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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상륙작전과 기뢰 소해 (1)




1950년 9월29일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몰아치던 당시 서울에 있는 중앙청 2층에서는 유엔군 총사령관「맥아드」원수가 그의 예하 지휘관들과 함께 한국동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상륙작전 수행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그 계획에 의하면 그날부터 꼭 삼주일 후인 10월 20일에 제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할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최종작전을 감행하는 동안 미 제8군은 북한 수도 평양으로 직접 밀고 올라가고 한국군은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에 제 10군단장 Edward M. Almond 소장은 원산작전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그 상륙작전이 10월 15일까지 수행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희망을 표명하였다.

이 계획의 초기의 수일 동안은 공산측의 기뢰로 인한 위험의 정도와 또 유엔군의 소해부대가 수행할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 될 것인가를 명확히 예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2주일이 못되어서 원산상륙전은 사실상 기뢰전(The battle of the minos)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북괴군의 기뢰전 배경

원산에서의 북괴군의 기뢰에 대해 펼쳐진 미해군 소해 작전에 대하여 기술하려면 먼저 당시 소련의 기뢰전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또 한국수로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를 용이하게 할 것이다.

역사상 소련은 오래전부터 기뢰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었고 또한 성공한 것으로 유명했다.

소련은「크리미아」전쟁(Crimian war 1877년)과 78년의노르전쟁(露士戰錚) 및 1904 ~ 5년의 노일전쟁(露日戰錚)에서 기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노일전쟁시에 소련해군은 여순(旅順)외항에 계류한 접촉형(Contact-type) 기뢰로써 하룻동안에 2척의 일본전함을 침몰시켰다.

이 기뢰는 거의 반세기를 경과하여 원산에서 대단히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던 것과 극히 유사한 형의 기뢰였다.

원래 북한해안에서의 소련의 기뢰부설 활동은 유엔함선이 북한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유엔 해군의 공격능력을 저하시키기 위하여 취하여진 것이며 뒤에 알려진 바와 같이 또한 소련은 1950년 현재로 미해군이 서태평양 해역에서 기뢰를 얼마나 잘 다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해 볼 이상적인 기회를 한국에서 얻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소련은 그의 위성국 북한이 유엔지상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는 것을 도울 수가 있었다.

한반도는기뢰방어전(Defensive Mine Warfare)을 시험하기에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첫째 한국해안은 얕은 곳이 많은 바 기뢰 부설에 이상적이다.

둘째 흙탕물은 이를 거의 완전히 은폐하였다.

셋째 동해나 서해는 모두 많은「쟝크」와「전마선」에서 쉽사리 투하한 표류기뢰가 한반도의 전길이를 1 5일 이내에 흘러갈 수 있게 하는 해류를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편리한 여건하에 있는 지역에서 소련은 모든 적합한 연안에 기뢰를 부설하여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상륙작전을 방해하며 또 유엔함정의 해안 포격을 곤란케 함으로써 기뢰를 충분히 이용할 기회를 또 다시 갖게 되었던 것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4-03-22 16: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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