감소, 여성의 불임, 당뇨병 등의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환경 호르몬으로 익숙한 다이옥신이 최근 우크라이나의 야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 빅토르 유시첸코에게 중독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유시첸코 후보의 얼굴을 흉측하게 만든 다이옥신 중독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음모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어 26일 실시되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재투표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온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파월 장병 가운데 수천 명이 고엽제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겪고 있다.

오래 전부터 구소련의 정보 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요인 암살을 위해 다이옥신을 사용해 왔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인류에게 수많은 고통을 안겨 준 다이옥신의 악몽이 오늘날 테러로 재연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국방부 근무지원단 의무실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12. 2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