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8년 10월13일 조선 조정은 공조판서 양성지(梁誠之)의 주장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 ‘국조오례의’에 실린 ‘병기도설’이 화포의 규격을 자치푼리(尺寸分釐) 단위로 숨김없이 그대로 공개하고 있어 책이 일본으로 넘어갈 경우 큰 재앙이 될 것”이라며 “‘국조오례의’를 수거, ‘병기도설’을 삭제한 후 재배포하자”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병기도설’(兵器圖說·사진)이 도대체 어떤 자료이기에 수거, 삭제하자는 극단적 주장이 나왔을까. ‘병기도설’은 화약 무기를 비롯한 조선 초기의 각종 무기와 갑옷을 그림과 글로 설명한 자료다.

‘병기도설’은 독립적인 책이 아니라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의 일부다. ‘국조오례의’는 성리학적 관점에 입각, 왕실의 의식 절차와 의례를 규정한 책이다. 양성지는 ‘국조오례의’처럼 널리 보급되는 서적에 ‘병기도설’ 같은 군사 기밀이 포함될 경우 보안상 위험하다는 생각에 삭제하자고 주장했던 것.

국왕 성종도 양성지의 주장에 관심을 보였지만 다른 신하들이 “화약 사용법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없어 일본으로 유출되더라도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고 반박한 덕에 ‘병기도설’은 삭제되지 않았다.

‘국조오례의’는 왕실 의식 절차를 규정한 책인 만큼 널리 보급됐고 오늘날 규장각·장서각 등 여러 곳에 보존돼 오고 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총통등록’ 등 다른 조선 초기의 무기 관련 자료가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도 ‘병기도설’만은 기적적으로 전해 오게 됐다.

‘병기도설’에는 총통완구 등 11종의 화포류, 대신기전 등 로켓형 화약 무기 3종, 대발화통·화차 등 기타 화약 무기 5종, 방패·창 등 12종의 병기, 수은갑 등 조선 시대 갑옷 5종, 투구 2종 등 40여 종에 달하는 조선 초기 무기류의 재료, 간단한 제조 방법과 구체적 규격, 그림이 실려 있다.

특히 ‘병기도설’은 우리나라 화약 무기 관련 현존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세종실록 부록에 일부 무기의 그림이 남아 있으나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병기도설’과 비교해 자료 가치가 떨어진다. 적어도 조선 초기 화약 무기의 실상을 밝히는 데는 ‘병기도설’의 자료적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병기도설’에 대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 등 개발 초기 단계의 화기를 이해하고 복원하는 데 실증적 자료를 제공하는 설명 그림책”이라고 평한다.

1979년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조선 초기의 화약 무기를 최초로 복원한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이 기본 자료로 활용한 것도 바로 ‘병기도설’에 기록된 화약 무기의 규격이었다.

채원장은 “실제 발사가 가능할 정도로 정밀하게 조선 초기의 각종 화약 무기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병기도설’의 정확한 기록 덕택”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길이 단위는 자(尺)·치(寸) 정도만 사용됐다. 하지만 ‘병기도설’은 높은 정밀도가 필요한 화약 무기의 규격임을 고려, 푼(分)·리(釐) 단위까지 사용, 크기를 정확히 표기하고 있다.

‘병기도설’의 자 단위가 영조척인지 주척인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1리면 0.2~0.3mm 수준의 정밀한 단위다.

< 출처 : 국방일보 김병륜 기자, 2005. 12. 20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