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사람과 말이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지나가야 했다. (중략) 심지어 부자와 부부가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길과 강변에 뼈가 짚단같이 늘어져 있었다.”

이 참혹한 내용은 ‘징비록’(懲毖錄·사진)에서 묘사하고 있는 임진왜란 당시 수도 한양의 모습이다.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이 개인적 경험담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의 전후 경과를 정리한 역사서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도체찰사로 전시 국정 운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주역이다. 이순신 장군의 정치적 후원자였으며 군 훈련 체계의 혁신을 가져온 훈련도감 창설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유성룡은 그 누구보다 임진왜란의 전체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의미다.

‘징비록’에는 조정 내의 분열,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상당수 관료와 군인들의 모습이 가감 없이 묘사돼 있다. 실패와 오욕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유성룡은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당시 조선의 전쟁 준비 소홀과 그로 인한 참혹한 결과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적어도 임진왜란에 관한 한 ‘조선왕조실록’도 ‘징비록’을 능가하지 못한다.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은 과장으로 악명이 높다. 열 배 이상 전과를 과장하는 것이 예사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일찍부터 자신들의 기록보다 ‘징비록’을 더 신뢰했다.

심지어 1695년 일본에서도 ‘징비록’이 간행돼 상업적으로 판매되기까지 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이 ‘징비록’이 시중에서 팔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징비록’의 해외 유출 방지 대책을 고민했을 정도다. 근대 이후 일본 등 외국의 임진왜란 연구자들이 대부분 ‘징비록’을 기본 참고 자료로 간주할 만큼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 ‘징비록’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징비록’은 사료로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도 훌륭하다. ‘징비록’은 마치 노인이 손자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듯이 어렵지 않은 문체로 임진왜란의 경과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광복 이후 80종이 넘는 ‘징비록’ 번역본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가치를 감안한다면 경북 안동에 위치한 하회 유씨 종가가 소장하고 있는 ‘징비록’ 친필 원본이 1969년 국보(제132호)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이 손으로 쓴 필사본 책이 국보로 지정된 경우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징비록’이 유일하다. 특히 친필 원본은 조선 시대에 널리 간행된 ‘징비록’ 판본에는 삭제된 내용도 모두 포함하고 있어 가치를 더한다.

제목의 ‘징비’는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오는 문장인 ‘스스로를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왔다. ‘징비록’은 결국 임진왜란의 참혹한 경험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뜻에서 나온 제목인 것. 우리는 흔히 역사의 교훈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제목의 의미 그대로 유비무환의 역사적 교훈을 가장 절절히 보여 주는 책이 바로 ‘징비록’이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11. 8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