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에게 붙잡혀 노비로 비참한 삶을 살게 하기보다 차라리 내손으로….”

삼국 시대 백제의 계백 장군은 마지막 전투인 황산벌 싸움에 출정하기 전 가족의 목을 베고 집을 나섰다. 이러한 비정하리만큼 단호한 결정은 아무나 쉽게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남겨진 가족들이 구차한 삶을 영위하게 하기보다 명예스러운 죽음을 택하게 하려 했던 장군의 고뇌에 찬 결단이자 만에 하나 남겨 둔 처자식 때문에 생에 애착을 느껴 결사 항전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우국충정의 결의다. 신라에 점령당해 사랑하는 처자식이 노예로 끌려가 온갖 치욕과 고초를 겪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자신과 가족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칼로 가족들의 목을 베고 전장으로 나가야 했던 계백 장군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꺼져 가는 국운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나당연합군에 저항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은 죽음을 눈앞에 둔 장수가 출전에 앞서 택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길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조국이 멸망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의 생명을 거둬 가문의 명예를 지켜냈고, 구국 전쟁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군인정신의 귀감으로 청사에 길이 남게 됐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계백 장군의 어떠한 면모를 본받아야 할 것인가.

먼저 비굴한 삶을 영위하기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혈육을 자신의 칼로 베는 아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군인인 계백 장군은 처자식이 적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 죽음보다 훨씬 두렵고 치욕이라 생각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칼을 휘둘렀다.

두 번째로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의 기상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이다. 서기 660년 백제는 국운이 기울어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쇠락해 가는 국가였다. 계백 장군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조국을 지키다가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다.

세 번째로 계백 장군은 위기에 처할수록 정신 전력의 중요성을 아는 지휘관이라는 점이다. 옛날 중국 월나라 왕 구천이 5000명의 군사로 오나라 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무찌른 예를 들면서, 전쟁의 승리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며 군사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이러한 계백 장군의 정신 교육 덕분에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한 5000명의 백제군은 상상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초반 네 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추하지 않은 절도 있는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줬다.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신라군이 김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을 시켜 공격해 왔지만 16세 어린 관창의 용기를 높이 산 계백은 넓은 도량을 발휘, 연민의 정을 느껴 살려 보냈다.

어린 장수의 용기를 치하하고 비록 적이지만 장수로서의 품위를 지켜 준 것이다. 그러나 관창이 계속 공격해 오자 아군에게 본보기로 끝내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냄으로써 상대에 대한 예우와 아군의 사기를 꺾지 않는 지휘관으로서의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나라는 멸망하고 자신도 싸움터에서 유명을 달리했지만 계백이 보여준 충성심과 강직한 군인 정신은 후세 사람들에게 대대로 칭송받아 왔다. 표해록(漂海錄)의 저자 최부(1454~1504)는 계백을 가리켜 “백제가 망할 때 단 한 사람의 충의(忠儀)도 없었는데 오직 계백만이 절개를 지켜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며 칭송했다.

이러한 계백 장군의 결연한 의지와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의 살신성인은 유사한 점이 많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그가 보여준 진정한 군인 정신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하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 중령 이준희 공군교육사·정치학박사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9. 15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