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전력 우위 믿다 큰 손실

전쟁의 승패는 대부분 적의 취약 지점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아군의 병력과 화력을 집중시키느냐에 따라 갈린다. 그러나 충분한 전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적절히 구사하지 못해 과도한 희생의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43년 말, 살레르노 상륙 이래 거침없이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해방하던 연합군은 로마와 나폴리 중간의 산악 지대에 걸쳐 구축된 독일군의 동계 방어선에 부딪쳤다. 특히 카시노 주변의 산들과 라피도·가리글리아노 강을 따라 설정된 구스타프 방어선에서 진격은 완전히 정지됐다.

이곳에서 연합군을 가로막은 것은 험준한 지형에 조밀한 진지를 구축한 독일군 보병들이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몬테카시노 정상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주변을 방어하던 독일군 공수부대 강하엽병들은 ‘녹색 악마’로 불리며 강인한 전투력으로 연합군 병사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연합군은 1944년 1월4일 1차 공세를 개시하며 로마로 가는 길을 열고자 했다.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믿고 상황을 낙관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작전은 성공적으로 전개되다가도 독일군의 역습에 번번이 좌절됐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세 실패 이후 연합군은 몬테카시노 정상에서 주변의 움직임을 감제할 수 있는 성 베네딕트 수도원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이 수도원을 요새로 활용하는 바람에 작전이 실패했다고 오판한 것이다.

사실 독일군은 14기갑군단장 폰 젱어운트에터린 기갑대장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수도원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동계 산악 지대 돌파를 위한 전술적 고려는 소홀히 한 채 결국 연합군은 2월15일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수도원과 산 밑의 카시노 시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진격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폭격으로 도로가 망가지고 도시가 벽돌더미로 변하자 독일군 보병들은 폐허 곳곳으로 파고들어 더욱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다. 전투가 폐허 한가운데서 시가전 양상으로 변하자 연합군은 더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월15일과 3월15일에 전개한 2, 3차 공격에도 독일군의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5월11일 연합군은 한층 강화된 전력을 투입해서 독일군을 밀어붙였다. 이번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기만 작전에 말려들어 예비대를 상당수 안치오 교두보 전선으로 돌려버려 전력 격차가 너무 커진 상태였다. 위기를 맞은 독일군은 그제야 구스타프 방어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몬테카시노 일대를 고수하고 있던 녹색 악마들도 후방이 위태로워지면서 스스로 물러났다.

몬테카시노 전투 개시부터 로마 해방에 이르기까지 연합군은 무려 1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끝내 전력의 우위를 내세워 힘겨운 승리를 거뒀으나 그 과정은 참담한 패배의 연속이었으며 충분히 회피할 수도 있는 손실이었다.

지형이 험한 지역을 공격할 때 갖는 약점을 냉철히 분석, 이에 적절한 전술을 고안하기 전에 무턱대고 퍼부어 댄 소모적인 폭격은 연합군의 희생만 더욱 크게 만들었다. 전력의 우위에 기대기 앞서 더욱 효과적인 전술을 찾는 지휘관의 세심함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전투가 아닐 수 없다.

< 채승병 전사연구가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5. 11. 28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