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사라져 버린 것으로 알려진 고서(古書)가 발견되는 것은 학자들의 꿈이다. 실제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 학자들을 흥분시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무예 서적인 ‘무예제보’(武藝諸譜·사진)의 재발견 과정도 그러했다.

1993년 9월11일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비도서 자료실을 찾은 박기동(朴起東) 강원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전해 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던 ‘무예제보’의 마이크로필름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예제보’는 한교(韓嶠·1556~1627)가 1598년(선조 31년) 펴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무예 서적이다. 80년대 이후 전통 무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신보’ 등 이미 사라진 우리나라 옛 무예 서적에 대한 갈증 또한 심해졌다. 그때까지 전해 오는 우리나라 무예 관련 서적은 ‘무예도보통지’ 단 한 권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박교수는 동방 무술 유심권 도장의 종주인 이민영(李玟永)씨로부터 국립중앙도서관에 ‘무예제보’의 마이크로필름이 보관돼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박교수는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가 국립중앙도서관을 뒤져 저자 불명으로 분류된 ‘무예제보’의 마이크로필름을 실제 확인했다.

박교수는 다음 해 논문을 통해 이 사실을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했다. 꿈에서만 그리던 책이 400년의 세월을 넘어 출현하자 학계와 무술계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모든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수작업으로 자료를 검색해야 했던 과거에는 이런 ‘발견 아닌 발견’ 소동이 벌어질 만한 환경이었다.

재발견된 마이크로필름에는 출처가 ‘1982년 프랑스 동양어학교’라고 표기돼 있었다. 프랑스에 보관 중인 ‘무예제보’ 원본의 마이크로필름이 한·불 협정에 의해 82년 한국에 전해졌지만 그 사실이 관련 학계에 알려지지 않아 이 같은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무예제보’는 곤봉·등패·낭선·장창·당파·검 등 근접 전투에 필요한 여섯 가지 무기의 운용법을 담고 있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활이나 화약 무기 등 장사정 무기 위주의 전술을 구사했다. 그 덕에 조선의 활쏘기는 한·중·일 동양 3국에서 제일로 일컬어졌으나 근접 전투에 사용하는 칼이나 창을 다루는 기술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조정에서는 이처럼 지나치게 활쏘기에 편중된 무예 수련이 임진왜란 초기 전투 패전의 한 원인으로 생각해 한교를 책임자로 지명, 명나라 군대로부터 근접 전투 위주의 새로운 무예를 배우게 된다. 훈련의 총책임자였던 한교는 새로 배운 명나라 무예를 총정리, 표준화된 무기 운용법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무예제보’다.

‘무예제보’의 재발견은 우리나라 무예사 연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모든 무예사 연구가 ‘무예도보통지’만으로 이뤄졌지만 그보다 발행 시기가 빠른 무예 서적이 발견됨으로써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10. 4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