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에 앞서 조금만 더 준비를 점검했더라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세계의 제해권을 놓고 영국과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겨뤄 패한 뒤 땅을 치며 후회했다.

16세기의 스페인은 영광을 전 세계에 드높이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온갖 부(富)가 바다를 따라 본국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 부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무적함대다.

하지만 종교 개혁 이후 늘어나는 신교도 세력 앞에 네덜란드는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고 영국은 그러한 가톨릭 제국의 분열을 지원하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펠리페 2세는 영국 침공의 칼을 빼들었다. 파르마 공작의 육군을 엄호하고 안전하게 상륙시키기 위해 리스본에는 130척의 배와 3만 명의 병사가 집결했다.

‘거대하고 가장 상서로운 함대’로 명명된 스페인의 아르마다는 1588년 5월28일 닻을 올렸다. 그러나 그 위용과는 달리 아르마다는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함대의 주력이던 육중한 갈레온 선들은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기에 적합하게 설계돼 해적질을 위해 설계된 영국의 사략선들에 비해 기동성이 떨어졌다.

또 스페인은 대포를 함대 접전을 알리는 신호탄 정도로 썼기 때문에 사거리가 영국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어떻게든 현측을 맞대고 접전을 벌일 수 있다면 우수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스페인 해군이 유리했지만 노련한 영국 해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7월19일, 영국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아르마다는 플리머스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영국 해군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고전을 거듭했다. 의기소침한 아르마다에 영국 해군은 작지만 예리한 결정타를 날렸다. 7월28일, 화염선 8척을 앞세운 야습에 아르마다는 무질서하게 흩어졌고 조직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메디나 시도냐 공작은 함대를 수습하려고 애썼지만 다음날 여세를 몰아 원거리 포격전을 벌이며 달려든 영국 해군과의 전투에서 3척이 침몰하고 1척이 나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스페인에 이미 승리의 기회는 사라졌다. 조류와 바람에 외해로 너무 떠밀려 와 함대는 적절한 피항지를 찾을 수도 없었고 조직력은 큰 손상을 입었다. 시도냐 공작은 영국 북단을 따라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험난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낯선 지형과 폭풍에 시달리며 겨우 67척의 배와 1만여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승리를 고대하던 펠리페 2세는 영광의 개선이 아닌 몰골뿐인 초라한 귀환에 절망의 기도를 해야만 했다. 펠리페 2세는 거대한 원정과 강대한 함대를 준비하면서도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남발했다. 망명객 스탠리는 영국을 공격하기 전에 아일랜드를 먼저 장악해 공격의 거점을 만들라고 조언했고, 산타 크루즈 제독은 네덜란드 연안에 아르마다를 안전하게 수용할 항구를 먼저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펠리페 2세가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작전에 필요한 발판을 차근차근 마련했더라면 무참한 패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대한 군대를 앞세운 승리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머나먼 원정에는 이들을 뒷받침할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병참의 중요성을 무시한 펠리페 2세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국의 영광이 허망하게 무너짐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 채승병 전사연구가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8. 8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