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펼쳐지면서 인류는 1918년 스페인 독감,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그리고 1977년 러시아 독감 등 네 차례에 걸친 독감의 대유행으로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이 가운데 5억 명이 감염돼 4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스페인 독감은 피해 규모에 있어 단연 압도적이다.

때는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1918년 3월11일 아침, 미국 캔자스 주 포트 라일리의 캠프 펀스턴(Funston)에 근무하고 있던 군의관 에드워드 슈라이너에게 중대 취사반원 한 명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며 찾아온다. 바로 이어 부대 하사가 같은 증세로 찾아오고, 이렇게 시작된 환자가 점심 때까지 100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해 3월 말까지 포트 라일리의 병력을 포함한 미군 8만4000명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고 4월에는 11만8000명이 파병 길에 올랐다. 5월이 되자 프랑스군에도 같은 증상을 보이는 군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여름이 되면서 이런 추세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갔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비교적 평온했던 스페인에서는 왕실의 근황도 좋은 뉴스거리였는데 마침 스페인 국왕이 독감을 앓게 되자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 일을 계기로 유럽인들은 당시 유행한 독감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렀는데 따지고 보면 이 독감은 미군이 유럽으로 건너가 퍼뜨린 셈이다.

태풍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성의 이름을 붙이듯 유럽인들은 스페인 독감을 ‘붉은 아가씨’(Red Lady), ‘스페인 아가씨’(Spanish Lady) 등의 애칭으로 정감 있게 불렀지만 기대와는 달리 독감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같은 해 9월12일 미국 매사추세츠의 군 캠프에서 한 군인이 독감 진단을 받은 이후 보름도 안돼 1만2604명의 군인이 독감에 걸렸으며 보스턴 시민의 10%가 독감에 걸려 이 중 3분의 2 가량이 사망했다.

8월에서 10월에 걸쳐 미군의 20%가 독감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1차 세계대전때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미군 3만4000명과 비교해 독감과 그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한 미군이 2만4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독감의 위력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같은 시기 독일·영국에서도 독감으로 각각 40만 명, 22만80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나이지리아에서도 불과 6개월 동안 50만 명이 독감으로 숨졌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인도의 경우 약 16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당시 일제 강점기였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미국 의사협회지(JAMA)에 ‘조선에서의 스페인 독감 보고’라는 제목으로 실려 전해지고 있다.

1997년 미 육군 병리학 연구소가 알래스카에 묻혀 있던 여성 희생자와 1918년 독감으로 사망한 미군 병사 두 명의 시신에서 스페인 독감의 바이러스 유전자 일부를 찾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감춰져 있던 독감에 대한 신비를 푸는 데 한층 진일보하게 된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시와 케리 후보 진영에서는 정부의 독감 백신 확보가 충분한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스페인 독감으로 호된 경험을 치른 바 있는 미국으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 국방부 근무지원단 의무실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1. 6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