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사진)는 윤관(尹瓘·?∼1111) 장군이 1107년 동북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 영토를 확장한 후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의 영토’라고 새겨진 경계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 윤관 장군이 장막 안에 정좌하고 있고 병사들이 비석을 세우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 중인 31×41.2cm 크기의 척경입비도는 17세기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와 제작 시기가 불확실한 그림일망정 고려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담은 기록화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당시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했던 병력은 무려 17만 명에 달했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대외 원정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전쟁이었던 것. 고려 조정은 윤관 장군이 점령한 지역에 함주·영주·복주·웅주·길주·공험진·숭녕·통태·진양 등 9성(城)을 설치, 점령지를 정식으로 고려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1년 5개월 정도가 지난 1109년 7월 고려는 여진족의 복종 서약을 받아낸 후 9성을 여진족에 반환하고 철수했다.

여기까지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지만 윤관 장군이 설치했던 9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걸린다. 윤관의 9성이 설치된 지역은 현재의 함경북도 길주 이남 일대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두만강 건너 간도에까지 미친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는 공험진과 경계비를 세웠다는 선춘령의 위치는 고려 시대 북방 영토의 한계선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조선 시대에도 윤관이 세운 경계비, 일명 선춘령비의 구체적 위치는 큰 관심거리였다.

태종은 공험진과 선춘령비까지가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명나라에 주장한 적이 있다. 세종대왕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선춘령비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비밀 명령(밀지)을 내렸을 정도다.

세종은 공험진과 선춘령비를 고려 영토의 북방 한계로 인식했고, 조선은 고려를 계승했으므로 선춘령비가 위치한 곳까지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당연히 선춘령비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영토 인식은 당시에 만들어진 지도에도 충실히 반영됐다. 세종의 명을 받아 정척·양성지가 완성한 ‘동국지도’를 보면 두만강 이북 지역에 공험진과 선춘령이 뚜렷하게 표시돼 있다.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선춘령비가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에 위치했다고 생각한 것.

척경입비도가 그려진 이유도 조선 시대의 이러한 역사 인식과 무관치 않다.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까지가 고려의 영토이자 조선의 영토라는 영토 인식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 바로 척경입비도인 것이다.

조선 시대 그림 중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기록화는 척경입비도가 거의 유일하다. 더구나 척경입비도는 고려 시대의 대외 원정과 영토 확장 과정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는 점이 가치를 더한다. 나아가 조선 시대의 영토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끄는 그림이 바로 척경입비도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8. 2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