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려면 과거를 보라’는 역사적 이치가 요즈음처럼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다. 오늘은 1200년쯤 훌쩍 건너뛰어 8세기로 가 보자. 751년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연합 세력과 당나라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국경에서 탈라스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의 중국 측 지휘관이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었던 까닭에 최근 국내에서 조명받고 있으나 아직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은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중국이 패함으로써 중앙아시아는 중국의 문화권에서 이슬람 문화권으로 넘어갔으며 패잔병으로 끌려간 중국의 제지(製紙) 기술자들은 유럽에 인쇄 문명의 기틀을 제공한다. 물론 아시아와 아랍권의 충돌이 이것만은 아니다. 1258년 몽고군은 바그다드를 정벌해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동서양 문명 교류사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쌓은 정수일 교수는 “서구인들이 말하는 문명 충돌이란 문명 발달의 대하(大河) 속에 있는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하며 문명은 끝없이 교류한다”고 설파했다.

오늘날 중국이 동남아·중동·아프리카·남미 등 세계 각지로 물밀듯 밀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단지 기마병 대신 국영 기업들이 중심이 돼 경제 전쟁의 형국을 띠는 차이일 뿐이다.

이슬람 문명과의 교류가 어디 중국만의 일일까. 이미 신라 시대에 많은 무슬림이 이 땅을 방문하고 정착했다. 아랍 상인 술라이만(al-Sulaiman)은 이미 871년 신라가 중국 동쪽에 위치한 국가라는 점을 그의 여행기에서 밝히고 있다.

알 이드리시(al - Idrisi)는 서방 지도보다 408년 앞선 1154년에 이미 세계 지도에 한국을 표시하고 있다. 당시 아랍 무역상들은 신라를 좋은 자연 환경에서 넉넉함을 누리는 이상향으로 묘사하고 있다.

처용 설화의 배경인 개운포는 오늘날 울산인데 인접한 신라 원성왕릉의 무인 석상을 보면 곱슬머리와 매부리코를 하고 이색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9세기에 이미 많은 이슬람 상인들이 국제적인 무역항 울산을 통해 신라와 교역한 사실을 감안하면 서역인 기골이 왕릉 수호 석상에 나타나고 처용 설화의 주인공을 아랍인으로 추정하는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 이슬람은 회회(回回), 아랍은 대식(大食)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개경에는 이슬람 생활 공동체가 형성됐으며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의 기원인 아락주도 유입된다. 개성에서는 아직도 소주를 아락주라 부르는데 아랍어로 아라크(araq)는 증류를 의미한다.

조선 ‘세종실록’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근정전에서 거행되는 신년 하례식이나 각종 행사에 종종 참석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세종대왕 치세에 각종 과학 문명의 발달이 이루어진 이면에는 이슬람 문명과의 교류 영향을 부정하기 힘들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적극적인 대외 진출 사상이 결여됐던 탓에 엄연히 존재했던 우리의 역사는 이제 신기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고선지 장군은 나라 없는 유민의 한을 씹으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200년을 건너뛰어 한민족의 문화와 사상으로 무장하고 신(新) 탈라스 전투의 주인공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그려 본다.

< 김재두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1. 19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