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병법 서적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흔히 ‘손자병법’ 등 중국의 고전 병법서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삼국 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100종이 넘는 병서(兵書)가 간행됐다. 이 중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은 80종 정도다.

신라 시대의 ‘무오병법’(武烏兵法)이나 ‘화령도’(花鈴圖), 고려 시대의 ‘김해병서’(金海兵書) 등은 책 이름만 역사 기록에 전해 올 뿐 실물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오늘날 전해 오는 우리나라 병법 서적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이 바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지은 진법(陣法·사진)이다.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을 이론으로 뒷받침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성리학자였다. 무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은 태조 이성계였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제도와 정치 이념을 만들어 낸 주인공은 정도전이다. 숭례문·흥인지문 등 서울 4대문의 이름을 정하는 일부터 조정의 중앙 관료 조직 정비에 이르기까지 정도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마디로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설계자였다.

무관이 아닌 정도전이 어떤 이유로 병법 서적 저술에까지 손댔을까. 정도전은 문(文)에 치우친 일반적인 유학자들과는 성향 차이가 많았다. 정도전은 한 시에서 “눈 덮인 벌판에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싶다”고 노래했을 정도로 호연지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종소리 북소리 우렁차게 지축을 울리고, 깃발은 펄럭이며 하늘에 이어지네. 만 마리 말이 움직여 돌아감이 한결같으니 이를 몰아 싸움터에 나갈 만하지 않으리.”

위풍당당한 이 글귀는 정도전이 지은 팔경시(八景詩) 중 군대 훈련장인 동문교장(東門敎場)을 노래한 구절이다.

정도전이 말한 이 싸움터는 다름 아닌 명나라의 요동이다. 정도전은 태조 6년(1397) 요동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명나라가 조선 왕조를 외교적으로 길들이기 위해 사신을 처형하는 등 지나치게 압력을 가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동명왕의 옛 땅을 회복할 때가 됐다”거나 “이민족으로 중원에 들어가 황제가 된 사람이 많다”고까지 주장했다. 명나라 압력에 굴하지 말고 공세적으로 대응,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자는 이야기다. 정도전은 이처럼 진취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그런 바탕에서 진법을 저술했다.

정도전의 진법은 요동을 공격하자는 그의 주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병서다. 정도전에 의한 요동 정벌 계획이 진행될 당시 전국적으로 진법 훈련이 실시됐으며, 그런 현실적 요구에 부응한 병서가 진법이었다.

진법 자체는 내용이 풍부하거나 심오한 병법 이론을 담은 책은 아니다. 군대 지휘와 운용에 필요한 핵심적 지식을 요약한 책에 가깝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다른 병법서와 구별되는 특징도 분명히 존재한다. 조선 초기 병법을 연구한 하차대(河且大)씨는 정도전 진법의 특징으로 ‘공격 지향적 특성’을 꼽는다.

진법은 친필 필사본이 전해 오지 않으나 1487년과 1791년 두 차례 간행된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에 그 내용이 수록돼 있다. 정도전은 진법 외에 ‘팔진삼십육변도보’ ‘오행진출기도’ 등 여러 병서를 지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진법뿐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9. 1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