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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해군사관학교 (下)

외교문서에 나타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개교 일정은 다음과 같다.

1893년 3월 22일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설치령이 내려짐. 교관에는 영국인 콜웰 대위와 영어교사 허치슨 등이 부임함.<일본 외교문서222호, 조선국 해군사관학교 설치건>

1893년 4월 28일 교섭 통상사무독변 남정철이 통제영학당(강화도 해군사관학교 한문명칭) 설립비 6천원 지불 요청. 동년 5월 1일 총세무사 마근이 해관비 1천원 지급. <구한국외교문서, 청안 772호 총제영학당설립비 조달에 관한 건>

1893년 10월 7일 강화부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생도(15세 이상 20세 이하) 50명과 수병 500명을 모집 훈련시키는 것에 관한 논의를 끝내고 현재 교원 고용 등에 관해 협의 중임.<일본 외교문서 222호 강화부 해군사관학교 설치 건>

강화도 해군사관학교는 1893년 10월 7일 개교하였다. 사관생도 50명은 허치슨으로부터 영어교육을 받는 것으로 생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근무했던 성공회의 코푸 주교는 1893년 런던에서 발간된 The Morning Calm에 기고한 내용중에 “현재 가장 흥미 있는 사실은 조선정부가 강화도에 큰 학교를 최근 설립한 일이다. 18세에서 26세 젊은 청년 50명으로 상급반을 만들어 한 영국인의 책임하에 영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4년 4월 15일 군사학교사인 예비역 대위 콜웰과 교련교사인 준사관 커티스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곧 교과과정에 따라 군사학과 교련을 실시하여 사관생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군사학교사인 콜웰 대위가 상기 <모닝- 캄>지에 기고한 논문 「한국의요새」에“사관생도들은 아주 총명하여 제식훈련을 빠르게 숙달하고 있다.”평가하였다.

객관적이며 냉정한 사고를 가진 영국장교가 조선의 해군사관생도들을「총명하다」고 평가한데는 사관생도들의 학습열의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사관생도들은 최신 학문이며 전세계의 바다를 웅비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불타있었으며 해양방위의 첨병으로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의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것이 교육에 반영됨으로써 외국인교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게된 것이다.


4.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폐교

이억만리 이국땅에서 자신이 못이룬 해군장교의 꿈을 조선의 젊은이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콜웰 대위는 그의 논문「한국의요새」에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가 폐교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3년전 조선정부는 밀수 방지용 순양함을 운용하기 위하여 근대 해군 창설을 결심했다. 해군사관학교도 강화도에 함께 창설하였으며, 160여 명의 사관생도가 등록되어 있다. 이들을 교육하기위해 영국에서 해군장교 1명과 제식훈련교사 1명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된 직후 일본과 청국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분쟁 당사국인 조선으로서는 전쟁과 내전으로 전국이 혼란과 폐허로 변하여 해군사관학교는 폐교되고 해군사관생도들은 육군으로 전출되었다.”

조선의 해군력 증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일본의 방해를 피하기위해「밀수방지용」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조선 정부의 내심은 순양함을 보유한 강력한 해군력 건설이 그 목표였다. 그 첫출발로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수업이 진행되면서 50명 사관생도가 160여명으로 증가되었다. 이처럼 발전해 가던 해군사관학교가 폐교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은 1894년 7월에 발생한 청일전쟁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조선이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시키고 1894년 8월 26일 한일 공수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와같은 일련의 조치는 조선의 군사력을 무력화 내지 소멸시키는 전초작업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수업도 중단위기에 직면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는 청국의 지도와 그 지원으로 설립된 것임으로, 일본의 대륙진출정책에 방해요소로 작용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결과 일본은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도록 협박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해군사관생도들이 해군장교가 되겠다는 열의를 굽히지 않고 수업을 계속해달라는 요청에따라 영국인 교사들이 수업을 강행하자 1895년 일본은 조선 해관의 운영권을 강탈하여 영국인 교사들의 봉급을 동결하였다. 그런후 1895년 7월 15일을 기해 구식 수군제를 폐지시키면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도 구식 군대에 포함시켜 폐지시켰다. 따라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는 1기생의 졸업생도 배출시키지 못하고 폐교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5.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유적지가 담고있는 교훈

싹은 피웠지만 만개와 결실을 맺지 못했던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유적은 강화도 갑곶진 앞 이섭정 자리(강화대교 밑에서 150M 왼편)에 당시의 교사건물의 초석과 와전 그리고 주춧돌이 남아 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사관생도들이 갯벌에 높은 돛대를 세워 놓고 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사관생도들이 항해술과 체력단련을 위해 돛대를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관학교 건물과 연병장이 있던 자리는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다. 또한 당시 영국인 교사들이 살았던 관사가 거의 폐허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강화도 성공회 소유로 되어있다. 강화도에서는 이를 도유적지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또한 우리 해군에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건물지를 매입하여 보존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강화도의 특산물중에 순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영국인 교사 콜웰과 커티스의 부인들이 강화도에 살면서 영국의 순무씨앗을 갖고와 재배한 것을 본 강화도 주민들이 그 씨앗과 재배법을 습득하여 지금에 이른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이야기는 설화나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이며 우리 해군의 역사이다. 역사에는 영광의 역사도 있고 비운의 역사도 있다. 역사는 영광된 것만 드러내고 비운의 역사는 감추는 것이 아니다. 영광의 역사에서 강한 생존력을 얻고 비운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균형된 역사의식이다.

구한말이라고 지칭되는 기간(1876-1919)은 한국사에 있어서 모순(矛盾)의 시기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 당한 조선은 증기기관에 양포를 장착한 이양선(異樣船)의 해상 도발에 대항할 근대 해군 창설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과는 정반대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구한말 근대 해군 창설노력이 부국강병의 원대한 목표를 달성치 못하고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이용되었던 「모순(矛盾)의 역사(歷史)」에서 국가 미래와 대양해군의 웅비를 찾는 것이 우리 해군가족의 몫이다. 비록 구한말 근대 해군 창설노력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실패 요인을 밝히고 반성의 계기로 삼는다면 그것이 해군의 미래를 밝히는 거울이 되어 우리가 소망하는 대양해군건설에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유적지를 해군 정신교육의 도량으로 성역화해야 한다. 그리고 해군의 장교와 사병들이 이곳을 찾아와 복무선서를 한후“세계로 미래로”비약하는기개와“대양해군”건설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 역사의 비극은 한번으로 족한 것이다. 역사적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비운의 역사현장에 서 보는 것이 그 해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3-11-18 17: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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