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통이 한가운데 딱 벌어지며 군사들이 나오는데 행군 호령을 똑 병학지남(兵學指南) 조(調)로 하것다.”

놀부가 박을 잘랐는데 금은보화는 나오지 않고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판소리 ‘흥부가’의 한 구절이다. 흥미롭게도 ‘흥부가’는 이때 군사들이 ‘병학지남’ 방식의 구령법을 사용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판소리에도 등장할 만큼 일반 백성들에게 친숙한 ‘병학지남’은 어떤 책일까. ‘병학지남’은 명나라 척계광(戚繼光·1528~1588) 장군의 병법 서적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우리나라에서 요약·재편집한 책이다.

척계광은 왜구(倭寇)를 진압, 명장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그의 병법은 ‘절강전법’(浙江戰法) 혹은 ‘척법’(戚法)이라 불렸는데 다양한 무기를 보유한 보병을 조합, 근접 전투에 강한 왜구에 대항하는 것이 핵심적 내용이다.

임진왜란 이후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는 조선군 훈련의 기본적 지침으로 간주됐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기효신서’는 원본 자체가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기효신서’는 명나라 절강 지방의 사투리·속어를 많이 사용, 해독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기효신서’를 쉽게 요약한 ‘병학지남’이 널리 읽힌 것이다. 책 제목에서 지남은 나침반 혹은 길잡이라는 뜻이므로 ‘병학지남’은 결국 ‘군사학의 길잡이’라는 뜻이 된다.

‘비변사등록’이라는 책에 따르면 숙종 시대 영의정이었던 최석정(崔錫鼎·1646~1715)은 “군부대에서 오로지 척계광의 유법을 쓰고 있으며 무사들은 단지 ‘병학지남’만을 보고 있다”고 당시 사정을 전하고 있다. 그만큼 ‘병학지남’이 기본적인 군사 교범으로 활용됐다는 뜻이다.

‘병학지남’은 우리나라의 독자적 진법 서적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의 새로운 병법을 우리나라가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라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병학지남’의 편찬 과정은 불확실하다. 한교(韓嶠·1556~1627)가 쓴 ‘조련도식’을 시작으로 1607년 평안도 교련청이 발간한 ‘군예정구’ 등 ‘기효신서’에 바탕을 둔 병법 서들이 계속 간행되면서 ‘병학지남’의 틀이 점차 완성됐으리라는 것이 노영구(盧永九) 박사 등 군사사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병학지남’은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수정과 첨삭을 가하는 식으로 편찬됐기 때문에 판본에 따라 내용 차이가 심했다. 정조(1752~1800)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판본의 장단점을 분석, 1787년 표준화된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병학지남’이 바로 정조 시절 편찬된 정본이다. 정조 이전에 발행된 ‘병학지남’ 판본들도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국어학자 도수희(都守熙)씨의 소장본, 필자의 소장본(사진) 등이 대표적이다.

‘병학지남’을 주로 본 사람은 한문 지식이 부족한 무관들이었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 일부는 한글로 언해(諺解)돼 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병학지남’을 보면 훈련장을 의미하는 교장을 ‘교？棹？으로 표기하는 등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옛 국어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한글 번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병학지남’의 여러 판본은 국어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9. 27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